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윤은 내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후 일도, 네 아버지 일도. 내가 더 일찍 말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어.” 나는 습관처럼 ‘괜찮아’라고 하려다 멈췄다. 예전에는 빨리 화해하고 싶을수록 내가 다친 일을 작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아버지 일은 내가 오해했어.”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그건 나도 미안해. 네 설명을 듣기도 전에 네가 복수했다고 단정했으니까.”“서린아.”“하지만 그거랑 다른 일은 별개야.” 그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전담 배정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날. 돈과 엄마 치료 앞에서 선택지가 없다고 느꼈던 순간. 싫다고 할수록 더 좁아지던 공간.&케이크가 구워지는 동안 나는 작은 테이블에 편지지를 펼쳤다. 받는 사람은 열두 명. 중소 협력사 대표, 과거 현강의 투자로 사업을 이어 간 창업자, 그리고 오랫동안 거래해 온 기술회사 대표들이었다. 첫 문장을 쓰기 전 한참 고민했다.‘갑작스럽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강태윤 대표의 배우자 윤서린입니다.’ 회사 홍보문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감정으로 투자해 달라는 편지도 아니어야 했다.‘현재 현강홀딩스가 겪고 있는 유동성 문제와 시장 상황은 박현석 비서실장을 통해 공식 자료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는 그와 별개로, 그동안 현강과 강태윤 대표를 믿고 거래해 주신 데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씁니다.’ 펜을 잠시 멈췄다. 태윤은 불친절한 사람이다. 자기가 왜 어떤 회사를 살리기로 했는지, 왜 손해를 보면서 계약을 유지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그 사람은 자기 진심을 말하는 데 서툽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기술과 일자리를 지키는 선택을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집요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한 번만 현강의 설명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돈을 달라는 문장은 쓰지 않았다. 회의 자리를 열어 달라고만 부탁했다. 결정은 숫자와 사업성을 보고 각 회사가 해야 한다. 마지막 편지는 프랑스어로 썼다.‘Cher Monsieur Bertrand,’ 예전에 그가 현강을 처음 찾았던 날이 떠올랐다. 일정 착오로 화가 난 그를 응대하고, 태윤 대신 프랑스어로 상황을 설명했던 날.‘현강과 귀사가 논의하던 협력은 현재 외부 리스크로 중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특별대우가 아닙니다. 기존에 검토하셨던 기술과 사업성을,
한 시간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미숙과 최만호가 차례로 들어왔다.“아가씨, 안색부터 보겠습니다.” 정미숙 씨는 신발을 벗자마자 나를 살폈다.“괜찮아요. 오늘은 계속 앉아 있을 거예요.”“그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최 소장님은 벽에 기대 서며 방을 둘러봤다.“강 대표 쪽 상황, 꽤 심각하던데.”“네.” 나는 태블릿 화면을 켰다.“한명금융이 직접 모든 회사를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쪽이 리스크 재검토를 발표한 뒤 다른 금융사까지 같이 움츠러들었어요.” 정미숙 씨가 화면을 봤다.“그래서 누구를 찾으시려고요?” 나는 미리 만들어 둔 목록을 두 사람에게 보냈다. 현강이 과거 지분투자하거나 자금 지원을 했던 중소기업. 사업부를 인수한 뒤 기술과 고용을 유지한 회사. 위기 때 공급 계약을 끊지 않고 살려 둔 협력사. 언론 기사만 보면 ‘공격적인 인수’로 보였던 거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서실에서 오래된 자료를 보며 알고 있었다. 태윤은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바로 공장을 닫지 않았다. 살릴 기술과 일자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꽤 오래 버텼다.“이 사람들한테 돈 달라고 하려는 건 아니죠?” 최 소장님이 물었다.“아니요.” 나는 바로 대답했다.“지금 현강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할 거예요. 거래를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 태윤이 직접 말할 수 있게요.”“그 정도면 현실적이네요.” 정미숙 씨가 고개를
