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이튿날은 해가 났다.
봄이 오고 있었다. 루엔은 열흘 뒤면 일곱 살이었다.
오스윈은 오두막 앞 텃밭 가에 그 넓은 나무 대야를 다시 내놓았다. 가을에 루엔의 그릇을 쟀던 대야였다. 금 그은 막대도 그대로 꽂혀 있었다.
“오늘은 내가 들겠네. 자네는 재게.”
루엔은 대야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에는 밀랍판. 펠릭스는 뒤에서 또 한 장을 들었다.
“세 가지로 하겠네. 부을 양은 셋 다 같게. 늙은이 손이라도 그만큼은 맞추네.”
첫 번째는 스물아홉 마디. 열여섯째 마디 뒤 반 박자 쉼까지 넣은, 오스윈의 고운 영창.
물이 솟았다. 가늘고 곧게. 끝이 거의 떨리지 않았다. 번쩍임은 햇빛 아래서 겨우 보일 만큼 옅었다.
막대의 금으로 스물한 마디.
두 번째는 같은 스물아홉 마디. 다만 반 박자 쉼을 뺐다.
물이 솟았다. 끝이 조금 떨렸다. 번쩍, 하고 흰빛이 한 번 튀었다. 윙 소리가 짧게 났다.
열여덟 마디.
세 번째는 가을에 루엔에게 가르친 일곱 마디. 있는 대로 쏟아서 드는 말.
물이 거칠게 치솟았다. 끝이 부르르 떨렸다. 흰빛이 여러 번 번쩍였다. 윙 소리가 귀를 울렸다. 대야 가까이 댄 루엔의 손등에 훅 하고 더운 기운이 닿았다.
열네 마디.
*
오스윈은 대야 가장자리에서 손을 뗐다. 루엔이 밀랍판을 내밀었다. 세 줄이었다.
고운 영창, 스물하나. 번쩍임 거의 없음.
쉼을 뺀 영창, 열여덟. 번쩍임 한 번, 소리 조금.
거친 영창, 열넷. 번쩍임 여러 번, 소리 큼, 더움.
오스윈은 한참 그 세 줄을 보았다.
“부은 건 같았네.”
“예.”
“물은 덜 들렸고, 번쩍임은 늘었고.”
“소리도 늘었고, 열도 늘었습니다.”
오스윈이 턱을 쓸었다. 긴 영창이 덜 번쩍인다는 건 탑에서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더 곱게 든다고들 했다. 그래서 높은 마법일수록 영창이 길었다.
“곱게 든다는 게,” 오스윈이 천천히 말했다. “덜 흘린다는 뜻이었군.”
“예.”
“물로 가야 할 것이 물로 안 가고, 빛으로 가고, 소리로 가고, 열로 갔다.”
오스윈은 햇빛 속에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탑에서는 번쩍임을 마나의 위엄이라고 가르치네. 백색탑은 그 흰빛을 신성광이라 부르지. 밝을수록 신에게 가깝다고.”
그는 짧게 웃었다. 어제 오두막 안에서 웃던 웃음과는 달랐다.
“우리는 빛을 만든 게 아니었네. 흘린 걸세. 라이트는 일부러 크게 흘리게 짠 마법이었고.”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자기가 먼저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섯 살짜리가 한 말이었다면, 오스윈은 쉰 해를 걸고 그걸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샙니까.” 루엔이 물었다.
“모르네.”
“저도 모릅니다. 샌 걸 전부 모아 잴 방법이 아직 없습니다.”
루엔은 밀랍판의 세 줄을 보았다. 스물하나가 가장 많이 들었다. 하지만 스물하나가 새지 않은 값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가장 덜 샌 값일 뿐이었다. 거기서도 옅게나마 번쩍였으니까.
재야 할 것이 하나 늘었다.
*
펠릭스가 밀랍판을 정리하는 동안, 루엔은 개울가의 말뚝을 보고 있었다.
물 높이를 새긴 말뚝. 하루에 한 금, 한 달에 한 줄. 몇 해 치.
“선생님. 샌 마나는 어디로 갑니까.”
오스윈이 대야를 엎던 손을 멈췄다.
“흩어지지. 바람처럼.”
