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한테 목걸이 주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한다지만 형수 친구한테 주는 건 또 뭐예요?”나는 귀찮아서 대충 설명했다.“그냥 주고 싶어 주는 것도 안 돼요? 뭘 그렇게 많이 참견해요? 이건 그쪽과 상관없는 거잖아요.”내가 화를 내자 지은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고 선물 두 개를 나한테 건넸다.“됐어요, 안 물어볼게요. 나 바래다주는 것 정도는 괜찮죠? 나 짐 이렇게 많은데 택시 타라고 하는 건 아니죠?”난 가끔 내 성격이 너무 마음에 안 든다. 마음 약하고 귀가 얇은 거.지은이 나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애원하는 눈빛 한번 보내왔다고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내가 착해서 도와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쪽이 죽든 말든 상관 안 했을 거예요.”나는 말하면서 지은의 짐을 들어주었다.‘정말 돈 많네. 몇백만 원짜리 물건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구매하다니.’돌아가는 길에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가 내가 동네에 차를 세우자 갑자기 물었다.“수호 씨도 여기 살아요?”나는 그제야 지은이 아직 우리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모른다는 걸 인식했다.이에 곧바로 설명했다.“형과 형수가 이 주변에 사는데 잠깐 얹혀살아요.”“그런데 내가 여기 사는 줄은 어떻게 알아요?”지은은 여전히 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바라봤다. 하지만 나도 지은의 질문을 진작 생각해 둔 적이 있기에 침착하게 대답했다.“출근할 때 한 번 봤어요.”“아.”나는 주차하고 나서 지은의 짐을 차에서 하나하나 내렸다.그때 짐을 보던 지은이 머리 아픈 듯 말했다.“물건이 너무 많아요. 혼자 들고 갈 수 없으니 좀 도와줘요.”“그래요. 한번 도와주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도와줘야죠. 오늘이 지나면 보지 못할 테니까.”지은을 도와 크고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으니 왠지 내가 지은의 부하직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하지만 아까 실수한 경험이 있던 지라 앞에서 걷지 않고 지은이 길을 안내하게 했다.우리는 곧바로 지은의 집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지은이 문을 열며
“네?”‘내가 남기고 간 물건이라고? 뭐지? 왜 기억이 없지?’나는 갑자기 너무 불안했다.그때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은이 방에서 양말 한 짝을 가져왔다.그 양말은 내 것이 틀림없었다. “이 양말 알아요?”지은의 질문에 나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이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렇게 평범한 건 널리고 널렸어요. 게다가 지금 사람들은 자기 옷을 자기 집에 걸어두는데 누가 어떤 걸 신었는지 어떻게 알아요?”“하긴, 내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어요.”지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정말 여기에 있기 싫었다. 계속 있으면 언젠가 들통날 것만 같으니까.“저기, 혹시 다른 일 있어요? 없으면 난 이만 가볼게요.”나는 변명을 대며 곧바로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지은이 갑자기 말했다.“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입을 탁 쳤다.‘왜 그런 말을 해서는.’“왜요? 싫어요?”“솔직히 말하면 마음속으로는 싫어요,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니까 말한 대로 하다는 심정으로 하는 거예요. 말해요, 뭘 도와줄까요?”지은은 커다란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나 오늘 침구 세트를 샀잖아요. 그걸 펴줘요.”지은이 침구 세트를 산 건 나도 안다, 그것도 32만 원 넘는, 가격도 어마어마한 거로.하지만 지은은 이런 가격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돈 많은 사람은 역시 달라. 생활할 줄 아네.’그에 반하면 나는 생활하기 바빠 매일 뛰어다녀야 한다.나는 쇼핑백 네 개를 들고 지은이 가리키는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여기예요?”“맞아요. 바로 그 방이에요.”나는 침실에 도착해 낡은 침구 세트를 모두 새것으로 갈아주었다.새로 산 침구 세트는 너무 예뻤다. 따뜻한 분위기에 편안해 보이는 재질, 한눈에 봐도 즐거웠다.‘여기서 자면 어떤 느낌일지.’그때 지은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느껴보고 싶지 않아요? 하고 싶으면 누워 봐요.”“아니에요.”절대 그렇게 할 수 없지.만약 더럽히기라도 하거나 냄새라도 묻히면
