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시 눈을 떴을 때 병실은 아침빛으로 환했다.
아랫배에는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전날의 차가운 공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옆을 보니 태윤이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내 왼손은 그의 두 손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밤새 놓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노크 소리에 태윤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윤서린 환자분, 오늘 다시 초음파와 혈액검사를 확인하겠습니다.” 그 말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응급 처치가 먼저였다. 아이가 살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태윤이 내 손을 잡았다.“같이 가도 됩니까?”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실로 이동하는 동안 그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지만 서두르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해준이가 메고 갈 책가방을 사러 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새 가방의 원단 냄새가 났다. 벽에 줄지어 걸린 여러 색의 가방을 올려다보느라 아들은 입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태윤의 태블릿에는 소재와 무게, 수선 조건을 비교한 표가 있었다. 읽기 시작했지만 해준이는 벌써 진열대 앞으로 가 있었다. 내가 소매를 당기자 그제야 따라왔다. 직원이 가방을 메어 주자 해준이는 거울 앞에서 몸을 틀어 뒤를 보려 했다. 가방이 흔들릴 때마다 어깨끈이 미끄러졌다. 태윤은 어깨끈과 지퍼가 튼튼한지를 따지고 있었지만, 아들은 이미 자기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먼저 보고 있었다. 해준이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을 하나씩 메어 본 뒤 검은 가방 앞에 섰다. 장식이 거의 없는 평범한 모양이었다. 태윤이 눈여겨보던 것과도 달랐다.“이거.”“이쪽 가죽은…….” 해준이가 어깨끈을 꼭 쥐고 한 발 물러났다. 태윤은 말을 멈췄다.“무겁지 않아? 좀 걸어 봐. 등에 닿는 데도 봐야지.” 해준이는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돌아와서도 벗지 않자 태윤이 어깨끈을 맞춰 주었다.“이걸로 주세요.”“아빠, 내가 고른 거 멋있어?”“잘 어울려.” 태윤은 한동안 아이의 작은 등을 보고 있었다. 저 등을 앞으로 여섯 해 동안 학교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나도 목이 메었다. 아직 가방이 등에 비해 커 보였다. 가방을 상자에 넣기 직전 해준이가 한 번만 더 만져 보겠다고 손을 뻗었다. 직원이 기다려 주자 검은 원단을 손끝으로 쓸고 민망한 듯 손을 거
공원에서 이음이와 모래놀이를 하다가 태윤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해준이가 그네 앞에서 다른 아이와 말다툼하고 있었다. 순서를 빼앗긴 모양이었다.“내가 가 볼게.” 태윤이 일어서자 내가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 직후 상대 아이가 해준이를 밀었다. 아들은 바닥에 넘어졌다.“괜찮아?” 무릎에 모래가 붙었다. 태윤도 곁에 쭈그리고 앉아 일어설 수 있는지 물었다. 상대 아이 어머니가 급히 사과했다. 해준이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나도 먼저 큰 소리로 비키라고 했어.” 돌아오는 길, 이음이가 오빠의 손을 잡았다. 해준이는 이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넘어진 순간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아까 너를 막지 말걸.” 태윤이 내 걸음에 맞췄다.“나도 망설였어. 어른이 나서면 다른 아이가 겁먹을 테니까.”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 모래가 쏟아졌다. 해준이는 세면대에서 스스로 상처를 씻었다. 물이 닿자 무릎을 빼기에, 조금만 더 씻자고 했다. 태윤은 수건을 가져와 옆에서 기다렸다. 해준이가 공룡 그림 밴드를 골랐다. 이음이가 손대려 하자 “여기 아파” 하고 말했다. 딸은 손을 멈추고 대신 오빠의 소매를 잡았다.“다음에 무서우면 아빠 부를게.”“그래. 바로 불러.” 태윤이 밴드 끝을 눌러 줬다. 나는 흙이 묻은 수건을 한참 접고 있었다. 그가 내 손까지 감쌌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다시 뛰어다녔지만 우리 둘은 아직 웃지 못했다. 해준이가 겁이 나면서도 제 힘으로 진
이음이가 두 살을 넘기자 해준이와 자주 다퉜다. 이날은 해준이가 아끼는 빨간 소방차가 원인이었다. 둘이 양쪽에서 잡아당기자 사다리가 휘었다.“내 거야!”“이음이 거!”“부러지겠다. 잠깐 놓자.” 내가 무릎을 꿇자 해준이가 손에 힘을 조금 뺐다. 태윤도 이음이에게 말했다.“오빠 거야. 빌리고 싶으면 물어봐.” 입술을 삐죽거리던 딸과 해준이는 한동안 말다툼을 했다. 그러다 해준이가 차체를 쥔 채 말했다.“같이 하면 돼. 내가 차 운전할게. 이음이는 소방관.” 이음이가 인형을 들고 달려갔다. 몇 분 전의 싸움은 없었던 듯했다. 태윤과 나는 동시에 소파에 주저앉았다. 붉은 소방차가 거실을 지나갈 때 우리는 다리를 들어 길을 비켰다. 태윤에게도 예전에 그 장난감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이제 두 아이가 함께 놀 때만 상자 한가운데에 놓는 차였다. 그날 저녁에는 해준이가 아빠 서재에서 만년필을 빌려 달라고 했다. 태윤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다가 뚜껑을 잠근 채 손에 쥐여 주었다.“책상 위에서만.” 해준이는 금빛 펜촉을 보고 싶어 했지만 뚜껑을 열 수 없다는 걸 알고 돌려줬다. 태윤은 펜을 받으며 아들의 머리를 헝클었다. 소방차에도, 자기 물건에도 같은 규칙이 필요하다는 걸 둘 다 알게 된 듯했다. 다음 날에는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해준이가 유치원에서 만든 왕관의 별을 이음이가 뜯어 놓았다.“이음이 싫어!” 이음이가 울었다. 해준이는 찢어진 자리를 붙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별 모서리를
