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첫 고리를 쌓았다는 말은 하루 만에 성 안에 퍼졌다.
퍼뜨린 사람은 펠릭스가 아니었다. 펠릭스는 입이 무거웠다. 오스윈은 성에 내려오지 않았다. 루엔은 말하지 않았다.
코넬이었다.
“쟤 이제 마법사래.”
마구간 소년들에게, 기사들에게, 부엌에. 지난가을 그릇 재는 날 수레 뒤에서 돌멩이를 차던 형이, 이번엔 들고 다니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저녁 식탁에서 루엔에게 말했다.
“그럼 불 켜 봐. 라이트. 셀빈 아저씨가 하던 거.”
“선생님 오두막에서 먼저 합니다.”
“왜.”
“처음 하는 건 아는 사람 앞에서 해야 합니다. 틀리면 어디가 틀렸는지 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코넬은 입을 삐죽였다. “그럼 나도 간다.”
*
눈이 녹기 시작한 날, 셋이 숲으로 올라갔다. 루엔과 펠릭스와 코넬.
길이 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코넬은 오는 내내 목검으로 녹다 만 눈덩이를 쳤다.
오스윈은 문간에서 코넬을 보았다.
“맏이인가.”
“코넬 하르트입니다.” 코넬이 가슴을 폈다.
“텃밭은 밟지 말게.”
오두막 탁자에 넓적한 석판이 놓여 있었다. 오스윈이 그 위에 작은 원진을 그렸다. 손바닥 두 개만 한 원. 안에 선 몇 개.
“라이트일세. 탑에서 첫 고리를 쌓은 아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
오스윈이 먼저 했다. 열한 마디였다. 셀빈과 같은 길이. 다만 더 느렸다.
원진 위에 빛 구슬이 떠올랐다. 호두만 했다. 하얗게 빛났다. 가끔 깜빡였다. 윙 하는 소리가 가늘게 났고, 손을 가까이 대면 따뜻했다.
코넬이 「우와」 하고 입을 벌렸다.
루엔은 마르타의 서른을 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 서른 중간에 빛이 흐려지더니 꺼졌다.
“이게 라이트일세. 자네 차례.”
*
루엔은 컴퍼스를 받아 석판에 새 원진을 그렸다. 같은 크기, 같은 선.
다른 건 원이었다.
선은 같아도, 마나를 그 위에 얹을 때 둘레를 무엇으로 떠올리느냐가 달랐다. 겨울 내내 밀랍판에 적은 그 수. 세 배 하고, 백분의 열넷을 조금 넘게.
영창은 같은 열한 마디.
루엔은 그릇의 삼분의 일쯤을 붓기로 했다. 쯤이라는 말이 걸렸지만, 그릇 안을 눈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첫 고리를 쌓은 뒤 날마다 조금씩 부어 보며 익힌 감이었다.
말했다.
가슴의 고리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손끝을 지나 석판으로. 원진을 따라 한 바퀴.
끝과 처음이 만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이 없었다. 윙 소리도 없었다. 손을 대 보았다. 따뜻하지 않았다.
코넬이 한참 석판을 보다가 말했다.
“… 꺼졌어?”
잠깐 뒤에 스스로 고쳤다.
“아니, 켜지지도 않았네.”
*
루엔은 석판을 보지 않았다. 자기 가슴을 보았다.
비었다. 부은 만큼 정확히. 그릇에서 무언가가 나갔다. 나간 건 틀림없었다.
그러면 어디로 갔나.
“선생님. 화덕 재를 조금 주십시오.”
오스윈이 눈썹을 올렸다. 그래도 화덕에서 식은 재를 한 줌 떠 주었다.
루엔은 석판 위, 원진 한가운데 높이에서 재를 조금씩 흘렸다.
원진 밖으로 떨어진 재는 그냥 떨어졌다. 석판 가장자리에 소복이 쌓였다.
원진 위로 떨어진 재는 멈췄다.
