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를 폐위하라목여태감은 마음이 아팠다. 황제 곁에 이렇게 오래 있다 보니 황제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황제가 얘기한 그대로 황제는 자신조차 매정하게 대해서 궁에 있는 그 누구보다 허름한 것을 먹고 마셨다. 그게 바로 수라를 늘 혼자 하는 이유다.나라의 대사를 위해서는 본인의 희로애락은 많은 경우에 감추지 않을 수 없다. 황제의 어깨엔 너무도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다.바람이 불어 황제의 탁자에 있던 화선지가 날아가고 명원제는 뭔가를 쓰려고 했으나 붓을 들고 한참을 있어도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명원제는 경여궁 사람을 전부 바꿔서 현비가 죄를 짓고 죽었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황후와 황귀비는 짐작하고 있으나 감히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명원제는 비밀리에 장사를 지내고 대외적으로는 현비가 여전히 중병을 앓고 있으며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것으로 했다.정월 초여드레, 조정 아침회의가 열리고 아직 선포가 있기도 전에, 과연 어떤 사람이 앞장 서 상소를 올려 발의하길 태자의 생모가 불경하고 불효한 대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앞장 서 상소를 올린 사람은 바로 분수에 만족하며 한동안 자중하고 있던 기왕이다.기왕은 자신만만하게 경전을 인용하고 심지어 후궁과 외척의 난까지 언급하며 태자의 생모는 반드시 품행이 단정해야 하며, 명예를 실추시키는 요소가 혈통에 이어져 향후 황실의 계승자에게 영향을 주면 안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쌀쌀맞게, “소신은 북당 강산의 천만년 대계를 위해 아바마마께서 태자 우문호를 폐위 시키고, 다른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북당 황실의 혈통이 향후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울러 우문호가 경조사 부윤을 맡을 뒤로 범인을 오인한 사건이나 미결안이 많이 쌓인 것으로 볼 때, 중임을 담당할 역량이 부족함을 알 수 있으니 아바마마께서는 이점 숙고하여 주십시오.”기왕이 제기한 안건은 조정의 많은 대신들과 협의를 거쳤지만 동조하기 쉽지 않은 것이, 일단 혈통이
희비가 엇갈리는 여씨와 소씨덕비를 배출한 여씨 집안(汝家)사람들이 서둘러 무릎을 꿇고 성은에 감읍했다. 그들이 얼른 성은에 감사하기면 하면 누가 비난을 하던 황제의 결정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여씨 집안은 무장 출신의 무인들로 한동안 그래도 괜찮았던 것이 국경지대에 항상 작은 소요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난 2년간 물밑 충돌은 있었으나 표면적으론 평온해서 무장이 나설 일이 없는 지라 무능하게 이삼 년을 지내온 고로, 조정에서의 위치도 난감했는데 이제 덕비가 황귀비가 되었으니 태자도 자기 사람이 되었다. 기뻐서 웃다가 턱이 빠질 지경이다.기왕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바보취급을 당했는데 아바마마께서 우문호를 덕비의 자식으로 삼으실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 그야 말로 청천벽력이었다.이런 편법이 과거에도 있긴 있었지만 서열이 낮은 황자들에게나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총애하는 비빈이 아이가 없을 때 상대적으로 품계가 낮은 빈첩의 아이 중에 황자를 데려와 족보에서 비의 이름 아래 써서 황자의 신분을 높이고 비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하지만 우문호는 일개 황자가 아닌 태자로 태자가 다른 비빈을 어머니로 삼다니 역시 역사상 유래가 없다.기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며 무의식적으로 안왕을 보니, 한가한 표정으로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고 있다. 어쩐지 안왕부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더라니. 그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아바마마의 냉정한 눈빛을 마주하고 기왕은 여전히 최후의 발악을 하는데, “현비 마마께서 아직 살아 계신데 태자가 어찌 다른 사람을 어머니로 모실 수가 있습니까?”아무도 기왕의 말을 받아 이어가지 않는 게 족보와 성지에 이미 다 기록이 되어 이 일은 이미 사실이지 상의할 문제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시화 된 것은 수정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떠들어봤 자 속마음만 들킬 뿐이다.기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특히 아바마마의 그 냉정한 눈빛을 대하니 자신의 미래가 캄캄하게 느껴졌다.제일 즐거운 건 덕비의 아버지와 오빠들로
우문령을 위로하라전에 두 소씨 집안이 경성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는데, 각각 절반 씩 차지하고 있었다.지금 다른 소씨는 은거하여 물러나 한적하고 유유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반면, 현비의 소씨 집안은 끊임없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분투했으나 쓸 만한 인재는 없고, 뒷문으로 들어가는 편법만 알아서 일순간은 부귀했으나 복이 재앙으로 바뀌고 말았다. 기초 없는 고대광실이 어찌 태풍과 비바람을 이길 수 있을까?우문호는 슬픔과 무력함으로 잠잠하기만 했다.소씨 집안은 어쨌든 우문호의 외가가 아닌가.그리고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어마마마는 그들을 위해 반평생을 수고 했건만 지금 그들은 자기 앞날에 급급해 누구 하나 어마마마를 위해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어마마마, 돌아가시기 전에 똑바로 보셨습니까?’