“한명 쪽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넓어.” 태윤은 내 무릎에 머리를 둔 채 천장을 봤다.“직접 압박했다는 증거가 없는 곳도 많아. 그냥 다들 먼저 위험을 피하는 거야.”“그게 더 무섭지.”“응.” 그의 손이 이불 끝을 잡았다.“회사 현금이 마르면 급여도, 협력사 대금도 못 줘. 대표 자리 잃는 건 둘째야.” 잠시 말이 끊겼다.“내가…… 너랑 아이가 잘 곳까지 못 지킬까 봐 무서워.” 그제야 알았다. 태윤이 무서워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가 무력해져서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무너뜨리는 것이었다.“태윤아.”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 배 위에 올렸다.“우리 지금 잘 곳 있어.”“5평 원룸.”“그래도 비 안 맞잖아.” 태윤이 아주 작게 웃었다.“밥도 먹었고.”“9,800원짜리.”“맛있었지?”“응.” 나는 그의 손등을 덮었다.“내가 ‘사랑만 있으면 다 괜찮아’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야. 돈 필요하고, 병원비도 필요하고, 회사도 살려야 해.”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근데 그걸 네가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야.”“서린아.”“돈 계산은 같이 하고, 생활은 내가 맡을 수 있는 부분 맡고, 회사는 네가 사람들하고 방법 찾고.” 나
샤워를 마친 태윤은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고 있었다.“이리 와.”“뭐 하게.”“머리 말려 줄게.” 나는 그를 앉히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눌러 닦았다. 값싼 샴푸 냄새와 태윤 특유의 향이 섞였다. 그가 눈을 감았다.“좋은 냄새 난다.”“샴푸?”“아니. 밥.”“배고프구나.”“아주.” 나는 웃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팬에 케첩, 돈가스소스, 간장 조금과 버터를 넣어 졸였다. 진한 갈색 소스가 함박스테이크 위에 윤기 있게 입혀졌다. 작은 테이블 위에 접시 두 개를 올렸다. 함박스테이크, 감자샐러드, 채 썬 양배추. 양파 자투리로 끓인 따뜻한 수프도 곁들였다. 태윤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갈랐다. 안쪽에서 육즙이 흘러나왔다. 한입 먹은 뒤 그가 잠시 멈췄다.“왜?”“……진짜 맛있어.” 나는 그제야 숨을 놓았다.“오늘 많이 힘들었어?” 태윤은 두 번째 한입을 먹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세 곳 갔는데 두 곳은 담당 임원이 아예 안 나왔어. 한 곳은 미팅하다가 리스크위원회 결정 전에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끝냈고.”“모욕적인 말도 들었어?”“조금.”“조금이 아닌 얼굴인데.” 태윤이 씁쓸하게 웃었다.“어제까지 먼저 술 사겠다고 연락하
오후 여섯 시. 작은 환풍기가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주방 앞 의자에 앉아 스테인리스 볼 안의 다진 고기를 섞었다. 오래 서 있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 조리도 대부분 앉아서 했다. 오늘 장 본 금액은 9,800원. 할인 중인 소·돼지 혼합 다짐육, 감자, 양파, 당근, 달걀 몇 개. 예전 주방처럼 값비싼 고기나 수입 식재료는 없었다. 하지만 돈이 적다고 식탁까지 초라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양파는 충분히 볶아 단맛을 끌어낸 뒤 완전히 식혔다. 빵가루에는 우유를 조금 넣고, 고기에는 소금과 후추를 넣어 끈기가 생길 만큼만 빠르게 치댔다.“너 또 너무 집중한다.” 침대 쪽에서 노트북을 보던 태윤이 말했다.“일하고 있잖아.”“앉아서 하라니까 다행이긴 한데.”“보고만 있어.”“어려운데.” 나는 고기를 두 덩이로 나눠 공기를 뺐다. 작은 함박스테이크 두 장. 옆 냄비에서는 감자가 익고 있었다. 삶은 감자를 으깨고 식초와 설탕을 아주 조금 넣어 산뜻하게 맞췄다. 마요네즈를 많이 넣지 않아도 충분했다. 팬에 고기를 올리자 치익, 하고 기름이 튀는 소리가 났다. 양파의 단내와 고기 굽는 냄새가 금세 원룸 전체를 채웠다. 환풍기 성능이 부족해서 옷에도 냄새가 밸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싫지 않았다.“오늘 늦어?” 내가 묻자 태윤이 노트북을 덮었다.“금융사 미팅 하나 더 갔다 올게.”“밥 식기 전에 와.”“노력할게.” 그는 외출용 재킷
태윤이 마지막 양배추를 썰고 칼을 내려놓았다.“난 네한테 더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성북동 집도, 새로 짓던 집도. 넓고 안전하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곳.” 그는 좁은 싱크대에 손을 짚었다.“근데 지금은 옆집 말소리도 들리는 원룸이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의 셔츠 끝을 잡았다.“그래도 여기 좋아.” 태윤이 뒤돌아봤다.“넓은 집은 가끔 너무 조용했어. 네가 늦게 들어오는 날엔 내가 혼자 남은 느낌이 컸고.”“서린아.”“여긴 네가 한 발만 움직여도 알아.” 피식 웃었다.“조금 답답하긴 해도, 적어도 어디 있는지는 알잖아.” 태윤의 표정이 천천히 풀렸다.“내가 옆에 있으면 안전한 거야?”“네가 나 대신 판단하지 않을 때는.” 그가 피식 웃었다.“조건 붙었네.”“중요한 조건이지.” 나는 손을 내밀었다. 태윤이 잡았다.“집은 다시 지을 수 있어.”“응.”“회사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고.”“응.”“그때까지는 여기서 살자.” 태윤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녁상은 작은 접이식 테이블 위에 차렸다. 닭가슴살 무조림, 양배추 달걀국, 그리고 최 소장님이 사 온 감자샐러드.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