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틀린 사람은 루엔이었다.
그걸 알아낸 건 새벽이었다. 촛불이 세 자루째 바닥에 닿을 무렵이었다.
*
일은 여름 결산에서 시작되었다.
해마다 한여름이면 몰튼이 반년 치 장부를 가렛 앞에 펼쳤다. 들어온 것, 나간 것, 남은 것. 몰튼은 옛 글자로 적고 셈판으로 셈했다. 막대, 갈래, 엇갈림, 지붕. 한 줄에 글자가 열 개씩 늘어섰다.
올해는 가렛이 한 가지를 더 시켰다.
“루엔. 몰튼 장부를 네 글자로 한 벌 옮겨라. 그걸로도 셈해 보자.”
몰튼은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한마디 했다.
“제 셈판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나리.”
“그러니 두 벌이 같게 나오겠지.” 가렛이 말했다.
루엔은 사흘 동안 옮겨 적었다. 몰튼의 한 줄을 루엔의 글자로 바꾸면 한 줄이 서너 글자로 줄었다. 둥근 글자, 매듭 같은 글자, 꺾인 글자. 자리대로 세우니 더하기는 금방이었다.
나흘째 저녁, 반년 치 남은 돈이 나왔다.
몰튼 장부와 1동화가 달랐다.
루엔 쪽이 1동화 적었다.
*
가렛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동화면 됐다. 내일 보자.”
“예.”
루엔은 방으로 돌아가 다시 밀랍판을 폈다.
처음엔 제 더하기를 의심했다. 한 장씩 다시 더했다. 맞았다. 그다음은 몰튼 장부를 의심했다. 몰튼의 줄을 한 줄씩 셈판으로 다시 놓아 보았다. 셈판은 몰튼만큼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맞았다.
둘 다 맞는데 1동화가 달랐다.
그렇다면 옮겨 적은 자리였다. 몰튼의 줄과 루엔의 줄 사이. 스무 장 넘는 장부, 줄로는 사백 줄이 넘었다.
루엔은 첫 줄부터 다시 맞대기 시작했다.
마르타가 한 번 문을 열었다. “도련님, 초가—”
“새 초를 주십시오.”
마르타는 한숨을 쉬고 새 초를 가져왔다. 엘리나가 한 번 왔다. 침대 끝에 앉았다가, 루엔이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자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갔다.
자정이 지나 문이 또 열렸다. 코넬이었다. 잠옷 바람에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아직도 그 1동화야?”
“예.”
코넬은 하품을 하며 방으로 들어와 탁자 위에 무언가를 탁 놓았다. 동화 한 닢이었다.
“여기 1동화. 됐지. 자.”
루엔은 동화를 보았다. 탑 무늬였다. 로센 동화. 조금 가벼운.
“이건 다른 1동화입니다.”
“1동화가 1동화지.”
“장부의 1동화는 어디서 빠졌는지 모르는 1동화입니다. 이건 형 주머니에서 나온 걸 압니다.”
코넬은 한참 동생을 내려다보다가 동전을 도로 집어 갔다. 문간에서 한마디 했다.
“넌 진짜 이상해.”
문이 닫혔다. 루엔은 그 말을 셈에 넣지 않았다. 다만 형이 동전을 들고 왔다는 것은 기억해 두었다.
잠깐, 밀랍판 귀퉁이에 몰튼의 이름을 적었다. 몰튼이 틀렸을지도 몰랐다. 루엔은 그 이름을 오래 보다가 문질러 지웠다. 몰튼의 줄은 방금 다시 셈해서 맞았다. 맞은 걸 의심하는 건 셈이 아니었다. 틀린 곳을 찾기 전에 사람 이름부터 적는 건 더더욱.
사백 줄을 하나씩 맞대는 건 느렸다. 한 줄 볼 때마다 몰튼의 글자를 머릿속에서 다시 셈해야 했다. 지붕 둘, 갈고리, 엇갈림 셋, 갈래, 막대 하나.
밤이 반쯤 지났을 때 루엔은 멈췄다.
이건 느린 길이었다. 느린 길은 틀리기 쉬웠다. 틀린 걸 찾다 또 틀리면 그날 밤은 끝이었다.
빠른 길이 있었다. 전생에 초등학교 교실에서 배운, 거의 잊고 있던 것.