우문호는 눈을 부릅뜨고 날이 밝기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아침 일찍 원경릉이 일어나기 전에 우문호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나갔다.우문호가 나간 뒤 원경릉은 바로 눈을 떴다.연기로 따지면 원경릉도 빠지는 능력은 아니라, 우문호가 한숨도 못 잘 때 자기는 깊이 잠든 척 했지만 우문호와 같이 아침이 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거절한지 사흘째 되던 날 초왕부는 드디어 대문을 열었다. 왜냐면 공주의 혼사가 닥쳐서 기쁘지 않아도 할 일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궁에서도 사람이 와서 태자비가 공주와 함께 해달라고 했는데 초이레 저녁 그 일이 있은 뒤로 공주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통에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현비가 우문령에게 입힌 타격이 너무 컸다.16년간 자기를 지켜주던 보금자리가 붕괴되고 말았다. 우문령이 전에 비록 황궁이 새장 같아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자유를 원한 것이지 가족을 싫어 해서가 아니었다.현비는 우문령의 16년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우문령은 단지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었다. 현비가 죽기 전에 우문령을 다치게 한 건 죽었다가 깨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우문령은 어
우문령의 풍경“이 득도한 고승이 사부님은 아닐 거예요?” 원경릉이 물었다.이리 나리가 냉담한 얼굴로, “그런 내가 부끄럽냐?”말을 마치고 뒷짐을 지고 갔다.원경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망작’을 전달해 말아?하지만 이리 나리는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우문령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의 성의니까 일단 가지고 가는 걸로 할까.원경릉은 사식이와 만아, 그리고 우리 떡들을 데리고 갔다.원경릉은 입궁해서 자연스럽게 황귀비와 황태후께 인사를 갔다.황태후는 마음이 힘들고 몸이 아파서 아예 일어나지 않으셨는데 원경릉이 아이들을 데리고 입궁한 것은 바로 그런 태후를 위로하기 위해서 였다.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우리 떡들이 침대에 올라가 황태조모에게 달라붙었다.태후는 세 아가를 보고 얼굴에 수심이 비로소 가시며 상궁의 말을 듣고 일어나 아이들과 얘기하며 놀아주었다.황귀비는 지금 봉기궁(鳳起宮)에 있는데 우문령도 여기 같이 있다가 시집을 간다.황귀비는 덕비에서 일약 품계가 올라서 후궁들은 떠들썩하기는 커녕 호시탐탐 약점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요 며칠 각각 예물을 보내며 인사했다.귀비는 억울한 것이 원래 덕비 위인데 지금 덕비에게 눌리게 되어 사람을 시켜 아무거나 팔찌를 한 쌍 보내고 체면이 상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와서 인사하지 않았다.하지만 가장 분한 건 황후로 정말 놀랍고 당황한 것이, 덕비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황귀비의 꿈을 이뤘고, 게다가 내무부 장 태감이 황제에게 불려갔었다고 하니 황후 짐작에 현비가 죽기 전에 장 태감에 대한 얘기를 한 것 같다.그래서 며칠간 황후는 마치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 풀만 움직여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에 땀을 쥐었다.원경릉이 뵙기를 청했으나 황후는 병이라고 핑계를 대자 원경릉은 봉기궁으로 갔다.황귀비가 원경릉을 보더니 손을 잡아 끌며 걱정스럽게, “어서 가서 좀 봐 줘, 며칠 동안 울기만 하고 계속 이렇게 울다 가는 눈이 다 문드
오누이우문령이 풍경을 보더니 일말의 의아함과 깊은 신뢰의 눈망울로, “정말요? 정말? 정말요?”우문령은 3번이나 물어보고 공손하고 두손으로 풍경을 받아 자신의 손바닥에 놓는데 태도가 경건하기 그지 없다.원경릉은 우문령의 공손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 풍경은 그녀에게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 한 줄기 빛인 듯 싶다.원경릉도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사실 인간은 절망 속에서 신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리 나리는 그 점을 알고 우문령에게 풍경을 보낸 것이다.우문령까지 갈 필요도 없이 원경릉 본인조차 자신이 과학을 연구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허망한 부처에게 구원을 바랬던 적이 있다.원경릉은 주지 후배가 생각났다. 주지 후배는 과학의 끝은 신학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건 어쩌면 진리일지도,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아마 후배 본인이 내심으로 바라는 것일 것이다.사람은 신앙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절망의 때엔.정신적으로 무장을 해제 시키다니 이리 나리는 우문령에게 이 점에 있어서는 지고지순의 최고봉이다.우문령은 풍경을 창가에 걸고 창문을 열자 북풍이 불며 풍경에서 ‘딸랑 딸랑’소리가 났다. 동에서 나는 소리는 영원과 맞닿은 듯, 심리적인 작용이 더해 정말 복음이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다.우문령은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보고 여전히 빨갛게 부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한 줄기 감동을 드러냈다.