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판타지 / 무색탑의 수학자 / Chapter 1 - Chapter 10

All Chapters of 무색탑의 수학자: Chapter 1 - Chapter 10

86 Chapters

1화. 제동 거리

“대충 해, 서 박사.”센터장은 그 말을 오늘만 세 번 했다.서재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어디가.”“마지막 칸이요. 들어간 열과 나간 열이 같아야 하는데, 조금 빕니다.”“조금이면 맞은 거야.”“어디로 샜는지 모르면 안 맞은 겁니다.”센터장이 한숨을 쉬었다. 쉰을 넘긴, 사람 좋은 얼굴이었다.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서재현도 알았다. 마감은 내일 아침이다. 발주처는 보고서 두께만 볼 것이고, 빈 조금은 그래프에서 보이지도 않는다.“보고서엔 반올림해서 들어가.”“반올림은 틀린 걸 안 보이게 하는 거지, 맞게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 올해만 몇 번째야.”“센터장님이 대충 하라고 하신 만큼입니다.”옆자리 박사후연구원이 웃음을 삼켰다. 센터장도 결국 웃었다.“서 박사. 연구교수 계약 언제 끝나는지 알지? 끝자리 맞추다가 계약이 먼저 끝나.”“압니다.”“알면 들어가. 밤에 비 온대.”센터장은 가방을 들고 나갔다. 연구실 불이 하나씩 꺼졌다.서재현은 남았다.대학 부설 연구소. 물이 어떻게 흐르고 열이 어떻게 퍼지는지를 컴퓨터로 계산하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십 년 가까이 그 일을 했다.잘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그리고 그는 한 번도 「대충」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두 시간 뒤, 그는 찾았다.계산 격자의 맨 모서리, 딱 한 칸. 벽에 닿은 그 칸에서 열이 밖으로 조금씩 새고 있었다. 경계 조건 한 줄이 잘못 들어가 있었다.고쳤다. 다시 돌렸다.들어간 열과 나간 열이 끝자리까지 같았다.서재현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 순간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됐다.”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혼자 말했다.그는 메모지를 한 장 떼어 옆자리 모니터에 붙였다.— 모서리 칸 경계 조건 한 줄 틀렸음. 고쳤음. 내일 아침 다시 돌려 볼 것. 반올림하지 말 것.마지막 줄은 조금 망설이다 썼다. 박사후연구원은 좋은 연구자였다. 다만 센터장을 너무 잘 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2화. 하나

남자는 루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키가 컸다. 어깨가 문틀을 거의 채웠다. 얼굴 반을 덮은 수염에 빗물이 맺혀 있었다. 가죽 옷에서 말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작군.”낮고 짧은 목소리였다.뒤에서 엘리나가 웃었다. “갓 난 아기는 다 작아요, 가렛.”“코넬은 더 컸던 것 같은데.”“당신이 코넬 태어날 때도 국경에 있었잖아요.”남자 — 가렛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손바닥 하나가 루엔의 몸통만 했다. 그 손이 루엔을 들어 올렸다.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칼자루를 쥘 때보다 훨씬 조심하는 손이었다.루엔은 울지 않았다.그 남자의 눈을 보았다. 회색이었다. 지쳐 있었고, 아주 오래 말을 탄 사람의 눈이었다.“안 우는군.”“어젯밤 천둥에도 안 울었대요. 마르타가 그러는데, 눈을 뜨고 번개를 보더래요.”가렛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그때 문틈으로 작은 머리가 쑥 들어왔다. 까만 머리를 헝클어뜨린 사내아이였다. 루엔이 요람 너머로 몇 번 본 얼굴이었다. 대여섯 살쯤.“아빠! 얘가 내 동생이야. 얘 이상해. 잘 안 울어.”“그래, 코넬. 이리 와서 같이 봐라.”코넬은 쪼르르 다가와 발끝을 들고 요람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앞이라 그런지 괜히 코를 찡그렸다.“쪼글쪼글해.”“너도 그랬다.”“난 안 그랬어.”“그랬다.”“어떻게 알아. 아빠 없었잖아.”엘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렛은 입을 다물었다.루엔은 그 셋을 올려다보았다.아버지, 어머니, 형.이번 생의 가족이었다.*말을 알아듣는 데는 반년이 걸렸다.전생의 서재현은 외국어에 특별히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기의 머리는 달랐다. 소리가 그냥 스며들었다. 어른이 된 뒤 배우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반년쯤 지나자 들리는 말의 절반은 알아들었다. 입이 따라오지 않을 뿐이었다.가장 먼저 익힌 건 수였다.마르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소리 내어 셌다. 루엔을 안고 있으면 더 그랬다. 무거워서 숨을 고르려는 버릇이었다.“하나, 둘, 셋 … 에구, 우리 도련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3화. 번쩍이는 마법

