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가 그동안 나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나도 도움이 돼야지. 지은이한테 돈은 부족하지 않은 거 알아. 수호 씨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야.”하정현은 요즘 막 취직하여 이곳에 남아 윤지은을 돌봐 줄 수 없기에, 미력하나마 자기 최선을 다할 생각인 듯했다.나도 더 이상 하정현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결국 카드를 받았다. 나중에 그걸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할 일이다.“지은이한테 절대 말하지 마.”하정현은 또다시 당부했다. 그러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로부터 얼마 뒤, 윤해철과 하정현도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병실에서 나온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결국 하나둘씩 떠나갔다.윤해철도 나에게 당부했다.“수호 군. 수호 군이 그래도 우리 지은이 마음 쓰는 게 보여. 이번 기회에 서로 좀 잘해 봐. 난 두 사람 응원해.”이영미도 따라서 맞장구쳤다.“나도 두 사람 응원해. 내가 볼 때 두 사람 아주 천생연분이야.”“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면, 내 딸은 뭐지?”이게 무슨 상황인지, 애교 누나가 아버지인 이태웅과 함께 나타났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윤해철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자네 딸과 수호 군의 결혼 반대한 거 아니었어? 자네는 수호 군을 싫어하겠지만, 난 좋아해.”이태웅은 냉담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 강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순식간에 찬 숨을 들이켰다.하지만 이건 가장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나는 내가 윤지은한테 마음이 흔들린 게 애교 누나한테 미안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수호 씨, 우리 저쪽에서 얘기 좀 할래요?”나와 애교 누나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애교 누나, 제 말 좀 들어봐요...”나는 애교 누나에게 설명하고 싶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웃으
이건 꼭 무슨 성공한 여자의 발언 같았다.애교 누나는 항상 연약하고 다정한 이웃집 누나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바뀌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나는 누나의 이런 변화에 매우 기뻤다.“누나 주변에 빛이 한 층 생긴 것 같아요. 더 멋있고 매력 있어졌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또 하나의 빛나는 점을 발견했다.누나는 내 말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었다.“말은 참 잘한다니까요. 또 나 기쁘라고 하는 말이죠?”“아니요. 진심이에요.”나는 복도 쪽을 흘겨봤다. 그곳에서 이태웅은 아직도 윤해철과 말다툼하고 있었다.그 모습에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동안 저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윤 회장님한테 와서 저를 빼앗아요?”“그게 어디 수호 씨를 빼앗는 거예요? 우리 아빠 원래 아저씨랑 말싸움하는 거 좋아해요.”‘어쩐지.’난 또 애교 누나뿐만 아니라 이태웅도 변한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기상천외한 생각이었다.하지만 성공한 두 어르신이 말다툼하는 걸 보는 게 꽤 재밌었다.욕설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상대를 할 말 없게 만들고 있었으니까.역시 배운 사람들은 말다툼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애교 누나, 누나는 언제 집에 돌아가요?”두 사람이 언제까지 싸울지 몰라 나는 조심히 애교 누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요즘 부모님 설득 중이라 아마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왜 내가 집에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나는 애교 누나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누나가 보고 싶고 안고 싶어서 그래요.”“그럼 지금 안아요. 안 갈게요.”“정말요? 그럼 진짜 안아요?”나는 정말 단지 누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그때 나에게 장난치려던 애교 누나는 내가 정말 저를 안으려 하자 깜짝 놀라며 뒤로 피했다.“안 돼요. 아빠한테 들키면 끝장나요.”“누나가 지금 안아도 된다고 했잖아요.”“장난친 건데 수호 씨 진짜 대담하
