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중해의 눈부신 낙원에서 달콤한 허니문을 마치고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저택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오후의 나른한 햇살이거대한 서재의 아치형 창문을 통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가죽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알렉세이는문득 책상 한켠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낡은 표지의 책 한 권으로 시선을 던졌다.밀라가 결혼 전부터, 그리고 결혼 후에도 늘 손에서 놓지 않고 아끼던 성경이었다.알렉세이는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걸어가 그 책을 집어 들었다.평생을 피비린내 나는 어둠의 세계에서,총성과 배신만을 무기로 삼아 살아온 마피아 보스의 손끝에 닿기에는너무나도 거룩하고 낯선 물건이었다.“아직도 이 책이 그렇게 좋은가, 밀라…….”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표지를 넘기자,빛바랜 페이지들 사이로 밀라의 정갈한 손글씨와그녀가 짚어둔 성경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다.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고,오직 밀라가 사랑하는 것이기에 이해하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하지만 한 줄 한 줄 눈으로 좇아갈수록,텍스트 속에 담긴 묵직한 구원의 메시지는얽혀 있던 알렉세이의 영혼을 미묘하게 파고들었다.피로 물든 자신의 손과, 그녀가 품고 있는 빛의 세계.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이 남자가 나아가야 할 보이지 않는 길이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책장을 한참 동안 말없이 넘기던 알렉세이는밀라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자,멋쩍은 듯 책을 제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바로 그때였다.재단 이사장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밀라가 갑자기 가슴을 치며 헛구역질을 시작한 것은.“으윽……으읍!”밀라는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울렁거림에 입을 틀어막고는급히 서재와 연결된 프라이빗 욕실로 황급히 달려갔다.“밀라!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또 기관지가 안 좋아진 건가? 의사! 당장 의사 불러 와!”서재에 있던 알렉세이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굳게 닫힌 욕실 문을 당장이라도 부수 기세로 거칠게 두드리며 비명을 질렀다.그의 얼굴에는
“읍……!”밀라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짧은 탄성은 그의 뜨거운 입맞춤 속에 단숨에 삼켜졌다.처음에는 부드럽게 어르듯 시작되었던 입맞춤은이내 걷잡을 수 없이 뜨겁고 탐욕스러운 형태로 변모해 갔다.그간 쌓여왔던 금욕의 시간과 억누르던 본능이 폭발하듯,알렉세이는 영혼까지 삼켜버릴 기세로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며 끈질기게 탐닉했다.밀라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그의 압도적인 기세와 뜨거운 체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그의 단단한 어깨에 두 손을 의지하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창밖의 백야는 여전히 환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지만,거대한 야수의 성전 안에서는 이제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가장 뜨겁고도 황홀한 밤의 서막이 거칠게 열리고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방 안을 가득 메우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창밖의 백야는 조금씩 짙은 새벽의 기운으로 바뀌고 있었다.밀라는 알렉세이의 단단한 가슴에 지친 듯 기대어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그녀의 맨살 위로 알렉세이의 커다란 손이 떨어질세라 부드럽게 감싸 쥐어진 채였다.하지만 평화로운 잠을 즐길 여유는 길지 않았다.지중해의 숨겨진 해변에 위치한 프라이빗 풀빌라로 향하는 전용기가대저택의 사설 격납고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밀라. 일어나야 해, 아가씨. 비행기 시간이 됐어.”알렉세이가 잠든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밀라는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지만,이내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벌써……요?”“응. 지중해의 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코르네 가문의 전용 헬기에 오른 두 사람은모스크바를 경유해 남쪽으로 향하는 대형 전용기 스위트 캐빈에 탑승했다.일반 여객기의 비즈니스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거실과 침실, 전용 욕실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호화로운 공간이었다.전용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박차고 떠올라 구름 위 안정권에 접어들자,기내의 조명은 은은한 로열 블루 빛으로 낮춰졌다.하객들의 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형 예배당을 뒤흔들었던 세기의 결혼식이 막을 내리고,네바강의 야경이 환상적인 백야의 은빛으로 물들어갈 무렵이었다.전 세계에서 모여든 정재계 거물들과 음지의 군주들이 축배를 들며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대규모 피로연이코르네 가문의 거대 대저택 연회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었다.화려한 샹들리에 빛 아래에서 수백 명의 하객이 웃고 떠들며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맞춰 춤을 추었고,연회장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낙원의 풍경을 연출했다.