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기는 가늘었다. 금방 사라졌다.
루엔은 유리 조각을 든 손을 조금 내렸다. 밝은 점이 커지면서 흐려졌다. 조금 올렸다. 점이 작아지고 눈이 아플 만큼 밝아졌다.
더 올렸다. 다시 커지고 흐려졌다.
가장 작고 가장 밝은 자리가 있었다. 창턱에서 손가락 네 마디 높이. 거기서 벗어나면 점은 번지고, 연기는 나지 않았다.
루엔은 창턱의 까만 점을 손끝으로 쓸었다. 가루가 묻어났다.
누가 불을 놓은 게 아니었다. 해가 놓았다. 유리가 해를 한 점으로 모았을 뿐이었다.
*
부엌 뒷마당에서 루엔은 마른 짚 한 줌을 돌바닥에 놓았다.
유리 조각을 네 마디 높이에 들었다. 밝은 점이 짚 위에 맺혔다.
부엌데기 소녀가 물동이를 들고 지나가다 멈췄다. 무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요즘 이 도련님이 하는 일에는 묻지 않는 게 낫다는 걸 부엌 사람들은 알았다.
짚 한 올이 까매졌다. 연기가 피었다. 루엔이 입김을 살짝 불었다.
작은 불꽃이 올라왔다.
소녀가 물동이를 떨어뜨렸다. 물이 돌바닥에 쏟아졌다. 반은 짚 쪽으로 흘러와서 불이 꺼졌다.
“베르타 아주머니!”
베르타가 국자를 들고 나왔다. 젖은 짚과 유리 조각과 루엔을 차례로 보았다.
“불씨도 없이요?”
“해가 불씨입니다.”
베르타는 한참 유리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국자를 내렸다.
“그거 해 나는 날만 되지요.”
“예.”
“비 오는 날이랑 밤엔 안 되고.”
“안 됩니다.”
“그럼 부싯돌은 그대로 둬야겠네요.” 베르타가 돌아섰다. 그러다 멈췄다. “여름 한낮에 화덕 불 다시 살릴 때는 좀 빌려 쓰겠어요.”
루엔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베르타는 한 번 보고 쓸 데와 못 쓸 데를 갈랐다. 삼십 년 부엌을 본 사람이었다.
*
열흘 뒤에 봄 점호가 있었다. 루엔이 일곱 살이 된 이튿날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가렛은 성의 기사와 병사를 전부 성 마당에 세웠다. 몰튼이 장부를 들고 이름을 불렀다. 그다음 행진을 했다. 겨우내 굳은 다리를 푸는 날이었다.
루엔은 펠릭스와 성벽 위에서 보았다.
행진은 대열을 바꿔 가며 했다. 셋씩 한 줄. 다섯씩 한 줄. 일곱씩 한 줄. 기사장이 외칠 때마다 병사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섰다. 줄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맨 뒤에 따로 섰다.
루엔은 맨 뒤를 보았다.
셋씩 섰을 때 맨 뒤에 두 명. 다섯씩 섰을 때 세 명. 일곱씩 섰을 때 네 명.
루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 장부엔 몇 명입니까.”
“쉰둘이라고 들었습니다. 몰튼 집사가 아침에 그렇게 부르던데요.”
“쉰둘이면 셋씩 설 때 한 명이 남아야 합니다. 다섯씩이면 둘, 일곱씩이면 셋.”
펠릭스가 손가락을 접어 셈했다. 끄덕였다.
“그런데 두 명, 세 명, 네 명이 남았습니다. 셋 다 하나씩 더 남았습니다.”
“그러면.”
“쉰셋입니다.”
루엔은 성벽 아래로 소리쳤다.
“아버지! 한 명 늘었습니다!”
*
가렛이 손을 들었다. 행진이 멈췄다.
몰튼이 장부를 폈다. 기사장이 줄을 따라 걸으며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맨 뒷줄 끝에서 멈췄다.
투구가 너무 컸다. 눈썹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아래 얼굴이 열두 살쯤이었다. 창 대신 빗자루 자루를 들고 있었다.
“이름.”