나는 내 대답에 매우 흡족했다. 두 사람의 장점과 특징을 각자 잘 얘기했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이태웅과 윤해철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수호 군,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지, 다항선택을 하라고 한 건 아닌데.”이태웅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한 명을 선택하라고 하면 한 명을 선택해야지.”“선택을 왜 해요? 전 안 해요. 두 사람 모두 좋아요.”‘성인이면 왜 선택을 하지? 둘 다 좋은데, 난 다 갖고 싶어.’물론 이 말까지 내뱉을 순 없었기에 나는 속으로 삼켰다.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도망쳤다. 이런 위험한 곳에 나는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다는 두 사람이 또 나를 부를까 봐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윤지은의 부모님도 왔으니 내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그대로 병원을 떠났다.그 길로 나는 천수당으로 향했다.민우는 나를 보자 아침에 왜 안 왔냐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두 사람을 걱정하게 하기 싫어 나는 경찰서에 잡혔던 일은 함구했다.이제 막 물 한 모금 마셨을 때 고수연이 찾아왔다.“사장님, 연재혁 변호사님 말로는 모레가 재판일이래요. 그런데 너무 걱정되는데 어떡하죠?”“마음 편하게 먹어요. 연재혁 변호사님 대단한 분이에요. 그분을 믿어야 해요.”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겨우 위로밖에 없었다.그때 고수연이 갑자기 내 옆에 털썩 앉았다.“만약 재판에서 지면 어떡하죠? 다른 건 다 빼앗겨도 상관없는데, 아이들은 절대 안 돼요. 아이들은 내 정신적 지주예요.”“지금 일자리도 있잖아요. 법원에서 아이를 그놈한테 두 아이를 주지 않을 거예요.”“그런데 난 한 명도 주고 싶지 않아요. 진용진은 책임감 없는 쓰레기예요. 아이들이 그런 인간을 따라가면 인생 망쳐요.”사실 나는 고수연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혼자 지내는 것도 여유롭지 못한데, 아이들의 양육권을 모두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하다니. 굳이 그렇게 자신을 혹사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예전에 우리 마을에 있던 한 여자가
고수연이 나간 뒤 나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더니 서윤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꺼버렸다. 하지만 서윤기는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결국 참다못한 나는 서윤기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러자 서윤기는 이번에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정수호, 아주 대단하던데. 언제 또 필사본을 만들었더라. 내 손에 있는 책은 필요 없어 보이니 망가뜨릴게.]그 아래에 영상 하나도 도착했다.서윤기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의서를 화로에 넣었고, 불길은 순식간에 의서를 집어삼키며 활활 타올랐다.비록 내 손에 필사본이 있다지만 할아버지의 심혈이 이대로 망가지니 마음이 안 좋았다.나는 그 아래에 바로 답장했다.[그런다고 당신한테 뭐가 도움이 돼?]서윤기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아무 도움도 안 돼. 하지만 네 기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잖아.]‘진짜 미친놈이네.’나는 결국 서윤기의 카톡까지 지워버렸다.그날 오후, 나는 화인당에 들러 정 사장님한테 서윤기와 있었던 일을 말했다.정 사장님도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서윤기가 지금 이규진과 전광진과 손을 잡고 가짜 약재를 강북 시장에 유통하고 있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약방에 가짜 약재가 흘러들었는지 몰라.”“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아요?”이게 바로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하지만 정 사장님은 고개를 저었다.“서윤기의 구매 루트가 기밀이라 증거가 없거든. 경찰들도 사건 접수 안 해줄 거야.”“그럼 어떡해요? 그냥 이렇게 내버려둬요? 아니면 가짜 약재를 얻어다가 검사 맡겨 볼까요?”나는 다시 건의했다.그러자 정 사장님이 고개를 저었다.“그 약재들이 진짜 가짜 약재인 건 아니야. 그저 날짜가 지난 약재를 특수처리하거나 약효가 그리 뛰어나지 않는 약재들이야.”“아무리 특수 기관에 의뢰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래서 가짜 약재를 만드는 사람들이 교활하다고 하는 거고.”나는 순간 무기력해졌다. 분명 상대가 가짜 약을 만
