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른 조수석으로 가 진동성을 차에서 끌어내렸다. 차는 순간 평형을 잃고 도로 위로 떨어졌다.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나는 차 상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진동성 앞으로 다가갔다.진동성은 한쪽 팔과 다리를 찔린 데다 한쪽 팔은 쓰지 못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신세가 되었다.나는 칼을 들어 진동성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자 진동성은 겁에 질려 엉엉 울면서 윤지은과 윤미화에게 애원했다.다만 두 사람은 모두 진동성을 무시했다.“정수호. 진동성을 죽일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가 있어. 그런데 방금처럼 하는 건 아니지.”윤지은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늘 고고하고 깨끗하던 그녀는 이 순간 얼굴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다.윤지은의 그런 모습을 보니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런 위험한 순간 윤지은은 재벌가 아가씨라는 신분도 생각하지 않고 몸을 던져 나가 같이 평범한 사람을 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잘못을 인정했다.“그러면 안 되는데,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또 다음도 있어? 아까 심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윤미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그 모습을 보니 나는 더 미안해졌다.방금 두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형수처럼 병원에 누워있었을 거다.나는 너무 무모했다.때문에 두 사람이 뭐라고 하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했다.“경찰에 신고해서 저 인간은 경찰한테 맡겨.”“안 돼요. 경찰에 맡기는 건 너무 가벼워요.”“그럼 어떻게 하려고?”윤지은이 물었다.나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진동성을 흘긋 보고는 그의 손등을 발로 밟았다.“말해. 왕정민이 어디 있어?”“정말 몰라. 나중에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어.”“좋아. 그럼 두 번째 질문. 우리 할아버지가 준 의서는 누구한테 팔았어?”진동성은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봤다.“내가 그걸 말하면 풀어줄 거야?”“풀어 달라고? 꿈 깨!”“날 풀어주지도 않는데 내가 왜 말해야 해?”진동성은 배 째
“너 가은 쓰레기를 계속 강북에 있게 하면 또 형수한테 무슨 짓 할지 모르잖아.”진동성은 나에게 기어와 싹싹 빌며 애원했다.“수호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이렇게 빌 테니 봐줘. 우리 같은 동네 출신이잖아. 내가 예전에 너 도와줬던 걸 생각해서 한 번만 봐줘.”나는 또 진동성을 걷어찼다.그 사이 윤지은은 어디론가 전화했고 얼마 뒤 양동준이 모습을 드러냈다.“아가씨.”“이 인간 강북에 다시는 못 오게 처리해.”윤지은은 차갑게 명령했다.“네.”양동준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진동성을 향해 걸어갔다.그러자 진동성은 버림받은 개처럼 두 손 두 발을 사용해 앞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양동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진동성이 양동준에게 끌려가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와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수호 씨, 괜찮아?”윤미화는 나를 걱정하는 듯 물었다.“괜찮아요. 조금만 휴식하면 돼요.”나는 이제야 내 사지의 힘이 모두 빠져 흐물흐물해졌다는 걸 발견했다.이런 일은 처음 겪는지라 반응이 세게 온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체력을 회복하려고 한참을 휴식했다.휴식을 마친 뒤 나는 바닥에서 기어 일어났다.“이제 괜찮아요. 가요.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윤지은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처리할 건데?”사실 나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마저 두 사람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윤지은이 말했다.“앞으로 이런 미친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뒤처리는 내가 해줄게.”“이런 일은 절대 안 해요. 아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아까의 상황을 돌이켜 보니 나는 겁이 났다.윤지은은 내가 반박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나를 욕하지 않았다. 그저 동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전화에서 윤지은은 이곳에 교통사고가 났으니 대신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하지만 이 일은 사고가 아니라 내가