“흩어진 건 없어진 게 아닙니다.”
루엔은 말뚝 아래로 흘러가는 개울을 가리켰다.
“물도 흩어지면 어딘가 낮은 데 고입니다. 선생님 말뚝이 그걸 적고 있습니다.”
오스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뚝을 보았다. 오래. 그러다 고개를 돌려 오두막 쪽을 보았다. 열린 문 너머로 선반이 보였다. 푸른 끈으로 묶은 종이 묶음들. 끈이 잘린 것들도.
눈길은 금방 돌아왔다.
“모르네.” 오스윈이 말했다. “그건 정말 모르네.”
루엔은 그 말을 믿었다.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처음 듣는 얼굴은 아니었다.
*
그날 오후, 성에서 유리가 깨졌다.
코넬이었다.
엘리나 방 앞 복도에서 목검 연습을 했다. 하지 말라는 곳이었다. 칼끝은 벽 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그런데 팔꿈치가 벽 선반을 쳤다.
선반 위에는 엘리나가 시집올 때 남쪽에서 가져온 유리잔 두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돌바닥에 떨어졌다.
맑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코넬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리나가 방에서 나왔다. 바닥의 조각들을 보았다. 코넬을 보았다.
“다친 데는 없니.”
“… 없어요.”
“그럼 됐다. 하나 남았네.”
엘리나는 그 말만 하고 마르타를 불렀다. 꾸짖지 않았다. 코넬은 꾸짖음을 들을 때보다 더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검은 원래 대충 휘두르는 거야.” 코넬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칼끝 말고 팔꿈치가 친 거라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마르타가 조각을 쓸어 담을 때, 루엔이 두 개를 골라 냈다.
하나는 잔 테두리에서 떨어진 두꺼운 조각이었다. 옆에서 보면 뾰족한 쐐기 모양이었다. 다른 하나는 잔 바닥이었다. 둥글고 두껍고, 가운데가 불룩했다.
“도련님, 손 베여요.”
“천으로 쥐겠습니다.”
해가 서쪽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엔은 쐐기 조각을 천으로 감싸 쥐고 햇빛 속에 넣었다. 조금씩 돌렸다.
맞은편 흰 벽에 무언가가 번졌다.
빛의 띠였다. 한쪽 끝은 붉고, 그다음은 주황, 노랑, 풀빛, 푸른빛, 끝은 보랏빛.
마르타가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무지개네요! 방 안에!”
엘리나가 왔다. 코넬도 왔다. 펠릭스가 복도 끝에서 뛰어왔다.
루엔은 조각을 조금 더 돌렸다. 띠가 벽을 따라 움직였다. 색의 차례는 그대로였다. 붉은 쪽이 늘 덜 꺾였고, 보랏빛 쪽이 늘 더 꺾였다.
하늘의 무지개와 같은 차례였다.
“흰빛 안에 색이 들어 있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유리가 나눴을 뿐입니다.”
“유리가 색을 입힌 걸 수도 있지요.”
펠릭스였다. 벽의 띠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교회 창에 색유리를 끼우면 빛에 색이 드니까요. 유리가 색을 만든 게 아니라고 어떻게 압니까.”
좋은 물음이었다. 루엔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색유리는 한 가지 색만 냅니다. 이건 맑은 유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돌려도 붉은빛은 늘 덜 꺾이고 보랏빛은 늘 더 꺾입니다. 유리가 칠한 거라면 차례가 매번 같을 까닭이 없습니다.”
펠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띠를 보았다.
“… 아.”
짧은 소리였다. 알아들었을 때 내는 소리.
루엔은 한 가지를 더 해 보았다.
마르타에게 덧창을 거의 닫아 달라고 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만 남기고. 가는 햇빛 한 줄기가 방을 가로질렀다. 쐐기 조각에 그 줄기를 넣자, 벽의 띠가 좁고 또렷해졌다.
그 띠 앞에 루엔은 제 손바닥을 세웠다. 붉은 끝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그리고 빠져나간 붉은빛 앞에 잔 바닥 조각을 댔다.
붉은빛은 조각을 지나서도 붉은빛이었다. 더 나뉘지 않았다. 다른 색이 새로 나오지 않았다.