민우는 우리 셋 중에서 인내심이 가장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게, 민우는 가장 돈에 쪼들렸기에 가게가 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들어가.”나는 민우를 강제로 밀며 약재 정리를 시켰다.건너편 약방은 여전히 가격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고객 유입도 점점 많아졌다.나도 정 사장님처럼 여유로운 자세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사실 나도 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서윤기는 나를 괴롭히는 게 목적일 테니, 이렇게 쉽게 맞은편 가게의 가격 전쟁을 끝내지 않을 거다.만약 이대로 간다면 우리 가게는 버티지 못한다.때문에 무조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가게로 돌아온 나는 현성을 내 사무실로 끌어들였다.“잠깐 와 봐. 너랑 할 얘기 있어.”“뭔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얘기해? 민우는 왜 안 부르고?”“민우는 성격이 불같아서 말하면 못 참을 것 같아. 그리고 이 일이 조금 위험한 거라 우리 셋이 한꺼번에 무슨 일을 당하면 안 돼. 한 명은 가게에 남아야지.”현성은 내가 큰일을 벌일 거라는 걸 눈치채고 곧장 물었다.“무슨 계획 있어?”“맞은편 가게 뒤에 누군가가 있어. 우리 가게를 일부러 우리를 겨냥하는 거야.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 없어.”“혹시 상대가 가짜 약 쓴다는 거 까발리려고?”현성이 잔뜩 흥분해서 물었다.이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번거로워. 나는 간단하지만 거친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야.”현성은 더 흥분했다.“무슨 방법인데? 얼른 말해 봐.”나는 현성의 귓가에 대고 내 계획을 말했다. 그러자 현성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정말 이렇게 일 크게 벌이려고?”“일 크게 벌이지 않고 그 사람들 어떻게 혼내?”사람이 독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이 바닥에서 지내려면 그만큼 수단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현성은 조금 걱정하는 듯 말했다.“그러다가 잡히면 형벌 받아.”“무서워?”나는 현성을 보며 물었다.현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현성은 조금 무
밤 10시까지 기다리니 맞은편 가게도 손님이 점점 적어졌다.한약관 사장은 너무 좋아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그 사장의 차가 떠난 뒤 나와 현성은 바로 따라붙어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 그의 집 문 앞까지 따라갔다.나이도 먹은 양반이 아내는 젊고 예뻤다. 심지어 몸매도 좋고 피부도 뽀얀 데다 아주 요염하고 섹시했다.“헐. 늙은 영감이 저렇게 젊은 아내를 얻었다니.”현성은 부러운 얼굴로 말했다.다만 나는 그 여자가 남자의 아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정부면 모를까.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준비됐어?”내가 현성에게 물었다.현성은 갑자기 불안한지 가슴을 세게 내려쳤다.“처음 이런 일을 하려니까 무서워. 어떡해?”“마음 다잡아. 이와 온 김에 반드시 성공해야지.”현성은 다급히 가슴을 내리치며 마음을 진정했다.“그럼 나 간다.”현성은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남자의 집 문 앞에 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안에서 늙다리 사장의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배달이요.”영감은 문 앞에 다가와 경계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배달시킨 적 없는데, 잘못 온 거 아니에요?”“서윤기 씨가 보냈습니다.”나는 진작할 말을 생각해 두었다.영감은 서윤기라는 이름을 듣자 얼른 문을 열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서 사장님이 보낸 분이셨군요. 얼른 들어와요.”나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영감은 나에게 예의를 지키며 뜨거운 차까지 따라주었다.그사이 붉은 옷을 입은 여자는 침실 문에 기대선 채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두 사람의 좋은 분위기를 깨뜨렸다고 원망하듯이.그러자 영감은 얼른 달려가 여자더러 침실 안에서 기다리게 한 뒤 거실로 다시 돌아왔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서 사장님께서 배달을 다 보내시고. 너무 고생하시네요.”영감은 말하면서 주위를 살폈다.“배달한 물건은 어디 있죠?”나는 다리를 꼰 채 앉아 차갑게 웃었다.“제가 서 사장님 사람인 건 맞지만, 물건 배달하러 온 건 아닙니다.”영감의