“… 한스입니다.”
부엌 쪽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한스! 이놈!”
베르타였다. 국자를 든 채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누나 아들이에요, 나리. 지난달에 마을에서 올라와서 부엌일 거들라고 했더니—”
한스는 투구를 쓴 채 뒷걸음질 쳤다. 기사장이 뒷덜미를 잡았다. 국자가 투구를 쳤다. 텅, 하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가렛이 다가왔다.
“오늘 행진은 제대로 했느냐.”
한스가 투구 아래로 눈을 굴렸다.
“… 예. 셋씩, 다섯씩, 일곱씩 다 섰습니다.”
“맨 뒤에 섰더구나.”
“자리가 없어서요.”
가렛은 수염을 쓸었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내일부터 마구간에서 물 긷는 일을 해라. 부엌 일이 끝난 다음에. 여름까지 버티면 기사들 창을 닦게 해 주마.”
베르타는 국자를 든 채 입을 벌렸다. 한스는 투구를 벗어 끌어안았다.
몰튼이 장부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쉰셋. 그리고 장부를 덮었다. 조금 빨리.
루엔은 성벽 위에서 그걸 보았다. 장부가 덮이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
오두막에서 루엔은 유리 조각을 오스윈 앞에 내놓았다.
오스윈은 햇빛 아래서 마른 이끼에 불을 붙여 보았다. 두 번. 세 번째엔 네 마디 높이를 루엔보다 먼저 찾았다.
“이건 마법이 아니네.” 오스윈이 말했다. “마나가 한 방울도 안 들었어.”
“예. 마법이 아닙니다.”
루엔은 순순히 인정했다. 오스윈이 조금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 지난번 재 구슬을 기억하십니까.”
“잊을 수가 있나.”
“원 안에 동그란 모양이 섰습니다. 빛은 안 났지만, 모양은 섰습니다. 재가 거기 걸렸습니다.”
루엔은 텃밭 가의 물 대야를 보았다.
“그 모양에 재 대신 물을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스윈이 루엔을 보았다. 대야를 보았다. 유리 조각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
석판에 루엔의 원을 그렸다. 빛 안 나는 라이트의 원.
루엔이 영창을 했다. 열한 마디. 원 위에 아무것도 없는 동그란 자리가 섰다. 보이지 않았다. 오스윈이 재 한 줌 대신 물을 한 국자 떠서 그 자리에 천천히 흘렸다.
물이 떨어지다 멈췄다.
동그랗게 모였다. 허공에 호두만 한 물방울 하나가 떠 있었다. 맑았다. 햇빛이 그 안을 지나가며 반짝였다.
루엔은 석판 옆에 마른 이끼를 놓았다. 물방울과 이끼 사이를 조금씩 벌렸다.
이끼 위에 밝은 점이 맺혔다.
유리 조각의 점보다 흐렸다. 가장자리가 번졌다. 물방울이 조금씩 떨렸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둥글지도 않았다. 아래쪽이 아주 조금 처졌다.
루엔은 셌다. 유리 조각은 마르타의 서른 두 번 만에 연기를 냈다.
물방울은 여섯 번이 걸렸다.
여섯 번째 서른 끝에서 이끼 한 올이 까매졌다. 연기가 피었다.
번쩍임은 없었다. 윙 소리도 없었다. 원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했다.
불만 났다.
*
오스윈이 이끼의 까만 자국을 오래 보았다.
“이건 마법인가.”
“물을 든 건 마법입니다. 불을 붙인 건 해입니다.”
“그럼 불은 마법이 아니고.”
“예.”
“그런데 마법이 없었으면 불도 없었지.”
“예.”
오스윈이 이마를 짚었다.
펠릭스가 구석에서 밀랍판을 든 채 말했다.
“반쯤 마법인 거지요.”
“반은 부정확합니다.”
루엔과 오스윈이 동시에 말했다. 셋이 서로를 보았다. 펠릭스가 먼저 웃었다. 오스윈은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마나가 한 일과 해가 한 일은 따로 셀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마나는 물 한 국자를 들었습니다. 그릇의 아주 조금입니다. 불은 해가 한 만큼입니다.”