원경릉도 웃는데 눈가가 흐려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궁인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원경릉이 권하는 가운데 우문령은 마침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비록 아직 슬픈 모습이지만, 다행히 다독여졌다.원경릉은 우문령이 죽을 먹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한숨이 나오는 것이 우문령은 위로가 되었지만 우문호는 쉽지 않다.우문령이 죽을 다 먹자 원경릉은 우문령을 재웠다. 너무 피로가 쌓인 데다 풍경 소리가 위로를 주니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원경릉은 우문령 곁을 한동안 지키다가 나왔다.황귀비가 휘장 밖에서 우문령이 잠든 것을 보고 마음에 놓
두 소씨 집안우문호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너무 빨리 그러는 것도 두렵다.원경릉이 봉기궁을 나와 태상황의 건곤전으로 갔다.태상황의 건곤전은 전체 궁중에서 가장 현비의 죽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일 것이다.원경릉은 인사를 드리고, “안풍친왕께서는 안 계신가요?”상선이 웃으며, “그분들은 소씨 집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공주마마의 혼례를 치른 뒤 경성을 떠나실 것입니다.”태상황이 담담하게, “세속을 떠난 사람들이 돈 냄새 풀풀 풍기는 데서 어떻게 살겠어?”원경릉은 그들 부부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며 즐겁기론 신선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안다.잘됐네, 만약 언젠가 원경릉과 우문호가 안풍친왕 부부처럼 매일 오늘 저녁에 뭐 먹을 까만 생각하며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그분들은 이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안풍친왕비와 상현정에서 얘기할 때가 떠올랐다. 만약 전부 안풍친왕비 말 대로 그렇게 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안타깝게도 하필 이렇게 한참 곁가지로 흘러버렸구나.태상황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두 발은 발등상에 올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밖에서 비쳐 드는 햇살을 보며, “꼭 그것만은 아니고, 안왕비 일도 있고, 겸사겸사 돌아와서 보려고.”원경릉은 소씨 집안이라고 해서 현비의 소씨 집안인 줄 알고 놀랐는데 안풍친왕비의 친정이란 게 생각났다.상선이, “모레가 소국후(蘇國侯) 어르신 기일이라 겸사겸사 제사에 참석하실 겁니다.”“그렇군요. 제가 듣기로 전에 소국후께서도 한때 권력의 중심으로 소씨 집안이 지금의 주씨 집안과 같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금은 연달아 조정에서 물러나는 겁니까?”“이것도 소국후 어르신이 살아 계실 때 엄명을 내리신 것으로 소씨 집안 자손들은 반드시 서서히 적어도 3대 내에 조정을 떠나야만 하고, 만약 조정에 출사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면 직책을 요구하나 3대가 지나면 시험을 봐서 공명을 얻어 조정에 출사할 것으로 성취는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하셨지요.” 상선이 말했다.소국후 어르신
주명양의 패악주명양은 기왕비의 코에 삿대질을 하고 막돼먹은 여자처럼 발악을 하며, “왕야를 도울 능력이 있으면서 어떻게 쏙 빠져서 있을 수가 있어? 왕야께서 득세하시면 널 막 대하시기라도 하신데? 팔이 바깥쪽으로 굽었나, 출가외인은 지아비를 따라야 하는 거 알아 몰라?”군주 희열(喜悅)은 올해 12살로 이미 지혜가 다 자란 아이로 주명양이 자기 어마마마를 비난하는 것을 듣고 굳은 표정으로, “후궁, 자중하십시오!”주명양은 이렇게 작은 꼬맹이에게 지적질을 당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가 완전 뚜껑이 열려서 바로 따귀를 때리며 독살스럽게, “닥치지 못해? 어디서 나서?”희열이 얼굴에 따귀를 때리기 전에 기왕비가 주명양의 손목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 주명양의 얼굴에 따귀를 날린 뒤, 순식간에 차갑고 음침한 눈빛으로 내뱉는데, “감히 군주의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렸다 가는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줄 알아!”주명양은 머리가 한쪽으로 나가 떨어졌다가 화를 내며 뒤를 돌았는데 기왕비의 얼음처럼 냉정하고 준엄한 눈빛을 마주하자 주명양의 마음에 한기가 밀어닥치는 기분이었다.주명양이 기왕부에 시집온 뒤로 기왕비는 늘 온유하고 담담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도 마음에 없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당하기 쉬운 사람이란 인상이었다.그런데 기왕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은 우아하고 선한 외피를 쓰고 그 아래 숨어 있는 무시무시한 사자 같은 사람이다.주명양은 교만한 게 습관이 돼서 기왕비는 건드리면 안되는 사람이란 걸 알아도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다시 기왕비의 얼굴에 따귀를 때리며 싸늘하게, “주명양이 네가 괴롭히고 싶으면 괴롭혀도 되는 존재인 줄 알아? 날 때린 거 갚아준 거야.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주명양의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왕비가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오너라, 후궁을 아각(雅閣) 접객실로 데려가라, 일단 이틀간 가둬 두고 내 명령 없이는 물 한방울도 줘서는 안된다.”주명양이 하하 웃으며, “누가