나는 조금 화가 났다.“웃음이 나와요?”“이 봐요, 너무 심각한 거 아니에요? 하고 싶다는 건 생리적 욕구 때문이지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지은이 웃으며 하는 설명을 듣자 나는 순간 난처해졌다.“네?”‘내가 오해한 거였네.’사실 지은은 남주 누나와 같은 생각이다. 그저 본능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고 싶은 거다.남자든 여자든 그런 쪽으로 욕구가 있는 건 정상이다.욕구가 있으면 해결하고 풀고 하는 것도 당연한 거고.나는 너무 난처해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그런데 평소에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사람 난감하게.”“흥, 그러게 누가 출근하는 그날 나를 희롱하래요? 첫 이미지가 나쁘게 박혀 버리니까 일부러 안 좋게 대한 거죠, 그런데 오후 내내 지내보니까 사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몸매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고, 같이 하면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어때요? 한번 해볼래요?”지은은 말하면서 나한테 추파를 던졌다.솔직히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 당장이라도 지은을 자빠뜨리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 했다.내 신분이 노출되거나, 여자가 나한테 들러붙을 까 봐.이 여자와 더 이상 어울리지 않기로 했으면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게 좋은 선택이다.그러지 않으면 관계를 끊기 어려우니까.이에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됐어요. 난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두 다리는 바닥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지은은 내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다가왔다.그러고는 손을 내 가슴에 얹더니 천천히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간질거리는 숨결이 자꾸만 얼굴에 닿아 나는 너무 괴로웠다.‘참 요물이 따로 없네. 어쩜 작고, 차갑고, 청순하고, 여성스러운 걸 완벽하게 다 갖고 있지?’특히 지은의 손이 너무 예뻤다.나는 저도 모르게 지은과 몸을 섞는 장면이 생각나면서 아래가 뻐근해졌다.지은도 그걸 느겼는지 일부러 부드러운 몸을 나한테 딱 붙였다.“이거 봐요, 하고
“더 짜릿한 걸 볼래요?”지은이 내 몸 위에 엎드려 묻자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온통 자극과 흥분이라 다른 건 상관할 수 없었다.“잠깐만요.”지은은 마치 고양이처럼 내 위에 엎드렸다.그걸 보니 나는 점점 흥분됐다.‘이거 설마 나를 도와...’‘그렇다면 제대로 즐겨야겠는데?’하지만 지은은 아예 침대에서 내리더니 자기 노트북을 켰다.‘뭐 하는 거지?’나는 한참 어리둥절해 있다가 바로 지은의 의도를 알았다.‘아하 야동을 틀려는 거였구나.’그걸 보는 동안 너무 괴로워 지은이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물어볼까?’지은이 계속 움직이지 않는 걸 본 나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지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우리 그만 봤으면 이제 시작해요.”“혹시 내가 너무 밝히는 것 같아요?”갑자기 이렇게 묻는 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괜찮은데.”“정말이에요?”“당연하죠.”“내한테 그렇게 괴롭힘당하고도 내가 좋아 보여요?”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물론 가끔 얄미울 대도 있었지만 사실 착한 사람이잖아요. 느낄 수 있어요. 넘 상처받아서 이렇게 됐다는 게. 하지만 예전에는 분명 착했을 거잖아요.”나는 쓸데없는 말 대신 속심 말을 내뱉었다.지은의 생김새만 봐도 얄미운 사람이 아닌 걸 안다.그때 지은이 갑자기 내 다리 위에 앉더니 손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가슴을 내 얼굴 쪽으로 기댔다.이에 나도 자연스럽게 지은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 했다.그런데 지은이 갑자기 물었다.“나랑 사귈래요?”“네?”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얼어붙었다.나는 다급히 지은을 밀어내고 당황해하며 말했다.“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해 둔 여자 친구는 애교 누나다. 때문에 지은이 이런 말을 하니 나는 본능적으로 또 함정이라고 생각해 본능적으로 지은을 밀어냈다.하지만 내 행동이 지은을 화 나게 하고 실망하게 했다.“그러니까 나랑 자는 건 괜찮은데 남자 친구는 싫