두 살이 된 가을, 루엔은 나무 블록을 받았다.성의 목수가 자투리 나무로 깎아 준 것이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네모 조각 열두 개. 목수는 아이 손에 가시가 박히지 않게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주었다.코넬은 그 나이에 블록을 탑처럼 쌓다가 무너뜨리며 놀았다고 했다.루엔은 쌓지 않았다.늘어놓았다.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방바닥 돌 틈 하나를 기준선 삼아, 한 줄로. 블록 사이 간격은 손가락 한 마디씩.한참 걸렸다. 두 살의 손은 생각만큼 정확하지 않았다. 블록이 자꾸 비뚤어졌다. 루엔은 비뚤어질 때마다 다시 밀어 맞췄다.다 늘어놓고 나서 한 번 끝에서 끝까지 훑어보았다.좋다.그때 코넬이 방에 들어왔다. 일곱 살이었다. 목검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뭐 해? 이거 안 쌓아?”코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가운데 블록 하나를 집어 갔다. 여섯째 것이었다. 손안에서 굴려 보더니 목검 끝으로 툭툭 쳤다.루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울지도 않았고, 달려들지도 않았다.블록 줄에 여섯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루엔은 다섯째와 일곱째를 건드리지 않았다. 빈자리를 빈 채로 두었다. 정확히 그 너비만큼.그리고 형을 보았다.빤히.코넬이 목검 치던 손을 멈췄다.“… 뭐.”루엔은 계속 보았다. 빈자리와 형을 번갈아.“뭐냐고.”빈자리. 형. 빈자리. 형.코넬이 블록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빈자리에. 방향까지 맞춰서.“가질 생각 없었어.”그러고는 목검을 끌며 도망치듯 나갔다.복도에서 마르타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쟤 좀 무서워.”“두 살짜리가 뭐가 무서워요, 도련님.”“안 울어. 그냥 봐.”루엔은 여섯째 블록을 손가락 끝으로 조금 밀었다. 반 마디 삐뚤어져 있었다.*이태에 한 번 온다던 순회 마법사는 한 해를 더 늦어, 루엔이 세 살 되던 여름에 왔다.소식이 먼저 왔다. 마법사가 이웃 고을을 지나 하르트령으로 온다고. 노르벡 마을이 들썩였다.순회 마법사는 북부의 작은 영지들을 돌며 일을 했다. 창고의 곡식을 말리고, 꺼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4화. 되가 다르다