희열군주와 기왕비희열군주가, “어마마마, 알아요,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기왕비는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희열이는 철이 들었네.”희열군주가 작은 소리로, “앞으로 어마마마를 반드시 보호할 거예요, 아무도 괴롭히지 못하게, 아바마마도 안돼요.”희열군주의 부드러운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기왕비가 위로를 받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있으니 어마마마는 아무리 큰 괴로움을 당해도 괜찮아. 너는 가서 쉬렴. 내일 널 데리고 찾아갈 데가 있어.”“어디 가는데요?” 희열군주가 물었다.“초왕부. 네 숙모를 만나게, 어마마마가 부탁할 게 있어서.” 기왕비가 바로 결심한 것 같다.“좋아요, 숙모 만나보고 싶었어요.” 희열군주는 원경릉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어마마마가 병에 걸렸을 때 거의 죽어가는 상황에 숙모가 어마마마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기왕비는, “희열아, 어마마마는 널 데리고 세배하러 가는 게 아니라, 널 숙모에게 맡기러 가는 거야.”희열이 놀란 눈으로, “네?”기왕비가 웃으며 안심시키길,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숙모가 의대를 열 건데 어마마마는 숙모가 너에게 의학을 가르쳐 줬으면 해.”“의학이요?” 희열이 조금 당황해서,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여자아이는 여자로서 지식에 통달하고 바느질을 배우거나 거문고, 바둑, 서화 같은 취미를 익히거나, 어마마마께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배우면 나중에 시집가서 집안을 잘 꾸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기왕비는 진지하게, “아니, 희열아,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신 건 배워야 해. 하지만 여자아이가 갈 길이 오직 혼인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란다. 넌 더 많은 걸 배워야 해. 어마마마는 능력이 부족해서 여지껏 친정에서 자금을 원조받아 겨우 일정한 인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 네 앞길이 평탄하고 행복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게 뭐가 없을까 하고. 그런데 사람이 일생동안 경험할 일을 미리 다 예측할 수는 없어. 오늘의 영화가 내일의 낭
우문호 일행은 강북부로 향하는 내내 북방의 풍경과 풍속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속도는 매우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그날 밤, 우문호는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그러자 원경릉이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오? 악몽을 꾼 것이오?”우문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날씨가 덥지 않은 데다가 북방에 있어 오히려 날씨까지 쌀쌀했기에, 그는 아직도 악몽이 생각나는 듯,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꿈에서 셋째 형님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가고 있었소…”원경릉은 그저 꿈이라 생각하고 위로해 주려 했지만, 이내 우문호의 강한 감응 능력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꿈이 형제간의 영적 감응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우문호도 점점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강북부가 비록 평온해 보여도 사실 북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오.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북막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게다가 셋째 형님도 무모한 사람이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걱정되오. 원 선생, 어서 빨리 가야겠소.”원경릉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내가 먼저 가겠소. 정말 상처를 입었다면, 내가 가야지 도움이 되지 않겠소? 게다가 난 빨리 갈 수 있잖소.”“좋소. 그럼 먼저 가시오. 우리도 곧 출발하겠소.”우문호는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더 이상 천천히 갈 수 없었다.“사람을 불러야겠소.”원경릉은 재빨리 옷을 입은 후, 우문호에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먼저 가겠소.”“조심하시오.”우문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원경릉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원경릉이 사라지자마자 우문호는 방 문을 두드리며, 출발하자고 소리쳤다.우문호의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출발이라니, 무슨 큰 일이 생긴 걸까?이때 수보가 겉옷을 걸치고 나오며, 우문호의 팔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우문호가 답했다.“나도 모르네. 하지만 셋째 형님에게 무슨 일