“유리가 색을 만든다면, 두 번째 유리에서 또 만들었어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붉은 건 붉은 채로 나옵니다. 더 나눌 게 없는 겁니다.”
펠릭스가 벽과 루엔의 손과 유리 조각을 차례로 보았다. 이번엔 「아」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밀랍판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엘리나는 벽의 띠에 손을 가만히 댔다. 손등에 색이 얹혔다. 붉은 것부터 보랏빛까지.
“깨진 게 쓸모가 있었네.” 엘리나가 말했다. 코넬 쪽을 보지 않고 한 말이었다. 코넬의 어깨가 조금 풀렸다.
*
루엔은 그날 저녁 내내 벽을 떠올렸다.
해의 흰빛은 나누면 색이 나왔다. 그렇다면 오스윈의 라이트는. 셀빈의 파이어 볼트 끝에서 튀던 흰 번쩍임은.
그 흰빛도 나누면 색이 나올까. 나온다면 어떤 색이 얼마만큼.
새는 것이 빛이 된다면, 그 빛을 읽으면 어디서 얼마나 샜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루엔은 멈췄다. 아직 가진 건 깨진 잔 조각 하나였다.
*
이튿날, 코넬은 모래 마당에서 혼자 목검을 휘둘렀다. 기사들은 말을 보러 나가고 없었다.
루엔이 가장자리에 앉았다. 코넬이 흘끗 보았다.
“세지 말랬잖아.”
“세지 않겠습니다. 표시만 하겠습니다.”
코넬은 콧방귀를 뀌고 다시 찔렀다. 앞으로 한 걸음, 팔을 뻗어, 멈춤. 기사들이 가르치는 찌르기였다.
칼끝이 멈출 때마다 루엔은 그 바로 아래 모래에 나뭇가지로 점을 찍었다.
코넬은 처음엔 모른 척했다. 스무 번쯤부터 찌르기가 더 반듯해졌다. 쉰 번쯤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백 번.
코넬이 목검을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됐냐.”
“보십시오.”
모래 위에 점 백 개가 모여 있었다. 흩어진 게 아니라 한 덩어리로. 루엔이 손가락을 펴서 그 위에 댔다. 점 백 개가 전부 손가락 한 마디 안에 들어왔다.
코넬이 모래를 내려다보았다.
“형은 대충이 아닙니다.”
루엔이 말했다.
“말만 대충입니다.”
코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검을 쥔 손이 멈춰 있었다. 귀가 천천히 붉어졌다. 목까지.
“… 팔꿈치는.”
한참 뒤에 코넬이 물었다.
“팔꿈치는 안 쟀습니다.”
“재지 마.”
코넬이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마구간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조금 가벼웠다. 모래 마당 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돌아보았다. 점 백 개를 보았다.
그날 저녁 코넬은 엘리나에게 남은 유리잔 하나를 방 안쪽 선반으로 옮기자고 했다. 자기가 옮겼다.
*
밤에 루엔은 수첩을 뒤에서부터 폈다.
앞쪽은 「원래 그렇다」였다. 누가 말했는지, 몇 살 어느 계절인지까지 적은 줄들.
맨 뒷장은 비어 있었다. 루엔은 거기 새로 적었다.
모르는 것.
하나. 샌 마나는 어디로 가나.
누가 말했는지는 적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수첩을 덮고 창가를 보았다. 창턱에 유리잔 바닥 조각이 쐐기 조각에 기대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낮에 같이 골라 둔, 둥글고 가운데가 불룩한 조각.
*
아침 해가 창턱을 비췄다.
루엔은 일어나 창가로 갔다. 무언가 탄 냄새가 났다. 아주 조금.
유리 바닥 조각에서 손가락 네 마디 떨어진 창턱 나무 위에 까만 점 하나가 있었다. 콩알만 한 크기. 손끝으로 만지자 가루가 묻었다.
불을 붙인 사람은 없었다. 불씨가 튈 자리도 아니었다.
루엔은 유리 조각을 들어 해 쪽으로 기울였다. 창턱에서 손가락 네 마디 높이. 창턱 위에 밝은 점 하나가 맺혔다. 햇빛이 한 점으로 모여 있었다.
그 점 아래에서 가는 연기가 한 줄 피어올랐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