한가운데, 호두만 한 자리에서. 재가 떨어지다 말고 거기 걸렸다. 동그랗게. 더 흘리자 그 둘레로 모여 붙었다. 잿빛 구슬 하나가 석판 위 허공에 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깜빡이지도 않았다.
오스윈이 몸을 숙였다. 물빛 눈이 재 구슬 가까이 갔다.
코넬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루엔은 마르타의 서른을 셌다.
네 번. 오스윈의 빛은 여기서 꺼졌다.
열 번. 스무 번.
재 구슬은 그대로였다.
서른한 번째 서른에서 재가 천천히 흩어지며 떨어졌다. 석판 위에 동그란 잿자국이 남았다.
*
한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오스윈이 허리를 폈다.
“실패다.”
루엔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트는 빛나야 라이트일세. 빛을 내라고 만든 마법이야. 빛이 안 났으면 실패지.”
“성공인데 빛이 안 납니다.”
“빛 안 나는 라이트가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코넬이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이 손가락 사이로 샜다.
오스윈은 웃지 않았다. 석판의 잿자국을 보고, 루엔을 보고, 다시 잿자국을 보았다.
“부은 건 다 갔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원 안에 모양이 섰습니다. 선생님 빛보다 아홉 배 가까이 오래 섰습니다. 흩어진 것도 없습니다. 소리도, 열도 없었습니다. 제가 부은 것은 다 원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이 없지.”
“예.”
“그러니 실패다.”
“그러니 이상한 겁니다.”
오스윈이 입을 닫았다.
그는 석판을 들어 탁자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사흘 쉬세.”
펠릭스가 밀랍판을 챙겼다. 코넬이 먼저 문을 나섰다. 루엔은 마지막으로 나오며 돌아보았다.
오스윈은 탁자 앞에 선 채였다. 치운 석판을 다시 끌어당기고 있었다.
*
사흘 동안 성은 시끄러웠다.
“쟤 불 못 켰어.” 코넬이 말했다. 마구간에서, 부엌에서, 식탁에서. “근데 성공이래.”
“성공이면 됐다.” 가렛이 말했다.
“빛이 안 났다니까요.”
“빛 안 나는 성공도 있겠지.”
가렛은 그 말만 하고 수프를 먹었다. 코넬은 할 말을 잃었다.
엘리나가 루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빛 안 나는 성공은 어떤 거니?”
루엔은 식탁 위를 둘러보았다. 제 자리 앞에 쇠잔이 있었다. 요즘은 어디든 들고 다녔다.
쇠잔에 물을 따랐다.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들어서 제 빈 접시 위로 옮겼다. 천천히.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물을 옮겼습니다.”
“그래.”
“식탁이 안 젖었습니다.”
엘리나가 식탁을 보았다. 마른 나무였다.
“식탁이 젖은 걸 보고 물을 옮겼다고 알던 사람한테는, 제가 아무것도 안 한 걸로 보입니다.”
엘리나는 한참 쇠잔을 보았다. 그러다 가렛을 보았다. 가렛은 수프 숟가락을 든 채 멈춰 있었다. 쇠잔을 보고 있었다.
코넬만 「그러니까 불 못 켰다는 거잖아」 하고 중얼거렸다.
*
그날 밤 루엔은 방에서 한 번 더 해 보았다.
컴퍼스는 없었다. 대신 쇠잔이 있었다. 루엔은 나무판 위에 쇠잔을 엎어 놓고 숯으로 테두리를 따라 그렸다. 아버지가 고르게 둥글게 간 테두리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원이 나왔다. 그 안에 오두막 석판에서 본 선을 옮겨 그었다.
이번엔 일부러 틀리게 했다.
둘레를 세 배로 떠올렸다. 탑에서 가르치는 대로. 영창도 오스윈에게 배운 그대로, 열한 마디.
원이 한 바퀴 돌다가 처음 자리 바로 앞에서 튀었다.
번쩍.
나무판 위에 빛 구슬이 떴다. 오스윈 것의 반도 안 되는 크기. 떨렸다. 깜빡였다. 가늘게 윙 소리가 났다. 손을 대니 미지근했다.
