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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를 새로고침

Autor: 이구름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5-22 11:47:45

“홍이수! 진짜 혼자 가도 돼? 일본에서 필요한 거 제대로 사 올 수 있는 거지?”

엄마, 재희는 앞으로 혼자 지낼 이수의 일본 생활이 조금 걱정되었다. 이수 역시 작은 걱정 하나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왕 결정한 거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기로 했다.

이수는 일주일 뒤 대한민국 서울이 아닌, 일본 오키나와에서 살아갈 예정이다.

일 년짜리 워킹 홀리데이.

국내 여행도 혼자 해본 적 없던 이수지만, 용기를 내어 1년 살기를 시도해 본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계획이었다. 이수는 익숙한 울타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었었다. 그럼에도 가야했다. 완벽히 낯선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서라도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와의 로맨스를 모두 새로고침하는 것.

이제는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빛바랜 로맨스일뿐이다. 씁쓸하게 홀로 간직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버리는 편이 나았다.

모조리 그곳에 던져 버리고 새로고침할 것이다, 나 혼자.

바다를 좋아했던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곳, 오키나와 바다.

내가 가서 널 그 바다에 버려줄게.

실컷 즐기도록 바라.

그리고, 다신 내 마음속에 찾아오지 마.

안녕.

그와의 추억을 모두 삭제하려는 이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들어간 로드숍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9291X의 <오키나와>.

그가 정말 좋아하던 노래였다. 이수에게 알려준 이 노래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열어줬다. 그리고, 이제는 새드 엔딩 스토리의 마침표가 되어 줄 차례다.

그를 잊고 산다는 착각이 무색하게 노래 하나에 다시 그와의 추억들이 소환됐다.

이수는 진열된 소품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숍을 나와 버렸다. 맥이 빠진 채 길을 걷다가 멈춰 섰다. 울컥 올라오는 부아를 긴 호흡으로 차분히 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미련한 걸까. 정말, 밉다. 휴우…

혼자 씩씩하게 다녀와야지.

일도 열심히 하고 재밌게 놀다 올 거야.

증명해 낼 거야, 이젠 다 괜찮다고.

 “하… 날씨 장난 없네....”

제법 시원하게 입고 나왔음에도 한낮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알아본 바로는 오키나와도 몹시 덥고 습하다고 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변화를 주기로 했다. 이수는 눈에 보이는 아무 헤어숍에 들어가 앉았다. 긴머리가 한번의 가위질로 숭덩 잘려나갔다. 현준과 만날 때는 항상 긴머리였다. 그가 항상 예쁘다고 해주었던 머리. 왠지 추억도 잘려나가는 것 같아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를 도려내기 위해 떠나면서 잘려나가는 추억이 아팠다. 스타일이 완성될 때까지만 마지막으로 슬퍼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눈물은 고이지 않았다. 

“자, 다 됐구요, 앞머리 시스루 뱅으로 살짝 넣었고, 뒤에 볼륨 살려서 커트했어요, 뒤 라인이 잘 빠졌어요. 거울로 한 번 보세요.”

 와… 거울 속에 있는 저 여자, 정말 나 맞나?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날아간 것처럼 가볍고 산뜻했다.

이수는 거리에 있는 거울이나 쇼윈도, 심지어 메탈 바 가릴 것 없이 쳐다봤다. 그곳에 비치는 새로운 모습이 낯설지만 꽤 보기 좋았다. 생경한 느낌에 머리를 흐트러 보기도 하고, 다시 앞머리를 단장하기도 하고.

좋다, 새 출발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필요한 것들을 잔뜩 사들고 계단을 오르니 이수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평소 운동을 싫어하는 대가였다. 슈퍼 평상을 코앞에 두고 계단 정상에서 짐을 내려놨다. 이수는 평상을 바라보며 난간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평상에 얽힌 현준과의 추억 조각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수는 두통의 원인을 더위 탓으로 돌리며 떠오른 추억들을 애써 모른 척했다.

단골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 그 앞에 놓인 평상에 털썩 앉았다. 이수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티셔츠를 펄럭였다.