나는 전혀 여지를 남기지 않고 쏘아붙였다.“그쪽은 너무 이랬다저랬다 해요. 부드럽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본인 스스로 계속 기가 세지 않다고 하는데 매번 사람 기를 죽이잖아요. 그런 성격은 그 어떤 남자도 감당하기 어려울 거예요.”“그만 해요!”우리는 점점 더 격하게 다퉜다.그와 동시에 동영상 속 두 사람도 점점 더 격해졌다.난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미는 동시에 영상 속 신음에 자극 받아 그곳이 너무 괴로웠다.심지어 당장이라도 풀고 싶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절대 눈앞의 이 여자는 아니다.이 여자랑은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라 그냥 자리를 뜨고 싶었다.나는 애교 누나를 찾아 갈수도 있고 남주 누나를 찾아 갈수도 있다.누가됐든 눈앞의 이 여자보다는 나을 것이다.“그래요, 아무 말 안 할 테니 혼자 알아서 해요.”나는 내 물건을 챙겨 들고 지은을 밀쳐내고는 밖으로 나왔다.“야, 이 개자식아!”지은은 완전 이성을 잃어 나한테로 달려들더니 내 옷을 찢기 시작했다.내 피부는 지은의 뾰족한 손톱에 몇 곳이 긁혔다.그 순간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난 지은을 둘러메고 그대로 침대에 메치고 곧장 지은의 치마를 찢어버렸다.지은은 계속해서 발버둥 쳤고 나는 계속해서 찢었다.마치 말로 이 여자를 이길 수 없으면 몸으로 정복하고 싶다는 듯 말이다.솔직히 나도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하지만 우리는 결국 잠자리를 가졌다.난 지은을 정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센 척해도 힘 앞에서 계속 센 척할 수 있나 보자고.’그러다가 지은이 내 아래서 연신 신음을 내며 헐떡이는 모습을 보자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나는 더 힘을 냈다.모든 게 끝난 뒤 우리는 침대에 누워 헐떡이기 바빴다.동영상도 어느새 끝났는지 방안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그리고 나는 점차 이성을 되찾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가장 중요한 건 이 여자가 나를 알아볼까 봐 걱정되는 것이었다.이럴 때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법무 사무소에는 왜요?”“당연히 명의 이전하러 왔지.”“왕정민이 집 명의를 애교 누나 이름으로 해준대요?”“말이 돼? 왕정민 그 개자식은 어떤 보상도 하지 않으려고 해, 그리고 우리랑 끝가지 싸울 거라고 하던데. 우리 남편한테 얘기해서 집 명의를 애교 밑으로 해줄 수 있나 보려고.”‘그런 거였구나!’“그럼 누나 남편은 뭐라고 해요? 누나 방법이 먹히긴 한 거예요?”나한테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난 애교 누나가 사랑과 재산 모두를 잃는 걸 원치 않는다.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재산이라도 되찾아야지.절대 밑지는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그래서 지금 사람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됐어, 일단 끊어, 애교 지금 나왔으니까 이따가 얘기할게.”“아, 알겠어요, 그럼 일 보세요.”전화를 끊은 나는 애교 누나랑 남주 누나가 없으니 일단 형수님 집으로 향했다.그런데 형이랑 형수 모두 집에 없었다.그제야 난 형이랑 병원에 검사받으러 간다고 했던 형수님의 말이 떠올랐다.난 형이랑 형수가 예전처럼 사이가 좋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그러면 난 더 이상 마음의 짐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까.하도 심심해서 일단 샤워를 하고 한잠 자려고 했다.어제 밤 일때문에 다들 휴식을 못 했다.게다가 오늘 하루도 바삐 보냈으니 나도 피곤하긴 했다.샤워를 하고나서 나는 알몸으로 욕실에서 나왔다.어차피 집엔 사람도 없었고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니.샤워하고 나서 알몸으로 자는 것이 가장 편하다.나는 어릴 적부터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방으로 돌아온 후 이불을 덮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장 꿈나라로 향했다.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형이랑 형수가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그래서 또 얼마간 잠이 들어있었다.그리고 잠시 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수호 씨, 수호 씨...”형수였다.너무 졸렸지만 갑자기 내가 지금 알몸이라는 생각이 떠