마르타의 서른을 한 번 세기도 전에 꺼졌다.
“켰잖아!”
문틈에 코넬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너 켤 줄 알잖아. 근데 왜 선생님 앞에선 안 켰어?”
“틀리게 하면 켜집니다.”
코넬이 문을 반쯤 연 채 굳었다.
“… 뭐?”
“제대로 하면 안 켜집니다. 틀리게 하면 켜집니다. 둘 다 해 봐야 어느 쪽이 틀린지 압니다.”
코넬은 한참 동생을 보았다. 나무판을 보고, 쇠잔을 보고, 다시 동생을 보았다.
“너 진짜 이상해.”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조금 뒤, 멀리서 코넬이 마르타에게 「쟤 일부러 틀리게 하면 불 켜진대」라고 이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엔은 나무판 위 그을린 자국을 보았다. 매듭 자리. 원이 처음 자리를 만나기 직전의 그 한 점.
빛은 거기서 났다.
*
이튿날 펠릭스가 혼자 숲에 다녀왔다. 텃밭 씨앗을 전하러 갔다.
돌아와서 말했다.
“문을 안 여셨습니다. 씨앗은 문간에 두고 왔습니다.”
“안에 계셨습니까.”
“계셨습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시더군요. 창틈으로 보니 탁자에 종이가 가득했습니다. 원이 수십 개.”
펠릭스는 잠깐 말을 골랐다.
“그리고 석판에 재 자국이 여럿 있었습니다. 도련님 것보다 많이.”
루엔은 수첩을 폈다가 덮었다.
사흘째 저녁, 오스윈의 오두막 쪽 숲에서 까마귀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고 마구간 소년이 말했다. 그게 오스윈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
나흘째 아침, 루엔과 펠릭스는 해 뜨자마자 올라갔다.
오두막 덧창이 전부 닫혀 있었다. 낮인데.
문 앞까지 갔을 때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었다.
낮고 쉰, 늙은 사람의 웃음. 한 번 터지고 멎더니 다시 터졌다. 길게.
펠릭스가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기다렸다.
루엔은 버릇대로 셌다. 웃음은 마르타의 서른 두 번 동안 이어졌다. 멎었다가, 한 번 더 짧게.
문이 열렸다.
오스윈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웃다가 나온 물기였다. 흰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사흘 동안 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뒤로 오두막 안이 보였다.
캄캄했다. 덧창 틈으로 가는 빛줄기 몇 개만 들어왔다. 바닥에 원이 그려져 있었다. 루엔의 원이었다. 루엔이 적은 수로, 오스윈이 다시 그린.
그 위 허공에 재 구슬이 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금도 빛나지 않고.
“어두운 데서 보면,” 오스윈이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조금은 보일 줄 알았네. 빛이 약해서 낮에 안 보였을 뿐이라고. 그래서 덧창을 다 닫았지.”
그는 재 구슬을 돌아보았다.
“하나도 안 보이네.”
그리고 또 웃었다. 이번엔 짧게.
“쉰 해를 마법을 했네. 빛이 안 나서 웃어 보긴 처음일세.”
루엔은 문간에 선 채 재 구슬을 보았다. 오스윈이 그린 원이었다. 오스윈의 그릇이었다. 그런데도 빛나지 않았다.
아이의 손 탓이 아니었다. 원 탓이었다.
“선생님도 성공하셨습니다.”
“그래. 빛 안 나는 성공.”
오스윈은 덧창 하나를 열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재 구슬이 그 빛 속에서 잿빛으로 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스윈은 햇빛을 한참 보았다. 웃음이 얼굴에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럼,” 그가 말했다. “우리가 쉰 해 동안 본 건 무엇이었나.”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있었다. 하지만 오스윈이 스스로 닿아야 하는 답이었다.
오스윈이 돌아보았다.
“내일 오게. 해 나는 날에. 이번엔 자네가 하지 말고, 내 영창을 재게.”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