네 살 가을, 세금 날이 왔다.아침부터 성 마당이 시끄러웠다. 수레바퀴 소리, 소 울음, 자루 끄는 소리. 노르벡 마을 사람들이 거둔 곡식을 지고 성문으로 들어왔다. 밀, 보리, 귀리. 영주 몫을 내는 날이었다.마당 한가운데 긴 탁자가 놓였다.탁자 앞에는 집사 몰튼이 앉았다. 머리가 벗어진 마른 남자였다. 펜 끝을 잉크에 적시는 손이 빨랐다. 옆에는 셈판이 있었다.탁자 앞에는 나무 되가 하나 놓였다.루엔은 그 되를 오래 보았다.참나무로 짠 둥근 통이었다. 아이 몸통이 들어갈 만큼 컸다. 쇠띠 두 줄이 둘렸다. 오래 써서 나무가 까맣게 윤이 났다. 테두리 한쪽이 닳아 조금 낮았다.하르트 되였다. 이 영지에서 곡식을 재는 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썼다고 했다.농부가 자루를 기울여 되에 곡식을 부었다. 곡식이 되 위로 봉긋 솟으면 몰튼이 장부에 막대 하나를 그었다. 되를 비우고, 다시 붓고, 다시 긋고.“마흔일곱 되, 보리. 겔트네 집.”몰튼이 셈판 돌을 옮기며 불렀다. 겔트라는 농부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루엔은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발끝으로 서 있었다. 네 살이 되니 키가 탁자 높이에 겨우 닿았다.“도련님, 거기 계시면 곡식 먼지 드세요.”마르타가 뒤에서 말렸다. 루엔은 움직이지 않았다.몰튼이 펜을 멈추고 흘끗 보았다.“도련님은 셈 구경이 그렇게 재밌으십니까.”“예.”“허, 참. 형님 되시는 도련님은 이 날만 되면 마구간으로 도망가시는데.”실제로 코넬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목검 소리가 마구간 쪽에서 들렸다.몰튼은 웃으며 다시 막대를 그었다. 루엔은 그 막대의 수를 따라 셌다. 몰튼의 셈과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점심 무렵, 로센령에서 곡물상이 왔다.로센령은 하르트령 남쪽 이웃 영지였다. 하르트령보다 크고 장이 컸다. 해마다 가을이면 로센 상인들이 올라와 영지의 남는 곡식을 사 갔다. 북부의 작은 영지는 곡식을 돈으로 바꿀 데가 마땅치 않았다.곡물상은 도르크라는 남자였다. 배가 나오고 목소리가 좋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5화. 없는 것을 적는 법

가정교사는 첫눈이 오기 사흘 전에 왔다.노새 한 마리에 책 궤짝 하나. 그게 짐의 전부였다.이름은 펠릭스 온. 스물여덟 살이라고 했다. 키가 크고 말랐다. 손가락이 길었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옆에 잉크 얼룩이 배어 있었다. 씻어도 안 빠지는 얼룩이었다.“남쪽 수도원 학교에서 여섯 해 셈과 글을 가르쳤습니다.”펠릭스는 가렛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수도원을 왜 나왔소.”“그건 묻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리. 죄를 지은 건 아닙니다.”가렛은 한참 그를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변경까지 오겠다는 가정교사는 흔하지 않았다.펠릭스의 눈이 가렛 뒤에 선 아이에게 갔다.“이 도련님입니까.”“그렇소.”“몇 살이지요.”“넷.”펠릭스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네 살에게 가정교사를 붙이는 집은 없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었다.루엔은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펠릭스도 루엔을 내려다보았다.누가 먼저 눈을 돌리나, 하는 식이었다.펠릭스가 먼저 웃었다.*첫 수업은 아버지 방에서 했다.펠릭스는 궤짝에서 밀랍판을 꺼냈다. 나무틀에 밀랍을 얇게 바른 판이었다. 뾰족한 막대로 긁어 쓰고, 뭉툭한 끝으로 문질러 지웠다.“도련님,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펠릭스가 밀랍판에 막대 셋을 그었다.“셋입니다.”“이건.”갈래 하나, 막대 하나.“여섯입니다.”“이건.”지붕 둘, 엇갈림 하나, 막대 넷.“이백열넷입니다.”펠릭스가 막대를 멈췄다.“누가 가르쳤습니까.”“아무도 안 가르쳤습니다. 아버지 장부를 봤습니다.”펠릭스가 가렛을 돌아보았다. 가렛은 어깨를 조금 들썩였다. 그런 아이라는 뜻이었다.펠릭스는 밀랍판을 내려놓았다.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도련님, 밖으로 나가지요. 이 판은 도련님한테 좁을 것 같습니다.”*마구간 옆에 모래 마당이 있었다. 기사들이 발 딛기를 익히는 곳이었다. 겨울 앞이라 비어 있었다.펠릭스는 나뭇가지 둘을 주워 하나를 루엔에게 주었다.“양이 삼백팔십칠 마리라고 해 봅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6화. 서른 배