어떤 수든 자리마다 숫자를 다 더하고, 더하다 아홉이 되면 버린다. 끝에 남는 것은 한 자리. 이걸 수마다 해 둔다. 더할 수들에서 남은 것끼리 모아 또 아홉을 버린 값은, 다 더한 합에서 남은 값과 같아야 한다. 다르면 어딘가 틀린 것이다.
1동화가 틀렸으면, 틀린 장에서 남는 것이 하나 어긋난다.
몰튼의 옛 글자에도 이걸 쓸 수 있었다. 엇갈림은 열, 아홉을 버리면 하나. 지붕은 백, 아홉을 버리고 또 버리면 역시 하나. 갈래는 다섯, 갈고리는 쉰이니 버리고 나면 다섯. 글자 모양만 세면 되었다. 값을 다시 셈할 필요가 없었다.
몰튼은 장마다 합을 적지 않았다. 셈은 셈판 위에서 흘러가고, 종이에는 반년 치 끝의 합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을 가르려면 이 길밖에 없었다.
루엔은 장마다 남는 수를 셈했다. 몰튼의 장과 제 장을 나란히. 한 장에 숨 몇 번이면 되었다.
열네 번째 장에서 어긋났다.
그 장에서만 줄을 맞댔다. 스물두 줄. 열아홉 번째 줄.
몰튼의 글자는 엇갈림 둘, 갈래, 막대 둘. 스물일곱.
루엔이 적은 것은 스물여섯이었다.
막대 하나를 빠뜨렸다. 몰튼은 막대를 붙여 쓰는 버릇이 있었다. 둘이 하나처럼 보였다. 루엔은 그걸 보고 하나로 적었다.
루엔은 밀랍판을 내려놓았다.
창밖이 파랬다.
*
잠이 오지 않아 창가에 섰다.
성 마당에 기사들이 모이고 있었다. 가렛은 기사들에게 「해 뜰 무렵」 모이라고 했다. 해는 이제 막 동쪽 벽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기사 하나가 왔다. 조금 뒤 둘이 같이 왔다. 한참 뒤 하나. 또 한참 뒤, 머리를 긁으며 하나.
같은 「해 뜰 무렵」이 사람마다 달랐다.
루엔은 모래 마당에 세워 둔 막대를 보았다. 그림자 재기에 쓰던 여섯 뼘 막대였다. 해가 뜨면 그림자가 서쪽으로 길게 누웠다. 해가 오를수록 짧아지고 돌아갔다.
그림자 끝이 가리키는 자리에 금을 그어 두면, 그게 시각이었다.
*
아침 식탁에서 루엔이 먼저 말했다.
“1동화는 제가 틀렸습니다. 몰튼 집사 장부가 맞습니다. 열네 번째 장 열아홉 번째 줄, 스물일곱을 스물여섯으로 옮겼습니다.”
가렛이 빵을 든 채 루엔을 보았다. 눈 밑이 거뭇한 여덟 살짜리를.
“1동화 때문에 밤을 샜냐.”
“1동화라서 샜습니다.”
코넬이 수프를 뿜을 뻔했다. 엘리나가 입을 가렸다. 펠릭스는 고개를 숙였는데 어깨가 흔들렸다.
가렛은 웃지 않았다. 빵을 다 씹고 나서 말했다.
“몰튼에게 네가 직접 말해라.”
*
몰튼은 루엔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제 셈판은 틀린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 틀린 건 저였습니다.”
몰튼이 조금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짧게.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사백 줄을 밤새 다 맞대셨습니까.”
“아닙니다. 아홉을 버렸습니다.”
루엔은 설명했다. 자리마다 더하고, 아홉이 되면 버리고, 남은 것끼리 맞대는 것. 장마다 해 보면 어느 장이 틀렸는지 먼저 나온다는 것.
펠릭스가 옆에서 밀랍판에 받아 적었다. 몇 번 해 보더니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몰튼은 듣고만 있었다.
“그건 도련님 글자로만 되겠군요.” 몰튼이 말했다. “자리가 있어야 자리마다 더하지요.”
“옛 글자로도 됩니다. 엇갈림은—”
“하나.” 몰튼이 먼저 말했다.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짧게 움직였다. “열에서 아홉을 버리면 하나. 지붕도 하나. 갈고리는… 다섯.”