윤지은은 두말없이 가방에서 립스틱 하나를 꺼냈다.그걸 본 여경은 이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아르마니 한정판이잖아? 나 오래전부터 예약했는데 아직도 못 샀는데. 역시 우리 윤지은 아가씨가 나서야 한다니까. 나 그냥 주는 거야?”“그 컬러는 나한테 많아. 너한테 하나 주는 게 뭐라고.”“헐. 누가 부자 아니랄까 봐. 말로 사람 기죽이네. 그런데 대체 누가 우리 윤지은을 움직였는지 궁금한데?”여경은 말하면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 순간 나는 얼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나는 윤지은의 말을 명심하고 있기에 절대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여경은 내가 이상하게 행동하자 곧바로 나를 가리키며 윤지은에게 물었다.“설마 저 남자야? 오 마이 갓! 윤지은, 너 연애해? 심지어 남자 때문에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여경은 놀란 듯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윤지은의 얼굴은 단번에 싸늘하게 굳어버렸다.“립스틱 갖기 싫어? 싫으면 돌려주든가.”말을 마치자마자 윤지은은 립스틱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여경은 단번에 몸을 비틀었다.“줬다 뺐는 게 어디 있어? 이미 줬으면 내 거야.”그러면서 또 나를 한번 흘긋거렸다.몰래 훔쳐보던 나는 여경이 나를 보자 또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그 모습을 본 윤지은이 낯빛이 어두워진 채 말했다.“정수호, 뭘 그렇게 피해?”‘왜 또 나한테 뭐라는 거야?’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보는 것도 안 돼, 안 보는 것도 안 돼. 그럼 말해봐요. 어떻게 할까요?”나는 이번에 살가운 태도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으니까.하지만 윤지은은 또 화를 냈다.“어떡하긴. 내가 뭐 협박이라도 했어? 다 큰 성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나는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알았어요. 갈게요. 내가 있으면 지은 씨 화만 날 테니까.”나는 말을 마친 뒤 바로 뒤돌아섰다. 나는 더 이상 윤지은과 다투기 싫었다. 생각해 보니 윤지은은 가끔 아이처럼 너
“무서운 것도 신경 쓰인다는 뜻이거든요. 아니에요?”강한나는 나에게 되물었다.그 말을 들어보니 왠지 일리가 있는 듯해 나도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그때 동료가 조사를 마치고 상황을 보고하자 강한나는 일하러 가버렸다.약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내 차는 견인차에 끌려갔고 나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윤지은이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빨리 끝나지 못했을 거다. 심지어 일이 해결된 후에도 윤지은이 나와 윤미화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내가 윤지은더러 형수 동생네 집에 바래다 달라고 하자 윤지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봤다.“언제부터 거기서 지냈어?”“네?”“세 맡은 집도 있잖아. 그런데 언제부터 거기서 지냈냐고?”윤지은은 또다시 물었다.나는 그제야 윤지은의 질문을 이해하고 해명했다.“이틀 전이요. 제 친구 두 명이 제 집에서 얹혀살아 제가 지낼 자리가 없어서 잠깐 신세진 것뿐이에요.”“이제 겨우 형수랑 정정당당하게 만날 수 있어 기쁘겠네?”‘윤지은이 질투하는 것 같은 건 왜지?’‘설마 윤 사장님 말대로 윤지은이 나를 좋아하나?’자세히 생각해 보니 윤지은이 나에게 도움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비록 그동안 말로 나를 봐준 적이 없고 항상 쌀쌀맞게 대했지만 매번 나한테 일이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그랬겠나?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뭐 하나 물어볼게요. 절대 화내면 안 돼요.”“뭔데? 꾸물대지 마.”윤지은은 고개를 돌려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나는 심호흡을 한 뒤 물었다.“혹시 나 좋아해요?”그 질문을 한순간 윤지은은 털이 곤두선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반응했다.“뭐?”나는 흠칫 놀라 목을 움츠렸고 자신감을 잃어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나는 도망치듯 차를 뛰쳐나갔다.내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나는 윤지은