겨루기는 이튿날 아침, 아버지 방에서 했다.구경꾼이 생각보다 많았다.가렛은 책상 뒤에 앉았다. 엘리나는 수틀을 무릎에 얹고 창가에 앉았다. 마르타는 문 옆에 섰다. 집사 몰튼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왔다. 셈이라면 자기 일이라는 얼굴이었다.코넬은 끌려왔다. 목검을 빼앗긴 채였다.“나 이거 왜 봐야 돼.”“동생이 뭘 하는지 알아 두라.” 가렛이 말했다.“쟤 맨날 뭐 세잖아.”“그러니까 알아 두라.”펠릭스는 책상 한쪽에 셈판을 놓았다. 수도원에서 가져온 판이었다. 가렛의 판보다 줄이 두 개 많았다. 나무가 손때로 까맸다.루엔 앞에는 밀랍판 하나와 뾰족한 막대 하나.그리고 둘 사이에 초가 하나 섰다.“수도원에서 쓰던 눈금 초입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기도 시간을 재려고 옆에 금을 그어 둔 초지요. 초가 하나뿐이니 번갈아 하겠습니다. 셈하는 동안만 불을 켜 두고, 답을 말하면 끕니다.”좋은 방법이었다. 루엔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시계는 방 안에서 쓸 수 없고, 교회 종은 너무 성겼다.“문제는 제가 냅니다. 어젯밤에 푼 서른 개 가운데 열 개. 둘 다 같은 문제를 풉니다.”“예.”“답은 나리께서 적어 두십시오.”가렛이 펜을 들었다.*첫 문제는 작았다.“열둘 곱하기 일곱.”초에 불이 붙었다.“여든넷.”펠릭스였다. 셈판에 손도 대지 않았다. 불을 붙인 하인이 손을 떼기도 전이었다.코넬이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이겼다!”루엔 차례에 불이 붙자, 루엔도 곧바로 말했다. “여든넷입니다.”하지만 펠릭스보다 한 숨 늦었다. 밀랍판에 적느라 막대를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작은 수는 셈판이 빠릅니다.” 루엔이 말했다. “셈판이 아니라 선생님 머리가 빠르신 겁니다.”펠릭스가 웃었다. 코넬은 어리둥절했다. 동생이 진 걸 인정하는 걸 처음 보았다.둘째, 셋째 문제도 비슷했다. 펠릭스는 셈판 위로 손가락을 몇 번 튀기고 답을 말했다. 루엔은 조금 늦거나 같았다.몰튼이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끄덕였다. 셈판을 쓰는 사람의 끄덕임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7화. 한 줌의 무게

다섯 살 봄, 루엔은 부엌에 자주 갔다.베르타가 좋아할 리 없었다.“도련님, 여긴 뜨거운 데예요. 불똥 튀어요.”“구석에 있겠습니다.”“구석도 뜨거워요.”루엔은 장작 더미 옆 구석에 앉았다. 베르타는 국자를 들고 한참 노려보다가, 결국 등을 돌렸다. 영주님 아들을 국자로 때릴 수는 없었다. 아직은.루엔이 보는 건 소금이었다.베르타는 저녁 수프를 끓일 때 소금을 한 번 넣었다. 부엌데기 소녀가 소금 단지에서 작은 나무 접시에 소금을 덜어 오면, 베르타가 그걸 한 손에 쥐어 냄비에 뿌렸다.“얼마나 넣습니까.”“한 줌요.”“한 줌은 얼마입니까.”베르타가 돌아보았다. 두꺼운 손을 펴서 보여 주었다.“이만큼요.”그 손이 기준이었다. 베르타의 손. 그런데 그 손은 날마다 같은 만큼 쥐었을까.루엔은 지난 두 주 동안 저녁마다 아버지가 수프를 먹고 물을 몇 잔 마시는지 세 왔다. 한 잔인 날도 있었고, 세 잔인 날도 있었다.수프가 짠 날이 있다는 뜻이었다.그날 저녁에도 루엔은 식탁에서 아버지 잔을 보았다. 가렛이 한 잔을 비웠다. 하인이 채웠다. 가렛이 잔을 들다 멈췄다.“왜 내 잔을 보느냐.”“세고 있습니다.”“무엇을.”“아버지가 물을 몇 잔 드시는지요.”가렛이 잔을 내려다보았다. 엘리나가 고개를 숙이고 빵을 뜯었다. 웃음을 참는 어깨였다.“… 왜.”“수프가 짠 날을 알려고요.”가렛은 잔을 든 채 한참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마셨다. 반 모금만.루엔은 그날을 「두 잔, 둘째 잔은 반」이라고 적었다. 아버지가 일부러 덜 마신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셈에 넣을 방법은 없었다.*재려면 저울이 있어야 했다.아버지 방 선반에 작은 놋쇠 저울이 있었다. 접시 둘이 달린 저울이었다. 가운데 기둥에 가로대가 걸리고, 가로대 양 끝에 접시가 매달렸다. 상인이 은화를 치를 때 무게를 확인하는 데 쓰는 것이었다.추는 큰 것 하나만 남아 있었다. 작은 추들은 할아버지 때 잃어버렸다고 했다.“작은 건 동화로 단다.” 가렛이 말했다. “동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8화. 두 배의 두 배