 하- 이 미친 날씨. 너무 덥다.

 “홍이수!”

수진이었다. 이수의 성장 과정을 다 지켜본, 엄마 재희의 제일 친한 동네 친구. 재희가 한창 커리어를 쌓을 때 일이 많아 야근이 잦았었다. 그때마다 수진은 이수의 저녁을 챙겨줬다.

“어머, 우리 이수 머리 잘랐네. 너무 예쁘다!”

수진은 애정 가득 담은 손으로 이수의 등허리를 톡톡 쳤다.

“아, 그나저나 너 일본 간다며? 리조… 뭐?”

“리조바요! 일본 리조트에서 숙식하면서 일하는 알바예요.”

“어머, 어머, 호텔리어 같은 거야? 나 젊었을 때 그거 완전 인기였는데, 요즘 너희들 말로 완전 핫했어!”

“아, 호텔리어랑은 비슷한데 약간 달라요. 리조바는 숙식이 제공되는 시즌제 알바 형태가 많아요. 일본어 실력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천차만별이어서 일본어 공부도 좀 했어요.”

“역시! 이모는 말야, 네가 무슨 일을 하던 잘 할 거라 믿어. 얼마나 멋지게 성장할지 기대된다! 근데, 거기서 막 로맨스 생기는 거 아니니? 어머! 설렌다, 설레! 드라마처럼 멋진 남자랑 썸 타고 그런 거. 꺅!”

수진은 수줍은 듯 몸을 배배 꼬며 이수의 허벅지를 가볍게 내리쳤다. 그때 수진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이수에게 '가기 전에 보자’며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네? 로맨스요…?

제가 그걸… 지우려고 떠나는 건데요.

완전하게 새로고침할 거예요, 그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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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맨스를 새로고침.   현준의 이야기

    5년 전.현준은 어릴 적부터 붙어 지낸 베프 진우과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보통 그런 경우 기뻐해야 하지만, 현준은 그렇지 못했다. 현준은 그를 향한 다른 속 사정이 있었다. 아빠를 일찍 여읜 현준은 아빠의 부재를 크게 경험하진 않았다. 가족이 있었고, 살뜰히 챙겨주는 큰 댁이 있었다. 홀로 계신 엄마와 3살 어린 여동생을 위해 큰 말썽 없이 사춘기를 보냈다.평범한 삶이었지만 단 하나,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이 있었다. 진우를 향한 동경이었다. 중학교 시절, 현준과 진우는 동급생 중 키가 가장 컸고 체격도 우수했다. 잘생긴 현준의 외모는 여학생들에게, 시크한 분위기의 진우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진우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다. 가족보다 친구가 먼저였던 시절, 현준은 진우와 매일 붙어 다녔다. 진우와 함께하면 언제나 즐거웠다. 행복했다.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여자친구가 생긴 진우는 연애하느라 바빠졌다. 갑자기 친구를 뺏긴 현준은 묘한 질투심이 치솟아 올랐다.그런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니, 어느 순간 혼란이 찾아왔다. 진우를 향한 감정을 정의 내리기 힘들었다.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 의문과 의심을 더해 스스로를 괴롭혔다.진우를 가진 그의 여자친구가 미웠던 걸까,여자친구가 생겨 자신을 멀리하는 진우가 미웠던 걸까.계속되는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새 여자친구와 헤어진 진우는 다시 현준에게 돌아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진우와 계속 친구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진우와 다른 학교로 떨어졌다면 좋았을 것을.“남현! 너 3반? 아… 난 7반.”진우와 반이 갈렸다는 것에 현준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진우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못 찾았는지 툭하면 현준을 찾아왔다. 가끔은 진우를 피하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빠져나왔다. 이어버드를 귀에 꽂고 외부의 소리는 차단한 채 정처 없이 걷곤 했다. 그때 발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 로맨스를 새로고침.   불편한 트레이너

