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5년 전.
현준은 어릴 적부터 붙어 지낸 베프 진우과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보통 그런 경우 기뻐해야 하지만, 현준은 그렇지 못했다. 현준은 그를 향한 다른 속 사정이 있었다.
아빠를 일찍 여읜 현준은 아빠의 부재를 크게 경험하진 않았다. 가족이 있었고, 살뜰히 챙겨주는 큰 댁이 있었다. 홀로 계신 엄마와 3살 어린 여동생을 위해 큰 말썽 없이 사춘기를 보냈다.
평범한 삶이었지만 단 하나,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이 있었다. 진우를 향한 동경이었다.
중학교 시절, 현준과 진우는 동급생 중 키가 가장 컸고 체격도 우수했다. 잘생긴 현준의 외모는 여학생들에게, 시크한 분위기의 진우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진우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다. 가족보다 친구가 먼저였던 시절, 현준은 진우와 매일 붙어 다녔다. 진우와 함께하면 언제나 즐거웠다. 행복했다.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친구가 생긴 진우는 연애하느라 바빠졌다. 갑자기 친구를 뺏긴 현준은 묘한 질투심이 치솟아 올랐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니, 어느 순간 혼란이 찾아왔다. 진우를 향한 감정을 정의 내리기 힘들었다.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 의문과 의심을 더해 스스로를 괴롭혔다.
진우를 가진 그의 여자친구가 미웠던 걸까,
여자친구가 생겨 자신을 멀리하는 진우가 미웠던 걸까.
계속되는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새 여자친구와 헤어진 진우는 다시 현준에게 돌아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진우와 계속 친구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진우와 다른 학교로 떨어졌다면 좋았을 것을.
“남현! 너 3반? 아… 난 7반.”
진우와 반이 갈렸다는 것에 현준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진우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못 찾았는지 툭하면 현준을 찾아왔다. 가끔은 진우를 피하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빠져나왔다. 이어버드를 귀에 꽂고 외부의 소리는 차단한 채 정처 없이 걷곤 했다.
그때 발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순간 지진인가 싶었다. 고개를 돌려 진동의 진상을 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팍-!!!!
“윽…!!”
뒤에서 달려오던 여학생이 현준은 치고 갔다. 그 충격으로 몸이 휘청였고 이어버드가 귀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애는 사과는 둘째치고 부상 여부도 묻지 않은 채 달아났다. 이건 제대로 뺑소니지.
“아이씨!! 야!! 거기, 체육복 바지!!.”
여학생은 달리면서 뒤돌아 두 손을 모았다. 현준은 그 애의 무례함에 적지 않게 기분이 상했다.
“미... 미안, 미안해! 혹시 아프면 10반 홍이수 찾아와!”
여학생은 현준을 향해 환히 웃고는 앞을 향해 달렸다.
뭐... 뭐야… 개념 국 말아 먹었나…
현준이 여학생과 부딪혔던 건 찰나였다. 하지만 그 애의 환한 얼굴이 마치 짧은 영화를 본 것처럼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됐다.
홍이수라...
근데 내 이어버드!
이런 젠장… 잃어버렸다. 망할!!
***
웅성-웅성-
교실이 한 여학생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야, 야! 여자애들 대박이야!”
“뭐, 홍이수? 도른자(이수 담임 별명)가 걔를 심하게 빠나 봐. 김지연 있잖아, XX 중 출신. 꼭지 돌면 미친년 되는 애! 홍이수, 김지연한테 완전 나가리 됐어! 크크큭. 완전 드라마야, 드라마! 개 재밌어!”
싫다. 역겹다. 남 일이라고 다들 입이 가볍다. 남자애들이 여자애 한 명을 입에 올리며 떠들어 대는 꼴이 못마땅했다.
“쟤야, 쟤. 홍이수.”
“오 뭐야! 예쁜데!”
“변태세요? 존나 발리고 있는데 저런 얘가 좋냐?”
아, 씨발.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네. 현준은 교실을 나오며 곁에 있던 의자를 세게 치고 갔다.
쾅-!
“뭐야… 남현준. 지 의자도 아닌데 발로 차고 지랄이야, 왜 저래?”
“새끼, 쫄았냐? 크크큭.”
'홍이수'란 이름에 제멋대로 떠올려지는 그녀의 무구한 미소가 거슬렸다. 햇살을 담은 뽀얀 피부까지.
괜히, 신경 쓰이네.