여름 초입, 코넬이 저녁 식탁에서 일어섰다.열 살이었다. 요즘 부쩍 키가 컸다. 목검도 새로 받았다. 기사들과 아침마다 모래 마당에서 발 딛기를 한다고 했다.“아빠. 제 용돈 말인데요.”가렛이 빵을 떼다 멈췄다. 코넬의 용돈은 한 주에 동화 한 닢이었다.“저 이제 검술 연습을 두 배로 할 거예요. 그러니까 용돈도 두 배로 해 주세요.”“두 닢.”“아니요. 매주 두 배로요. 이번 주 한 닢이면 다음 주 두 닢, 그다음 주 네 닢, 그다음 주 여덟 닢. 연습도 매주 두 배로 늘릴게요.”엘리나가 웃었다. 가렛은 수염을 쓸었다. 아들이 무언가를 셈해서 들고 온 게 기특한 얼굴이었다.“그 정도야.”루엔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아버지. 스무 주 뒤를 셈해 보셨습니까.”가렛이 루엔을 보았다. 이 아이가 이렇게 물으면 대개 좋은 일이 아니었다.“대충 몇십 닢이겠지.”“대충은 셈이 아닙니다.”“……”“내일 아침에 보여 드리겠습니다.”코넬이 동생을 노려보았다. 루엔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이튿날 아침, 성 마당 한쪽에 조약돌 무더기가 줄지어 섰다.루엔과 펠릭스가 새벽부터 개울가에서 주워 온 돌이었다. 펠릭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이제 이런 일에 놀라지 않았다.첫째 무더기는 돌 하나. 둘째는 둘. 셋째는 넷. 넷째는 여덟.여기까지는 무더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코넬이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봐. 별거 없잖아.”다섯째는 열여섯. 여섯째는 서른둘. 일곱째는 예순넷.일곱째부터 돌을 세는 데 시간이 걸렸다. 루엔은 열 개씩 줄을 지어 놓았다. 셀 때 틀리지 않게.여덟째, 백스물여덟. 아홉째, 이백쉰여섯.마당을 지나던 기사들이 발을 멈췄다. 마구간 소년들이 모여들었다.열째, 오백열둘.돌이 모자랐다. 펠릭스가 하인 둘을 데리고 개울가를 두 번 더 다녀왔다. 해가 꽤 올라와 있었다.마구간 소년 하나가 장난으로 아홉째 무더기에 돌을 하나 얹었다. 루엔은 말없이 그 돌을 집어 내려놓았다. 소년이 또 얹었다. 루엔이 또 내려놓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9화. 숲의 마법사