    기다리던 종강이 왔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재희와 저녁을 함께 먹은 뒤 간단히 티타임을 가졌다.“엄마, 나도 알바해 볼까?”“좋지. '모스 문' 엄마가 자주 가는 카페 있잖아. 거기서 구인하더라. 한번 가 봐. 가까우면 좋잖아?"버스 정류장 조금 지나 있는 모스 문(Moss Moon)은 우드엔 화이트로 모던한 스타일의 카페였다. 이수가 두어 번 테이크 아웃으로 들렸던 곳이었다. 카페 인테리어가 상당히 근사했다. 그곳에서 일할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일단 내일 면접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카페 아르바이트 경험 있나요? 이거 꽤 힘들어요. 그냥 시간 때우며 음료만 만드는 게 아니거든.”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던 카페 사장은 면접이 시작되자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수의 손끝은 잘게 떨렸다.“아... 경험은 없지만, 전 본래 한가로운 일보단 빡빡한 일이 좋아요. 돈 받으며 가만히 시간 보내는 건… 제게 맞지 않아요. 레시피도 잘 외울 자신 있어요!”사장은 이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래요, 혹시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어요?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곧 그만두는데 그전에 인수인계받았으면 해서요. 우리 카페 에이스였던 친구에게 이수 씨가 잘 배워줬음 좋겠네, 잘 부탁해요!”첫 5일은 연속으로 출근해 교육을 받기로 했다.다음 날, 카페 문을 조심스레 열고 카페 바(bar)에 있는 선임 아르바이트 생에게 인사했다. 선임은 이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거짓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시작된 교육은 생각보다 숙지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사장의 말대로 몇 번의 시범만으로 그녀가 카페의 에이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바리스타 자격증이 없는 이수는 간단한 음료 제조부터 차근차근 배우기로 했다. 청소부터 제조까지 그녀의 손끝에 벤 꼼꼼함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수학 공식처럼 레시피의 정확도에 따라

  • 로맨스를 새로고침.   이수의 이야기 (2)

    *이번 화는 ‘학폭‘과 관련된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련 트라우마가 있으시거나 정서적으로 힘드신 독자님들께서는 감상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역시 홍이수! 너희들 이수 좀 본받아! 수업 시간에 졸. 지. 않. 고 집중하면 너희들 중 절반은 성적 오를 거야! 사교육 자랑 아니다! 너희들이 깎아먹는 성적, 이수가 채워서 반 평균이 유지되는 거다! 꼴지반이라는 타이틀, 들으면 기분 좋니? 눈 깜빡일 새, 금방 고3 된다! 잘하자!”선생님의 그 ‘칭찬’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다.“졸라 부럽네, 뭘 해도 이쁨 받고.”“공부 잘하는 누구 때문에 누구는 등급 떨어진다며? 하, 짜증.”이수의 평화롭던 고등학교 생활은 그날로 끝이었다.“이수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역시 해리뿐이야. 너와 같은 반이란 게 참 감사해.“…근데... 너 정말 학원 하나도 안 다녀...? ““어...? 무슨 뜻이야…?”“아... 아니야, 우리 매점이나 가자, 떡볶이 먹어야지.”해리의 태도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 자체로 이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웅성—웅성—“아이고, 어떡해? 교과서가 다 찢어졌네? 사교육도 안 한다면서, 이제 공부는 어쩔?”“존나 불쌍, 쩔.”“박핼! 어째 홍이수 친구는 이름까지도 hell이냐? 크크크 야, 쟤 교과서 빌려줄 거야?”“우리 반 성적 골로 나락 가지 않으려면, 박핼이 책 양보해야지. 홍이수는 학원 하나 안 다닌다던데, 안 그래?”“학원 안 간다는 거, 다 개 구라 아냐?”어깨를 한 번 끌어올리며 무리들은 이수를 향해 조소를 터트렸다.휴우… 쉽지 않다. 정말. 대꾸할 가치가 없다. 이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야자 할 사람은 남고, 집에 갈 사람은 싸게싸게 가라! 반장 인사해!”이수는 지옥 같은 교실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님의 종례 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해리야, 집에 같이 갈까?”항상 집에 같이 가던 해리에게 이수가 물

  • 로맨스를 새로고침.   이수의 이야기 (1)