스무 명이 넘는 자 중 단 한 명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섬멸되었다.안왕은 재빨리 위왕의 혈을 눌러 지혈한 후, 중상을 입은 위왕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의원을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기에, 의원은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안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원의 옷깃을 움켜잡았다.“살리시게, 살려야 하네. 꼭 살아야 하네.”의원이 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진정하십시오.”의원이 위왕의 옷을 가위로 자르자마자, 상처가 바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먼저 지혈한 덕분에 저택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하지만 심각한 부상 상태와, 깊은 복부의 자상 때문에 장기를 다친 것으로 판단한 의원은 간단한 처리를 마친 후, 안왕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에, 치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성에서 다치셨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강북부는 의료가 낙후된 지역이다. 비록 혜민서를 설립한 이후 의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긴 했지만, 경성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안왕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도성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참 문제입니다. 황실 친왕이 자금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택에 있습니까?”“없네!”안왕은 위왕의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갖고 있던 자금단은 이미 먹은 지 오래된 것이네.”“경성… 경성으로…”의식을 잃은 위왕은 그저 경성이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안왕은 눈물을 닦으며 무릎을 꿇었다.“형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의원이 약을 썼으니, 황후가 오실 때까지 며칠만 버티십시오.”심각한 상황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만, 황후는 아마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으로……”위왕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계속해서 경성을 찾았다. 그곳은 그가 너무
위왕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째가 곧 강북부에 오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일은 소문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했으니, 소문이 새어나가게 마련이다.설령 그가 강북부에 온다고 밝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부라는 것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막인들이 다섯째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아무래도 단 한 순간도 북막인의 야심은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내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이들을 감시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이기에, 그는 이 일을 아직 넷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들이 진짜 금나라 상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사이만 영향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장이지만,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마음먹은 자가 부추기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법이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감시 끝에 마침내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처음엔 열댓 명 정도였던 이들 무리는 이틀 사이 스무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새로 온 자들은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강호 인사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무공 또한 약하지 않아 보였다.위왕은 경계심을 품고, 밤새 직접 사람들을 이끌어 조사에 나섰다.앞서 만났던 금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에 순순히 응했지만, 새로 온 강호인들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왕의 질문에도 그저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며 북당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위왕은 건방진 그들의 태도에, 몇 마디 호통을 쳤고, 그 모습에 강호인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위왕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위왕은 조사하기 위해 온 터라, 데리고 온 부하도 단 몇 명 뿐이었기에, 상대가 일반적인 조사에도 이렇게 쉽게 공격하려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앞서 온 금나라인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손을 쓰자, 사태가 수습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