현준은 그 길로 보건실로 향했다. 열려있는 복도의 창문으로 매미 소리가 들끓었다. 그 소리마저 현준의 신경을 긁었다.
“선생님, 저 왔어요.”
“그래, 현준이 왔니? 오늘도 두통?”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침대로 향했다.
보건 선생님의 응대는 언제나 따뜻했다. 가끔씩 선생님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또래의 시답잖은 허세를 보는 것보다 백 배 더 나았다. 그것이 속이 시끄러울 때 보건실을 이용하는 이유였다.
현준이 들어온 뒤 보건 선생님은 급한 호출로 자리를 비웠다.
현준은 텅 빈 보건실에 홀로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정적이 짙은 보건실의 소독약 냄새가 좋았다. 보건실 침대는 현준이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심신의 평화’ 구역이었다. 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조차 엄마와 여동생의 수다로 조용할 틈이 없었으니까.
그때, 딸깍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침상을 가린 커튼 너머로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가녀린 몸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선생님…? 안 계세요?”
홍이수였다.
5년 전.현준은 어릴 적부터 붙어 지낸 베프 진우과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보통 그런 경우 기뻐해야 하지만, 현준은 그렇지 못했다. 현준은 그를 향한 다른 속 사정이 있었다. 아빠를 일찍 여읜 현준은 아빠의 부재를 크게 경험하진 않았다. 가족이 있었고, 살뜰히 챙겨주는 큰 댁이 있었다. 홀로 계신 엄마와 3살 어린 여동생을 위해 큰 말썽 없이 사춘기를 보냈다.평범한 삶이었지만 단 하나,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이 있었다. 진우를 향한 동경이었다. 중학교 시절, 현준과 진우는 동급생 중 키가 가장 컸고 체격도 우수했다. 잘생긴 현준의 외모는 여학생들에게, 시크한 분위기의 진우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진우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다. 가족보다 친구가 먼저였던 시절, 현준은 진우와 매일 붙어 다녔다. 진우와 함께하면 언제나 즐거웠다. 행복했다.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여자친구가 생긴 진우는 연애하느라 바빠졌다. 갑자기 친구를 뺏긴 현준은 묘한 질투심이 치솟아 올랐다.그런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니, 어느 순간 혼란이 찾아왔다. 진우를 향한 감정을 정의 내리기 힘들었다.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 의문과 의심을 더해 스스로를 괴롭혔다.진우를 가진 그의 여자친구가 미웠던 걸까,여자친구가 생겨 자신을 멀리하는 진우가 미웠던 걸까.계속되는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새 여자친구와 헤어진 진우는 다시 현준에게 돌아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진우와 계속 친구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진우와 다른 학교로 떨어졌다면 좋았을 것을.“남현! 너 3반? 아… 난 7반.”진우와 반이 갈렸다는 것에 현준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진우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못 찾았는지 툭하면 현준을 찾아왔다. 가끔은 진우를 피하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빠져나왔다. 이어버드를 귀에 꽂고 외부의 소리는 차단한 채 정처 없이 걷곤 했다. 그때 발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기다리던 종강이 왔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재희와 저녁을 함께 먹은 뒤 간단히 티타임을 가졌다.“엄마, 나도 알바해 볼까?”“좋지. '모스 문' 엄마가 자주 가는 카페 있잖아. 거기서 구인하더라. 한번 가 봐. 가까우면 좋잖아?"버스 정류장 조금 지나 있는 모스 문(Moss Moon)은 우드엔 화이트로 모던한 스타일의 카페였다. 이수가 두어 번 테이크 아웃으로 들렸던 곳이었다. 카페 인테리어가 상당히 근사했다. 그곳에서 일할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일단 내일 면접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카페 아르바이트 경험 있나요? 이거 꽤 힘들어요. 그냥 시간 때우며 음료만 만드는 게 아니거든.”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던 카페 사장은 면접이 시작되자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수의 손끝은 잘게 떨렸다.“아... 경험은 없지만, 전 본래 한가로운 일보단 빡빡한 일이 좋아요. 돈 받으며 가만히 시간 보내는 건… 제게 맞지 않아요. 레시피도 잘 외울 자신 있어요!”사장은 이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래요, 혹시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어요?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곧 그만두는데 그전에 인수인계받았으면 해서요. 