걷기 시작한 이음이에게 서재는 새로운 놀이터였다. 어느 날 태윤이 부르는 소리에 가 보니 서류 몇 장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딸 손에는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아빠 거.”“그래. 돌려줘.”“싫어.” 태윤은 무릎을 꿇고 흰 종이와 빨간 크레용을 내려놓았다.“여기에는 마음대로 그려도 돼. 펜은 아빠한테 주고.” 이음이는 둘 다 쥐려 했다. 태윤이 크레용을 든 손을 뒤로 빼고 빈손을 내밀자 한참 바라보다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곧 종이에 빨간 선이 그어졌다. 태윤이 서류를 주워 올리는 동안 딸은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이음이는 종이에 아빠 얼굴을 그리는 듯했다. 빨간 선 하나를 긋고 태윤을 올려다본 뒤 또 그렸다. 내가 바닥의 서류를 주워 주는 동안도 그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만년필보다 오래 붙잡은 건 그 소매였다. 그 뒤 낮은 서랍 하나에는 잠금장치가 달렸다. 중요한 서류와 날카로운 편지칼을 치웠다. 대신 옆 서랍은 이음이 몫이 됐다. 종이와 크레용이 든 곳을 딸은 보물 상자처럼 열고 닫았다. 해준이도 자기 상자를 달라고 했다.“서재에서 일하기 불편하지 않아?”“불편해.” 태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딸이 그린 붉은 선을 비싼 액자에 넣어 걸었다. 내가 치울까 묻자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그건 그냥 둬.”◇ 첫 신발을 사러 온 가족이 아동화 가게에 갔다. 직원은 이음이 발을 잰 뒤 흰색, 노란색, 빨간색을 꺼냈다. 태윤은 소재를 살피며 흰색을 가리켰다. 해준이는 노란색이 빠를 것 같다고 했다.
이음이가 소파를 붙잡고 서기 시작한 뒤로 거실은 바빠졌다. 작은 발이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해준이가 뒤를 따라다녔다.“넘어져, 이음아.” 태윤은 모서리마다 보호대를 붙이고 낮은 탁자까지 치웠다. 내가 안전 교육장 같다고 하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넘어질 곳을 줄인 거야.” 어느 오후, 이음이가 소파에서 손을 뗐다. 한 발을 내디딘 뒤 그대로 주저앉았다. 태윤의 손이 먼저 나갔지만, 딸은 울지 않았다. 매트를 짚고 몇 번 미끄러진 끝에 혼자 다시 일어섰다.“안 일으켜 줘도 되는 거야?”“응. 다시 해 보려나 봐.” 이음이는 아빠 쪽을 돌아봤다. 태윤이 바닥에 앉아 팔을 벌렸다.“이음아. 이리 와.” 딸은 아빠 얼굴과 바닥을 번갈아 보고, 잡았던 천을 다시 만졌다. 태윤은 더 부르지 않고 기다렸다. 해준이가 내 무릎에 기대 속삭였다.“아빠 숨 안 쉬어.” 태윤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해준이의 손을 잡았다. 소파 모서리 보호대가 조금 삐뚤었는데, 태윤은 접착력이 약해진다며 다시 붙이는 것도 막았었다. 그 아래서 딸의 발이 바닥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천에서 떨어졌다. 한 발, 두 발, 세 발. 맨발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음이는 휘청일 때마다 발가락을 벌렸다. 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해준이가 내 옷을 당기는 힘으로 그 아이도 숨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태윤은 팔을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아빠.” 태윤의 얼굴이 무너졌다. 마
건우 아버지가 손을 뻗는 순간, 가방 안에서 긴급 호출을 작동시켰다.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등록해 둔 경비실과 태윤에게 현재 위치와 함께 자동으로 시작된 현장 녹음이 전송됐을 것이다.“당신 때문에 다 잃었어!” 팔목을 잡혔다. 손을 빼려 했지만 남자의 손가락을 떼어 낼 수 없었다. 내 손톱만 피부를 긁었다.“놓으세요!” 남자의 팔이 올라갔다. 그때 주차장 끝의 비상등이 깜빡이고, 휴대전화에서 경비원이 오고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남자가 고개를 돌린 사이 팔을 빼서 차 뒤로 물러났다. 차체를 짚은 손까지 떨렸다. 구두 뒤축을 다시 딛고 거리를 벌렸다.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들었다. 발 아래에는 떨어진 선물 가방이 있었다. 태윤에게 어떻게 건넬지 생각하며 골랐던 시계인데, 지금 주우려고 몸을 낮출 수는 없었다. 복도 쪽에서 여러 명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맨 앞의 백화점 경비원이 남자를 막았다. 이어 박현석과 이동훈, 그리고 태윤이 들어왔다. 남자가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 둘이 붙잡았다.“이건 집안일이라고!”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볼 수 없었다. 붉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감싼 채 차 옆으로 기댔다. 태윤은 내 손목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주먹이 굳어 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태윤. 여기 있어 줘.” 한 번 더 말하려는데 이가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태윤이 재킷을 벗어 어깨에 둘렀다. 그의 손도 떨고 있었다.“알았어. 여기 있을게.” 그는 남자 쪽으로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