루엔이 말을 멈췄다. 몰튼은 설명의 절반만 듣고 나머지를 스스로 채웠다. 셈판을 서른 해 두드린 손가락이었다.
“예. 그리고 못 찾는 것도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열일곱을 일흔하나로 적으면, 남는 것이 같습니다. 자리를 바꿔 적은 건 못 잡습니다.”
펠릭스가 적던 손을 멈췄다. 몰튼이 루엔을 보았다.
“제 약점까지 말씀하십니까.”
“말하지 않으면, 이걸 믿고 그걸 놓칩니다.”
몰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셈판을 옆구리에 끼고 인사를 한 뒤 나갔다.
펠릭스는 그날 오후 내내 밀랍판에 수를 적고 아홉을 버렸다. 제 기억 속의 긴 셈들을 하나씩 꺼내 보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손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수도원 장부에 이게 있었으면—”
거기서 말이 끊겼다. 펠릭스는 고개를 젓고 다시 적기 시작했다. 루엔은 묻지 않았다. 아직은, 이라고 했었다.
*
그 주 내내 루엔은 새벽마다 창가에 섰다.
밀랍판에 날마다 적었다. 모래 마당 막대 그림자의 금과, 그 금을 지날 때 들어온 기사의 이름.
닷새가 쌓이자 표가 되었다. 늘 첫 금 전에 오는 기사가 넷. 늘 셋째 금을 넘겨 오는 기사가 둘. 그 둘 가운데 하나는 루엔 방 쪽 성벽 밑에 산다는 기사였다.
루엔은 표를 가렛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창가 탁자 위에 펴 두기만 했다.
엿새째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기사들이 루엔 방 창 밑을 지날 때만 걸음이 빨라졌다. 창을 지나고 나면 다시 느려졌다. 셋째 금을 넘기던 기사는 창 밑을 거의 뛰어서 지나갔다.
코넬이 모래 마당에서 그걸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너 창문에 무슨 짓 했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적기만 했습니다.”
“그게 무슨 짓이야.”
이레째, 셋째 금을 넘기던 기사가 둘째 금에 들어왔다. 루엔은 그 이름 옆에 작게 표시했다. 고침.
그날 저녁 가렛이 루엔 방에 들렀다. 드문 일이었다. 창가 탁자의 밀랍판을 들어 한참 보았다. 기사 이름과 그림자 금.
“해 뜰 무렵이 이렇게 길었나.” 가렛이 말했다.
“가장 이른 사람과 가장 늦은 사람 사이가, 막대 그림자로 두 뼘입니다.”
가렛은 밀랍판을 내려놓았다. 이튿날부터 기사들을 부르는 말이 바뀌었다. 해 뜰 무렵이 아니라, 해가 동쪽 벽을 다 넘을 때. 기사들은 동쪽 벽을 보며 모였다. 늦는 기사가 하나 줄었다.
루엔 방 창 밑을 빨리 지나가는 버릇은 그 뒤로도 남았다.
*
장부는 가렛이 두 벌 다 거두어 갔다. 루엔이 옮긴 한 벌에는 열네 번째 장에 고친 자국이 있었다. 루엔은 지우지 않았다. 고친 걸 지우면 고친 줄 모르게 된다.
그런데 루엔은 옮겨 적는 사흘 동안 본 줄 하나를 잊지 못했다.
겨울 석 달, 병사 몫. 보리와 동화. 몰튼의 글자로 한 줄씩.
갈고리 하나, 막대 셋. 쉰셋.
석 달 내내 쉰셋이었다.
봄 점호 날 몰튼이 부른 이름은 쉰둘이었다. 지난해 봄에도, 올봄에도. 지난해 점호에서 쉰셋째로 줄 끝에 선 건 한스였다. 투구가 큰, 빗자루 자루를 든.
한스는 병사가 아니었다. 마구간 물을 긷고 기사 창을 닦는 아이였다. 병사 몫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셈은 맞았다. 쉰셋 몫을 적었고, 쉰셋 몫이 나갔다. 들어온 것과 나간 것이 끝자리까지 같았다. 아홉을 버려도 어긋나는 장은 없었다.
루엔은 그 줄을 밀랍판 귀퉁이에 옮겨 적었다.
셈이 맞는다고 장부가 맞는 건 아니었다.
겨울에 쉰셋째 몫을 받은 사람은 누구였나.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