우리 카페 에이스였던 친구에게 이수 씨가 잘 배워줬음 좋겠네, 잘 부탁해요!”첫 5일은 연속으로 출근해 교육을 받기로 했다.다음 날, 카페 문을 조심스레 열고 카페 바(bar)에 있는 선임 아르바이트 생에게 인사했다. 선임은 이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거짓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시작된 교육은 생각보다 숙지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사장의 말대로 몇 번의 시범만으로 그녀가 카페의 에이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바리스타 자격증이 없는 이수는 간단한 음료 제조부터 차근차근 배우기로 했다. 청소부터 제조까지 그녀의 손끝에 벤 꼼꼼함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수학 공식처럼 레시피의 정확도에 따라
*이번 화는 ‘학폭‘과 관련된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련 트라우마가 있으시거나 정서적으로 힘드신 독자님들께서는 감상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역시 홍이수! 너희들 이수 좀 본받아! 수업 시간에 졸. 지. 않. 고 집중하면 너희들 중 절반은 성적 오를 거야! 사교육 자랑 아니다! 너희들이 깎아먹는 성적, 이수가 채워서 반 평균이 유지되는 거다! 꼴지반이라는 타이틀, 들으면 기분 좋니? 눈 깜빡일 새, 금방 고3 된다! 잘하자!”선생님의 그 ‘칭찬’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다.“졸라 부럽네, 뭘 해도 이쁨 받고.”“공부 잘하는 누구 때문에 누구는 등급 떨어진다며? 하, 짜증.”이수의 평화롭던 고등학교 생활은 그날로 끝이었다.“이수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역시 해리뿐이야. 너와 같은 반이란 게 참 감사해.“…근데... 너 정말 학원 하나도 안 다녀...? ““어...? 무슨 뜻이야…?”“아... 아니야, 우리 매점이나 가자, 떡볶이 먹어야지.”해리의 태도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 자체로 이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웅성—웅성—“아이고, 어떡해? 교과서가 다 찢어졌네? 사교육도 안 한다면서, 이제 공부는 어쩔?”“존나 불쌍, 쩔.”“박핼! 어째 홍이수 친구는 이름까지도 hell이냐? 크크크 야, 쟤 교과서 빌려줄 거야?”“우리 반 성적 골로 나락 가지 않으려면, 박핼이 책 양보해야지. 홍이수는 학원 하나 안 다닌다던데, 안 그래?”“학원 안 간다는 거, 다 개 구라 아냐?”어깨를 한 번 끌어올리며 무리들은 이수를 향해 조소를 터트렸다.휴우… 쉽지 않다. 정말. 대꾸할 가치가 없다. 이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야자 할 사람은 남고, 집에 갈 사람은 싸게싸게 가라! 반장 인사해!”이수는 지옥 같은 교실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님의 종례 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해리야, 집에 같이 갈까?”항상 집에 같이 가던 해리에게 이수가 물
5년 전, 3월.“이수야, 오늘 입학식, 우리 안 가도 되지?”기대하던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재희는 아침부터 질문을 가장한 결정을 툭 던졌다. 누가 봐도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둔 말이었다. 그 말에 아빠 상열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수는 상열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한 번 꽉 끌어안았다.“아빠 딸, 홍이수. 이제 더 이상 중학생 소녀가 아니니까, 괜찮아. 오늘도 잘 다녀오겠습니다!”상열은 한숨을 한 번 훅 내쉬며 이수의 어깨를 꽉 잡았다.“이수야, 이수 뒤엔 늘 아빠, 엄마가 있어! 오늘도 화이팅이야!”상열은 언제나 아빠 엄마 순으로, ‘아빠‘ 에 강세를 넣었다. 딸을 향한 애정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성실한 딸 바보, 홍상열 파파와 따뜻하지만 똑 부러진 김재희 여사. 이수는 맞벌이였던 부모님에게 언제나 우선순위 일 번이었다.학교를 가기 위해 이수는 집을 나섰다. 입춘이 지난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입김이 몽글몽글 꽃처럼 피어올랐다. 친한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학교에 배정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지만,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도 건너건너 아는 친구 몇은 있겠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이수는 입김에 희망을 담아 공기 중에 날려 보냈다. 하늘에 닿기를 기원하면서.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커다란 강당의 공기가 차가웠다. 낯선 환경은 익숙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위축되었다. 아는 얼굴이 혹 있을까, 이수는 이리저리 둘러봤다.같은 중학교 출신은 이수와 박해리, 둘뿐이었다. 마치 신이 작정하고 이수에게 장난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됐다. 수많은 졸업생 중 단 두 명만 같은 학교로 배정받는 확률이라니.관상을 믿지 않지만, 인상은 좀 본 달까.물론 인상이 그 사람의 인성을 모두 말해주진 않지만, 어느 정도 맞지 않나?이수는 자신만의 뇌피셜임을 인정하면서도 해리의 얼굴 곳곳을 살펴봤다. 나쁜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반이 된 이수는 이것이 천운