나는 손가락 5개를 폈다.“5백만 원.”이런 일은 조금씩 불려야지 처음부터 크게 부르면 상대가 놀랄 수 있다.5백만 원쯤은 이 영감이 요즘 번 수익에 비하면 아마 새 발의 피일 거다.결국 영감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 받아.”그러면서 핸드폰으로 나한테 계좌 이체를 해주려 했다.“계좌 이체는 됐고, 난 현금만 받아.”이건 나중에 꼬투리 잡힐 일 만들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다.영감은 이맛살을 구겼다.“여기 현금이 어디 있다고? 요즘은 다 카드 아니면 카카오페이를 사용하지...”“당신네 아파트 단지에 ATM 기계가 있던데. 24시간 오픈이라 그곳에서 현금 인출하면 되잖아. 여기서 기다릴게.”영감은 나를 째려보더니 결국 밖으로 나갔다.현성은 문소리가 나자마자 얼른 복도에 숨었다. 그사이 나는 조용히 집에서 기다렸다.그때 그 요염한 여자가 또 나타나더니 허리를 씰룩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오빠, 물 마실래요?”여자는 말하면서 내 옆에 앉았다. 그 순간 여자의 몸에서 나는 자극적인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냄새가 너무 독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하지만 여자는 자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를 꼬시려 들었다.아마도 그 영감이 평소 만족시켜 주지 못해 나를 노리는 모양이었다.나는 차가운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며 톡 쏘아붙였다.“싸게 굴긴.”여자는 순식간에 얼굴색이 변하더니 버럭 소리쳤다.“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싸 보인다고?”“아닌가? 속살 다 보이게 옷 입고 향수도 이렇게 독한 걸 쓴 게 꼬시려는 거 아니야? 당신 내 누에 안 차.”나는 여자를 단번에 밀쳤다.그 말에 열 받았는지 여자의 가슴은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여자가 볼 때 나는 단지 서윤기 아래에서 일하는 똘마니였기에, 자기가 손가락만 까딱이면 내가 걸려들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여자는 비록 사장 영감의 돈이 탐나지만, 남자로 볼 때 나처럼 젊고 힘 있는 남자가 더 취향이었다. 어쨌든 젊은 그녀를 늙은 영감이 만족시켜 줄 리 만무했으니까. 하지만 여자는
이게 바로 내 계획이다.오늘 조금 받아내고, 내일 조금 받아내면 결국 이 영감도 감당하지 못할 거다. 그러다가 서윤기와의 사이가 틀어지고 서윤기의 평판도 따라서 더러워질 거고.그럼 나는 그 사이에서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셈이다.사실 돈은 내 목적이 아니다. 때문에 일전한 푼 손댈 생각도 없다.다만 어릴 때부터 이런 짓을 해본 적 없는 나인지라, 오늘은 내 한계를 시험한 셈이었다.시간을 확인했더니 때가 이미 늦어 나는 현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민우는 그동안 자지 않고 우리를 기다렸다.“두 사람 뭐 하러 갔어? 왜 이제 와?”나는 현성과 눈빛을 교환한 뒤 약속이라도 한 듯 거짓말했다.“가게 내 약재를 정리했어.”현성의 거짓말에 민우가 뚫어져라 우리를 바라봤다.“진짜야? 그런데 왜 나는 안 불렀어? 너희 둘 설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가게 직원한테 들었는데 두 사람이 점심에 사무실에서 뭔 얘기했다며?”나는 손을 뻗어 민우의 어깨를 두드렸다.“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늦었는데 얼른 자.”나와 현성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누웠다.민우는 여전히 우리를 의심했지만 딱히 증거가 없으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날, 나는 현성을 일찍 깨워 두 번째 계획을 실시했다.민우는 깨어나자마자 현성이 보이지 않자 나에게 물었다.“현성은?”“몰라. 아침부터 안 보였어.”나는 거짓말했다.현성은 혼자 중얼거렸다.“이 자식 설마 또 선영이 보러 간 건 아니겠지?”현성이 꼭두새벽부터 큰일을 도모하러 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나는 현성이더러 맞은편 한약관이 문을 열기 전에 문 앞에 ‘가짜 약’, ‘사기’, ‘사기꾼’ 등과 같은 글을 붙여 놓으라고 했다.그 한약관의 평판을 무너뜨리려면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인 걸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그리고 그중에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나와 민우가 천수당에 도착했을 때, 맞은편 가게 문 앞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만 그중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