[나중의 일은 나중에 얘기해. 왕정민 혼자 뭘 하지는 못할 거야.]윤지은이 나를 위로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덕분에 내 걱정도 조금 사라졌다.확실히 왕정민을 신경 쓰기보다 형수 일이 더 중요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시간은 벌써 8시라 병원에 가봐야 했다.어젯밤 고수연이 밤새도록 형수를 간호했기에 나는 특별히 아래층에서 아침을 사 들고 병실로 향했다. 다만 고수연이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여러 가지를 골고루 준비했다.고수연은 피곤했는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다. 심지어 아침을 먹는 내내 하품을 해댔다.우리는 아무 대화도 없이 각자의 음식을 먹었다.아침을 먹은 뒤 내가 돌보겠으니 집에 돌아가라고 하자 고수연이 물었다.“우리 언니랑 무슨 사이인지 말해요. 그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으면서 왜 남으려고 해요?”그 질문에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나는 고수연이 갑자기 그런 걸 물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내가 형수랑 무슨 사이냐니?’나는 형수와 법적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다. 다만 형수는 나한테 중요한 가족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내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고수연이 다시 물었다.“사실 나도 다 알아요. 수호 씨가 우리 언니랑 썸 타는 사이라는 거. 나도 우리 언니도 다 결혼했던 사람이에요. 남편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많이 달라 언니도 많이 외로웠을 거라는 거 이해해요. 성적 욕구를 혼자 해결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고.”“그래서 언니 곁에는 언니를 걱정하고 관심해주는 잘생긴 남자가 있다는 게 부러워요. 나는 그런 행운이 없는데.”고수연이 갑자기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니 나도 모르게 위로했다.“사실 수연 씨도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수연 씨도 충분히 예뻐요.”“그게 무슨 소용인데요? 난 언니처럼 총명하지도 않고 모아둔 돈도 없어요. 심지어 아이까지 둘이나 딸려 있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해요. 그런데 내 주제에 어떻게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겠어요?”하긴, 맞는 말이었다
나를 꿰뚫어 볼 듯 노려보는 윤지은을 보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결국 나는 참다못해 먼저 헤실 웃으며 인사했다.“왔어요? 우리 형수 보러 온 거예요?”내가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 피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윤지은과 그동안 지내오면서 나는 이제 그녀의 습관을 조금씩 알게 됐다.윤지은은 항상 강한 사람한테는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하다. 비록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은 누구보다 약하고.때문에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내가 웃으며 상대하면 절대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윤지은은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목이 메어 하려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짤막하게 맞다고 대답하고는 떠나버렸다.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하도 총명해졌으니 망정이지. 앞으로도 이런 방법으로 상대해야겠네.’윤지은은 여진수와 함께 왔다.여진수의 진찰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급히 물었다.“형수 상태는 어떤가요?”“어제랑 별반 다를 게 없어요. 각종 바이털은 다 정상이지만 아직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네요.”내 가슴은 또 싸늘해졌다.나도 사실 알고 있다. 환자를 구하는 골든 타임은 사고 직후 48시간이다. 만약 형수가 48시간 이내에 깨어나지 못한다면 평생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하지만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무조건 형수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낼 거다.한참 뒤, 애교 누나도 병원에 도착했다.나는 애교 누나한테 형수를 부탁하고 변석훈을 찾으러 갔다.그때 윤지은이 다가와 나에게 차키를 던졌다.“내 차 타고 가.”윤지은의 차는 벤틀리였는데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평소 관리도 잘 된 걸 보면 차주가 차를 얼마나 애지중지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런 사람이 제 차를 선뜻 내주니 나는 놀라우면서도 황송했다.나는 차키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됐어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 말에 윤지은의 표정은 확 어두워졌다.“왜? 나라서 싫어?”“아니요. 제가 왜 지은 씨를 싫어하겠어요? 차가 너무 비싸서