이수의 첫 로맨스가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대학 신입 때였다.대부분 중고등학교 때 첫사랑을 만나지만, 이수의 고등학교 시절은 비참했다. 친구였던 모두가 손바닥 뒤집듯이 적이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한 명마저 이수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첫사랑은 뒤로하고 친구조차 남질 않았다.이수는 완벽한 외톨이였다.남들은 대학교만 들어가면 해봐야 하는 버킷리스트들이 가득했지만, 이수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오히려 암담했던 시절이 이어진 것 같아 정을 붙이기 싫었다.참 지루하고 따분한 대학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순간에 180도 뒤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최대한 외부인을 차단하고 지켜낸 자신만의 세계였다.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공간에 어느 순간, 눈부신 불청객이 등장했다. 남현준. 이수의 첫사랑이다. 그 불청객은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현준을 처음 봤던 순간이 이수에게 아직도 선명했다. 봄이 막 끝나갈 무렵, 한창이었던 벚꽃잎이 다 떨어진 직후였다.긴 세월 고요하고 잔잔했던 호수 위로 마치 작은 돌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정적을 깼던 신선한 충격이었다.그 당시 이수는 사람 없는 한적한 길만 골라 다녔다.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이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엮이는 게 싫어졌다. 쓸데없이 에너지와 감정을 소비하게 될 테니까.그날도 평소처럼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작은 벌레 하나가 이수의 눈에 들어갔다. 안경을 머리에 살짝 얹은 채로 눈을 비비며 걸어갔다.쿵—!“아야…”단단한 무언가와 꽤 세게 부딪혔다. 키가 커다란 남자의 등이 이수의 시선을 가렸다.남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누군가 시간의 마법을 부린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영화 속 미장센처럼 배경들이 흐릿해지고 오직 이수의 눈에 남자만 화사하게 빛났다. 살면서 이렇게 빛이 나는 사람을 성별 통틀어 처음 봤다.윤기가 흐르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홍이수! 진짜 혼자 가도 돼? 일본에서 필요한 거 제대로 사 올 수 있는 거지?”엄마, 재희는 앞으로 혼자 지낼 이수의 일본 생활이 조금 걱정되었다. 이수 역시 작은 걱정 하나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왕 결정한 거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기로 했다.이수는 일주일 뒤 대한민국 서울이 아닌, 일본 오키나와에서 살아갈 예정이다.일 년짜리 워킹 홀리데이.국내 여행도 혼자 해본 적 없던 이수지만, 용기를 내어 1년 살기를 시도해 본다.충동적으로 시작된 계획이었다. 이수는 익숙한 울타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었었다. 그럼에도 가야했다. 완벽히 낯선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서라도 해야할 일이 있었다.그와의 로맨스를 모두 새로고침하는 것.이제는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빛바랜 로맨스일뿐이다. 씁쓸하게 홀로 간직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버리는 편이 나았다.모조리 그곳에 던져 버리고 새로고침할 것이다, 나 혼자.바다를 좋아했던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곳, 오키나와 바다.내가 가서 널 그 바다에 버려줄게.실컷 즐기도록 바라.그리고, 다신 내 마음속에 찾아오지 마.안녕.그와의 추억을 모두 삭제하려는 이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들어간 로드숍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9291X의 .그가 정말 좋아하던 노래였다. 이수에게 알려준 이 노래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열어줬다. 그리고, 이제는 새드 엔딩 스토리의 마침표가 되어 줄 차례다.그를 잊고 산다는 착각이 무색하게 노래 하나에 다시 그와의 추억들이 소환됐다.이수는 진열된 소품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숍을 나와 버렸다. 맥이 빠진 채 길을 걷다가 멈춰 섰다. 울컥 올라오는 부아를 긴 호흡으로 차분히 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미련한 걸까. 정말, 밉다. 휴우…혼자 씩씩하게 다녀와야지.일도 열심히 하고 재밌게 놀다 올 거야.증명해 낼 거야, 이젠 다 괜찮다고. “하… 날씨 장난 없네....”제법 시원하게 입고 나왔음에도 한낮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알아본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