그날 밤, 루엔은 아버지 방 문을 두드렸다.가렛은 촛불 아래서 장부를 보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숲에 사는 사람 말이구나.”루엔은 앉지 않았다. 아버지가 먼저 말할 줄은 몰랐다.“아십니까.”“안다. 열 해 전에 왔다. 청색탑 마법사였다.” 가렛은 펜을 내려놓았다. “숲에 살게 해 달라고 했다. 세금은 없는 대신, 개울이 넘칠 해를 미리 알려 주기로 했지. 그리고 나는 아무도 보내지 않기로 약속했다.”“왜 아무도 보내지 말라고 했습니까.”“묻지 않았다.”펠릭스 때와 같았다. 아버지는 사람의 까닭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 사람이 한 일을 보았다.“약속을 깨시라는 게 아닙니다.”루엔이 말했다.“물어봐 주십시오. 제가 가도 되는지.”가렛은 한참 아들을 보았다. 촛불이 두 번 흔들렸다.“내가 직접 가서 묻겠다. 너도 같이 간다. 문을 열지 말지는 그 사람이 정한다.”*사흘 뒤, 가렛은 작은 수레에 루엔을 태우고 숲으로 들어갔다.숲길은 좁았다. 나무뿌리가 길 위로 불거져 있었다. 개울 소리를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갔다.반쯤 갔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다.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금세 굵어졌다. 흙길이 검게 젖었다.루엔의 손이 수레 난간을 쥐었다.다섯 살의 몸은 한 살 때보다 튼튼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등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빗소리. 젖은 길. 바퀴.루엔은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 와서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무언가를 해 달라는 말.“아버지.”“음.”“비 오면, 천천히 가 주십시오.”가렛은 돌아보지 않았다.“안다.”수레는 이미 느려져 있었다. 사람이 걷는 것보다 느리게. 루엔이 말하기 전부터였다. 첫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부터.루엔은 아버지의 등을 보았다.한 살 여름, 교회에서 돌아오던 빗길. 그날 이 사람은 까닭도 모르고 말을 걷게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네 해 동안, 비가 오는 날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그랬을 것이다. 루엔이 몰랐을 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10화. 파이를 나누는 법

여섯 살 여름, 기사들이 내기를 걸었다.성에서 가장 높은 것은 북쪽 망루였다. 돌로 쌓은 네모난 탑. 꼭대기에서 보면 로센령 쪽 고개까지 보인다고 했다.그 망루가 몇 뼘이냐를 두고 기사들이 저녁마다 다퉜다.“쉰 뼘은 넘지.”“일흔은 될걸.”“내가 저기서 떨어져 봐서 안다. 예순이다.”“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았어.”“짚더미로 떨어졌다.”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둘째 도련님한테 재 보라고 하자. 그 도련님은 뭐든 잰다던데.그 말이 돌고 돌아 결국 내기가 되었다. 루엔이 재는 값과, 성의 늙은 석공 벤노가 말하는 값. 어느 쪽이 맞을지.*벤노는 일흔이 넘은 석공이었다. 손등이 돌처럼 거칠었다. 젊을 때 무너진 망루 윗부분을 다시 쌓은 사람이라고 했다.“예순 뼘 반.”벤노는 망루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말했다.“어떻게 아십니까.” 루엔이 물었다.“내가 쌓았으니까.” 벤노가 코를 풀었다. “밑에서부터 돌이 서른 켜. 켜마다 두 뼘. 맨 위 머릿돌이 반 뼘 더 높고.”루엔은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돌 켜를 세었다. 서른 켜. 맞았다.벤노는 어림한 게 아니었다. 쌓으면서 센 것이었다.그래도 루엔은 자기 방법으로 재 보기로 했다. 망루 꼭대기에 올라가 끈을 늘어뜨리는 건 기사들이 금했다. 내기가 싱거워진다고.재기 전에 루엔이 먼저 물었다.“누구 뼘으로 잽니까.”기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한 기사가 손을 쫙 폈다. 손이 컸다. 다른 기사가 자기 손을 폈다. 조금 작았다.“내 뼘이지.”“자네 손은 솥뚜껑이잖나.”한참 다투다가 결국 벤노의 뼘으로 정했다. 망루를 그 손으로 쌓았으니, 그 손으로 재야 셈이 맞는다는 것이었다. 루엔이 보기에도 그게 옳았다. 같은 자로 재지 않으면 비교할 수가 없다.루엔은 매듭 끈을 꺼냈다. 벤노가 손을 펴 끈 위에 대 주었다. 엄지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 루엔은 그 자리마다 매듭을 지었다. 열 번.“이제 이 끈이 석공님 손입니다.”벤노가 끈을 들여다보았다. 자기 손이 끈이 되는 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PREV
123456
...
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