모태진도 나를 위로했다.역시나 화인당 식구들은 여전히 나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동료들의 걱정에 나는 너무 고마웠다. 이런 동료들이 있기에 나도 안심하고 내 일을 할 수 있다.“나중에 내가 한턱낼게요.”내 말에 다들 기대된다며 무척 기뻐했다.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현성이 들어와 나를 옆으로 끌었다.“수호야, 천수당 쪽은 준비가 끝나서 언제든 오픈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작은 문제가 생겼어.”“무슨 문제?”그동안 현성이 천수당 쪽 일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나와 민우는 무척 안심했다.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김진호가 자꾸만 경영에 끼어들고 싶어 해. 게다가 요구가 얼마나 많은지 나랑 너무 안 맞아.”“주해진한테 얘기해 봤어?”“당연히 했지. 그런데 나더러 직접 해결하래. 때리겠으면 때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주해진도 김진호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진짜 때릴 수는 없잖아.”“가게 오픈 전부터 사업 파트너끼리 싸움하면 앞으로 장사는 어떻게 하겠어?”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주해진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가 정말 김진호 건드리면 엄청 번거로워질 거야.”“내 말이. 내가 걱정하는 게 그거야. 네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장 주먹을 날렸을 거야. 내 성격 알잖아. 나 그런 거 못 참잖아. 그런데 앞으로 가게 일은 너랑 민우가 도맡아 할 거고 난 기껏해야 두 번째 주인 정도라 그런 일 내 관리가 아니잖아. 내가 끼어들면 문제가 커질까 봐 참았어.”“알았어. 내가 주해진과 잘 얘기해볼게.”이 일은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현성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너도 좀 휴식하면서 해. 이러다 쓰러져. 어쨌든 몸이 건강해야 다른 일을 할 거 아니야.”나는 싱긋 웃었다.비록 생활이 힘들어도 곁에 이런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현성이 떠난 뒤 나는 곧바로 주해진에게 전화해 김진호가 가게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단도리 잘하라고 했다. [김진호가 또 찾아가서 소란
주해진이 전화를 끊자마자 김진호가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정수호가 뭐래요?”주해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뭐라고 하긴, 당연히 동의하지 않지.”“형. 왠지 정수호 그 자식이 우리 둘을 쫓아낼 것 같아요.”김진호는 일부러 옆에서 부채질했다.하지만 주해진도 바보가 아닌지라 김진호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정 심심하면 술집 일 좀 도와주던가. 천수당 쪽은 당분간 끼어들지 마. 오픈하기도 전에 정수호와 사이가 틀어지면 손님은 누가 끌어모아?”김진호는 이대로 포기하는 게 달갑지 않은 듯했다.“나도 의사인데 나더러 술집 알바를 하라는 게 어디 있어요?”“왜? 싫어? 돈만 벌면 되는 거 아니야? 신경 쓸 게 뭐가 그렇게 많아?”“그런데 난 술집 알바 따위나 하기 싫어요. 의사를 하고 싶어요. 정수호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왜 못해요?”김진호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무엇보다 내가 화인당에 오기 전에 그의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오고 나서 그는 일자리마저 잃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김진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때문에 그날 이후 그는 줄곧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내가 아예 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 천수당의 책임자까지 되었는데, 저는 일할 자격도 없으니 그 울분을 참을 리가 있을까?김진호는 단순히 돈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능력이 있으면 해.”주해진의 한마디에 김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진호도 하기 싫은 게 아니다. 다만 천수당은 그가 인수한 게 아니라 결정권도 발언권도 없다.김진호는 제 형이 나와 손잡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절대 나와 내 친구들을 끼워주지 않았을 거다.실패하든 성공하든 모두 김진호의 능력에 달렸지만. 나까지 끼어들었으니 이제 의미는 달라졌다.김진호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때 주해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됐어. 표정 풀어. 당분간은 내 가게 일이나 도와. 천수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