하지만 그 화려한 연회의 주인공인 알렉세이 코르네의 머릿속은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크 네이비 턱시도를 입은 채 와인잔을 들고 하객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그의 시선은,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는 듯연회장 한켠에서 수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밀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오늘의 밀라는 그야말로 모든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완벽한 성녀이자 여왕이었다.순백의 레이스 드레스를 벗고 단아하면서도 고혹적인샴페인 색상의 실크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선과 우아한 목선은,평생을 어둠 속에서 피와 총성만을 마주하며 살아온사내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사실 알렉세이는 지난날들 동안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지독한 금욕 생활을 버텨내고 있었다.밀라가 결혼식 전 까지 순결하자는 제안에 선뜻 동의한 자신을옃번이나 원망하며 후회했는지 몰랐다.하지만 결코 밀라의 그 뜻을 꺾을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밀라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과 집착,그리고 그녀의 상처를 온전히 보듬어주기 위해그녀의 몸에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은 채 온 마음으로 아끼고 또 아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부부의 서약을 맺었고,그녀는 이제 온전히 법적으로도,영혼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자신의 유일한 아내이자 마돈나였다.더 이상 참아내는 것은 사내로서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터져 나오기 직전인 화산 같은 본능의 문제였다.밤이 깊어질수록 알렉세이의
알렉세이의 뜨거운 입맞춤 속에서 잠시 불안을 지워내긴 했으나,밀라의 가슴 한켠에 자리 잡았던 묘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그날 이후로도 그녀의 주변에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변화들이 찾아왔다.재단으로 걸려왔던 그 한 통의 기이한 전화 이후,과거 어린 시절 자신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이모부와 그 일당들이거짓말처럼 다시는 세상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언론에서도, 주변 소문에서도 그들의 이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알렉세이가 다시 모스크바 출장을 다녀 온 날."알렉세이! 왜 이렇게 늦었어요? 모스크바 출장은 잘 다녀오신 건가요?”저택 로비로 들어선 알렉세이를 보며 밀라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알렉세이는 복도에서 묻은 차가운 기운을 지우기 위해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세상에 비밀은 없다지만, 지난 밤 밀라의 말과 표정들로아내에게 쓰레기들의 이야기가 이미 귓가에 닿았음을 직감한 알렉세이가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조금 남은 흔적까지 뒷처리를 하고 온 것이였다.만약 그 쓰레기들의 존재가 다시 그녀의 삶을 흔들려 한다면,자신은 더 잔인하고 철저한 방법으로 그 모든 싹을 도려내리라 다짐했었기에.밀라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그녀의 몸에선 언제나처럼 정결한 라벤더 향과 포근한 온기가 풍겨
모스크바 외곽의 사설 도박장에서이모부와 포주 표드롭스키가 시베리아 지하 감옥으로 비참하게 끌려간 그날 밤 이후,알렉세이 코르네는 모든 뒷처리를 완벽하고 신속하게 마쳤다.두 인간 쓰레기가 세상에서 지워진 흔적은 그 어떤 곳에도 남지 않았다.언론은 물론이고 정보망 전체에서 그들의 존재는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소멸했다.알렉세이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밀라가 과거의 추잡하고 어두운 망령들의 이름 따위에다시는 눈살을 찌푸리거나, 마음의 평화를 해치는 일 없도록철저하게 보호하는 것.그것은 거대 마피아 보스로서 누군가를 지켜내는 가장 무겁고도 잔인한 형태의 배려이자,아내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었다.대저택의 서재는 언제나처럼 고요했고, 밤의 침묵 속에서 알렉세이는 밀라가 다치지 않도록 방어막을 더욱 단단하게 쳤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비밀이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수 없듯, 묘한 기운은 사소한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들기 마련이었다.그 무렵, 루체 재단의 이사장실에서 업무를 보던 밀라는 우연히 재단으로 걸려온 한 통의 기이한 국제 전화를 받게 되었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도 겁에 질려 있었으며, 과거 모스크바의 작은 소도시에서 잠시 마주쳤던 이모부의 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밀라에게 며칠 전 이모부와 어떤 위험한 무리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끌려갔다는 흉흉한 소문을 전했다.“밀라 안 대표님…… 그분들이 당신의 친척들이 맞다면, 지금 당장 그 남자가 남긴 물건들을 확인해 보셔야 할 겁니다. 그들은…… 당신이 상상도 못 할 무서운 사람들의 눈에 밟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요……”전화는 그 마디를 남긴 채 뚝 끊어져 버렸고,수화기 너머로는 삭막한 뚜우- 하는 톤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밀라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한참 동안하얗게 질린 얼굴로 초점 없이 창문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가슴 한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