“사실 지금 한약방 명성이 한의원보다 더 커요. 우리 과 마 교수님이 한약방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일단 거기 한번 가보려고요.”“수호 씨를 면접 봤던 그 영감 말하는 거에요?”“맞아요.”“그 영감은 수호 씨한테 잘해주나 봐요.”“흠, 잘해주긴 하죠. 근데 좀 아쉬워요.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 교수님한테 잘해 드리지 못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미안해요. 인턴 주제에 과 교수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굴고, 그래도 저를 자른다고 안 했어요. 그리고 저한테 공적인 일로 복수하거나 하지도 않았고요. 제가 너무 어려서 뭘 몰랐던 거죠.”형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성장했다는 거예요. 나중에 기회 되면 꼭 고맙다고 인사 전해요.”“얼른 일어나요, 이따가 나가서 밥 먹어요.”형수는 기분 좋아 보였다.“형수, 오늘 우리 형이랑 검사받으러 간 건 어떻게 됐어요?”형수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저랑 수호 씨 형 모두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 없대요.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오후에 정신의학과 전문의를 보고 왔는데 형이 지금은 초기라고 하네요. 더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대요.”형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의외로 엄청 기뻤다.형이랑 형수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얼른 조카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었다.“그럼 너무 축하해요!”난 진심으로 축하해줬다.형수님은 웃으면서 말했다.“나도 축하할 일인 것 같아서 아까 형이랑 얘기했어요. 오늘 저녁은 외식하자고요.”“좋죠. 근데 저기... 형수, 먼저 나가 줄래요? 저 옷 좀 입어야 해서.”“알겠어요. 그럼 빨리 준비해요.”형수는 웃으면서 방문을 나갔다.나도 기분이 찢어질 듯 좋았다.얼른 옷을 입고 방문을 나섰더니 형도 기분이 좋은지 슈트까지 챙겨 입고 나왔다. 엄청 멋있었다.“형, 멋있는데!”난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줬다.형은 확실히 멋있었다.내 말에 형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이건 내가 금방 회사 차렸을 때 네
‘무슨 비밀인데, 형수는 모르시고 나는 무조건 알아야 되는 거지? 너무 수상한데?’난 형이 계속 말을 이어 가기를 기다렸다. 그때 마침 형수가 걸어왔다.“준비 다 됐지? 준비됐으면 출발해.”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준비됐어. 자기가 애교 씨한테 전화 한 통 넣어 어디 있는지 물어봐.”난 순간 형이 너무 존경스러웠다. 연기를 어찌나 잘하는지 연기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방금까지만 해도 나한테 말할 비밀이 있다고 해놓고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형수랑 웃으면서 얘기를 하다니.난 형이 예전 우리 형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예전보다 유해지고 말을 잘하는 것도 같았다.‘생각해 보면 한 회사의 수장이 너무 순박해서도 안 될 일이잖아?’‘형이 형수랑 잘 살려고 마음먹었고, 워낙 인품도 좋으니 그걸로 됐지 뭐.’형수는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지금 애교한테 전화해 보려고. 어디 있는지 물어볼게.”“애교야, 너희 지금 어디 있어? 법무사 사무소라고? 일은 잘 마무리됐어? 아직이라고? 너무 조급해 말고 천천히 해결해.”“난 우리 남편이랑 서래 호텔에서 방을 잡아놨거든. 이따가 남주랑 같이 와. 그래, 그럼 이따가 만나서 얘기해.” 우리는 곧장 집을 나섰다. 형은 형수더러 운전하라고 하고 나랑 함께 뒤에 앉았다.차에 오른 뒤 형은 아까 못 다한 얘기를 계속하려는 듯했다.“수호야,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나?”난 고개를 있는 힘껏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데.’난 너무도 궁금했다.“형한테 형수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니, 대체 뭐지?”형은 지갑에서 피검사 결과를 나한테 건네주면서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결과지에는 정자 활약도가 너무 낮아 난임이 의심된다고 쓰여있었다.난 두 눈을 번쩍 뜨고서 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형수가 모두 정상이라고 하지 않았어?”형은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어 핸드폰을 꺼내 나한테 카톡을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