오스윈이 웃음을 거두었다.
“탑에서 불을 붙이려면 파이어 볼트 스물세 마디일세.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부어서.”
“이건 물 한 국자입니다.”
“그래.” 오스윈이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그릇에 맞는 불이군.”
루엔은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셈해 보았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스윈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로 보아 칭찬 쪽에 가까웠다.
“다만 오늘 건 흐렸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물이 떨렸고, 아래가 처졌습니다. 유리보다 세 배 늦었습니다. 모양을 더 정확히 잡아야 합니다.”
“세 배.”
“예. 정확히 세 배입니다.”
오스윈은 결국 웃었다. 이번엔 소리 내어.
“탑에서라면 이름부터 길게 붙였을 걸세.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일으키는 물의 술식. 그쯤으로.”
“해 모으기가 짧습니다. 그리고 그쯤은 얼마만큼입니까.”
“그만 하게.” 오스윈이 손을 내저었다. “짧은 이름은 탑에서 안 받아 주네.”
“탑에 가져가지 않으면 됩니다.”
오스윈의 웃음이 멈췄다. 루엔을 보았다. 그러다 다시, 조금 작게 웃었다.
*
오스윈이 직접 해 보겠다고 했다.
처음엔 탑에서 배운 대로 했다. 둘레를 세 배로, 반 박자 쉼을 넣어서.
물방울이 섰다. 그런데 매듭 자리에서 번쩍, 하고 튀었다. 물방울이 부르르 떨었다. 이끼 위의 점이 크게 번져 흐릿한 얼룩이 되었다. 마르타의 서른 열 번을 기다려도 연기는 나지 않았다.
“번쩍임이 해를 가리는군.” 오스윈이 중얼거렸다. “흘린 빛이 모은 빛을 망쳐.”
두 번째엔 루엔의 수로 원을 다시 그렸다. 세 배 하고, 백분의 열넷을 조금 넘게. 쉼 없이.
물방울이 조용히 섰다. 루엔 것보다 둥글었다. 아래가 처지지 않았다. 오스윈이 물을 흘리는 손이 루엔보다 훨씬 고르게 느렸기 때문이었다. 이끼 위의 점이 작고 또렷했다.
마르타의 서른 네 번 만에 연기가 났다.
루엔은 밀랍판에 적었다. 여섯, 넷.
“선생님 것이 더 둥급니다.”
“쉰 해 물을 든 손일세.” 오스윈이 말했다. 목소리에 조금 자랑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 석판 위의 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 원이 없었으면, 쉰 해 든 손으로도 연기 한 줄 못 냈네.”
그는 첫 번째 얼룩과 두 번째 까만 점을 나란히 보았다. 한참.
*
그날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 루엔은 잊고 온 쇠잔을 가지러 오두막에 다시 들어갔다.
오스윈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종이 묶음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선반에 있던 묶음이었다. 푸른 끈이 옆에 놓여 있었다. 끈 한쪽 끝이 칼로 자른 듯 반듯했다.
종이에는 원이 그려져 있었다. 원 둘레 한 점에 작은 표시. 그 옆에 빼곡한 글씨.
오스윈이 고개를 들었다. 루엔을 보았다.
그는 묶음을 뒤집어 덮었다. 서두르지는 않았다. 다만 망설이지도 않았다.
“오래된 걸세.”
그 말뿐이었다.
루엔은 탁자 모서리에 놓인 쇠잔을 집었다. 인사를 하고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한 번 돌아보았다. 오스윈은 뒤집은 묶음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창밖의 햇빛을 보고 있었다.
오래된 판입니다. 펠릭스가 셈판을 궤짝에 넣으며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했다.
루엔은 숲길을 내려오며 종이 위에 본 것을 다시 떠올렸다. 원 둘레 한 점에 찍힌 작은 표시. 그 옆의 빼곡한 글씨.
표시가 찍힌 자리는 매듭 자리였다.
끝이 처음을 만나는 곳. 늘 튀는 곳. 루엔이 오기 훨씬 전에, 누군가 거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