    5년 전, 3월.“이수야, 오늘 입학식, 우리 안 가도 되지?”기대하던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재희는 아침부터 질문을 가장한 결정을 툭 던졌다. 누가 봐도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둔 말이었다. 그 말에 아빠 상열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수는 상열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한 번 꽉 끌어안았다.“아빠 딸, 홍이수. 이제 더 이상 중학생 소녀가 아니니까, 괜찮아. 오늘도 잘 다녀오겠습니다!”상열은 한숨을 한 번 훅 내쉬며 이수의 어깨를 꽉 잡았다.“이수야, 이수 뒤엔 늘 아빠, 엄마가 있어! 오늘도 화이팅이야!”상열은 언제나 아빠 엄마 순으로, ‘아빠‘ 에 강세를 넣었다. 딸을 향한 애정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성실한 딸 바보, 홍상열 파파와 따뜻하지만 똑 부러진 김재희 여사. 이수는 맞벌이였던 부모님에게 언제나 우선순위 일 번이었다.학교를 가기 위해 이수는 집을 나섰다. 입춘이 지난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입김이 몽글몽글 꽃처럼 피어올랐다. 친한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학교에 배정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지만,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도 건너건너 아는 친구 몇은 있겠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이수는 입김에 희망을 담아 공기 중에 날려 보냈다. 하늘에 닿기를 기원하면서.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커다란 강당의 공기가 차가웠다. 낯선 환경은 익숙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위축되었다. 아는 얼굴이 혹 있을까, 이수는 이리저리 둘러봤다.같은 중학교 출신은 이수와 박해리, 둘뿐이었다. 마치 신이 작정하고 이수에게 장난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됐다. 수많은 졸업생 중 단 두 명만 같은 학교로 배정받는 확률이라니.관상을 믿지 않지만, 인상은 좀 본 달까.물론 인상이 그 사람의 인성을 모두 말해주진 않지만, 어느 정도 맞지 않나?이수는 자신만의 뇌피셜임을 인정하면서도 해리의 얼굴 곳곳을 살펴봤다. 나쁜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반이 된 이수는 이것이 천운

  • 로맨스를 새로고침.   잘생긴 똥

    이수의 첫 로맨스가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대학 신입 때였다.대부분 중고등학교 때 첫사랑을 만나지만, 이수의 고등학교 시절은 비참했다. 친구였던 모두가 손바닥 뒤집듯이 적이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한 명마저 이수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첫사랑은 뒤로하고 친구조차 남질 않았다.이수는 완벽한 외톨이였다.남들은 대학교만 들어가면 해봐야 하는 버킷리스트들이 가득했지만, 이수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오히려 암담했던 시절이 이어진 것 같아 정을 붙이기 싫었다.참 지루하고 따분한 대학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순간에 180도 뒤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최대한 외부인을 차단하고 지켜낸 자신만의 세계였다.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공간에 어느 순간, 눈부신 불청객이 등장했다. 남현준. 이수의 첫사랑이다. 그 불청객은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현준을 처음 봤던 순간이 이수에게 아직도 선명했다. 봄이 막 끝나갈 무렵, 한창이었던 벚꽃잎이 다 떨어진 직후였다.긴 세월 고요하고 잔잔했던 호수 위로 마치 작은 돌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정적을 깼던 신선한 충격이었다.그 당시 이수는 사람 없는 한적한 길만 골라 다녔다.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이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엮이는 게 싫어졌다. 쓸데없이 에너지와 감정을 소비하게 될 테니까.그날도 평소처럼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작은 벌레 하나가 이수의 눈에 들어갔다. 안경을 머리에 살짝 얹은 채로 눈을 비비며 걸어갔다.쿵—!“아야…”단단한 무언가와 꽤 세게 부딪혔다. 키가 커다란 남자의 등이 이수의 시선을 가렸다.남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누군가 시간의 마법을 부린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영화 속 미장센처럼 배경들이 흐릿해지고 오직 이수의 눈에 남자만 화사하게 빛났다. 살면서 이렇게 빛이 나는 사람을 성별 통틀어 처음 봤다.윤기가 흐르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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