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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휘어진 막대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2:38

둘째 고리도 빛나지 않았다.

여덟 살 봄, 생일을 보름 넘긴 날이었다. 오스윈은 루엔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있다가 뗐다.

“닫혔네. 둘째도.”

“예.”

“탑에선 여덟 살에 둘째 고리를 쌓으면 이르다고들 하지.” 오스윈이 말했다. “그릇 아홉짜리가 쌓는 건 본 적이 없고.”

둘째 고리는 첫째 고리 위에 겹쳐 앉았다. 오스윈의 영창대로라면 두 고리가 맞닿는 자리가 둘 생겼다. 탑에서는 그 두 자리를 「쌍매듭」이라고 부르며 반 박자씩 두 번 눌렀다.

루엔은 누르지 않았다. 두 고리가 어디서 만나는지, 고리 위의 자리를 먼저 셈해 두었다. 동쪽에서 몇째, 위에서 몇째. 만나는 자리를 알면 튈 까닭이 없었다.

오스윈은 그 셈을 적은 밀랍판을 오래 보았다. 줄과 칸이 그어져 있었다.

“이건 지도 같군.”

“자리에 이름을 붙인 겁니다. 이름이 있으면 찾을 수 있습니다.”

오스윈이 밀랍판을 돌려주었다. 선반의 푸른 끈 묶음 쪽은 보지 않았다. 요즘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루엔은 그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

사흘 뒤 저녁, 로센령에서 편지가 왔다.

가렛이 식탁에서 봉인을 뜯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읽고 펠릭스에게 넘겼다. 펠릭스가 소리 내 읽었다.

로센 영주의 인사. 쇠 되를 광장에 건 일은 들었다. 좋은 뜻인 줄 안다. 다만 되를 정하는 것은 왕의 일이다. 한 영지가 제 되를 쇠로 굳히면 이웃 영지는 그것을 따르라는 말로 듣는다. 로센 장터에서는 로센 되를 쓴다. 로센 상인도 하르트령에서 로센 되를 쓸 것이다.

펠릭스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왕도에도 되가 있긴 하지요. 다만 왕도 밖에서 그걸 쓰는 영지는 거의 없습니다.”

“로센 되가 하르트 되보다 크니까요.” 루엔이 말했다. “열 되가 열한 되 하고 조금.”

“그러니 저쪽은 바꿀 까닭이 없지.” 가렛이 빵을 뜯었다. “살 때는 큰 되로 사고 팔 때는 작은 되로 판다. 도르크는 웃으면서 그걸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광장에선 우리 되로 한다.” 가렛이 말했다. “로센 되를 들고 오는 사람은 쇠 되에 대 보면 된다. 대 보는 건 막지 않겠지.”

루엔은 그 말을 셈해 보았다. 쇠 되를 모두가 쓰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구든 대 볼 수는 있었다. 대 볼 수 있으면 속이기가 어려워진다.

한 걸음이었다. 모자랐지만, 한 걸음이었다.

*

방앗간은 개울 아래쪽에 있었다.

주인 토빈은 얼굴이 둥글고 눈이 작았다. 늘 밀가루를 뒤집어써 눈썹이 하얬다. 셈이 빨랐다. 마을 사람 절반의 방앗삯을 외우고 있었다. 방앗삯은 빻는 곡식에서 되로 떼어 받았다. 스무 되에 한 되.

루엔이 방앗간에 간 건 핌 때문이었다.

“쇠 되로 깎은 뒤로 방앗삯이 더 나가는 것 같다니께요.” 핌이 말했었다. “느낌이지요. 셈은 못 하니께.”

방앗간 한쪽 벽에 되가 걸려 있었다. 브란이 만든 쇠 되를 흉내 낸 나무 되였다. 그 옆에 깎기 막대가 있었다. 나무였다. 반들반들하게 깎은.

“광장 쇠 막대는 사슬에 묶였잖소.” 토빈이 먼저 말했다. 루엔이 묻기도 전이었다. “방앗간까지 끌고 올 수가 있나. 그래서 똑같이 깎아 두었지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광장 되를 방앗간마다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잠깐 빌리겠습니다.”

루엔은 나무 막대를 방앗간 바닥의 맷돌 받침돌 위에 눕혔다. 넓고 평평한 돌이었다. 손바닥으로 굴렸다.

덜컹. 덜컹. 덜컹.

막대가 구르다 한 바퀴마다 한 번씩 튀었다.

토빈의 작은 눈이 조금 커졌다.

루엔은 막대를 들어 한쪽 눈을 감고 끝에서 끝을 보았다. 가운데가 아주 조금 떠 있었다. 손톱 두께도 안 되었다. 그런데 떠 있는 쪽이 늘 위를 보게 되어 있었다. 손으로 잡는 자리에 칼로 판 홈이 있었다. 그 홈을 쥐면 가운데가 들렸다.

가운데가 들린 막대로 깎으면, 되 한가운데에 보리가 조금 남았다. 작은 봉우리가.

루엔은 벽의 나무 되에 보리를 담아 두 번 깎아 보았다. 한 번은 휜 막대로, 한 번은 막대를 뒤집어 들린 쪽이 아래로 가게. 두 번의 차이를 쇠잔으로 떠 보았다.

반 잔이었다.

“반 잔이오. 반 잔.” 토빈이 말했다. “방앗삯 한 되에 반 잔.”

“한 해에 방앗삯은 몇 되입니까.”

“삼백 되 남짓.” 토빈이 곧바로 말했다. 그러다 입술이 잠깐 움직였다. 셈이 끝난 얼굴이었다. “… 세 되 조금 넘는구먼.”

루엔이 셈한 것도 같았다. 이 사람은 셈판 없이도 빨랐다.

“어떻게 알았냐.” 토빈이 말했다. 반말이 튀어나왔다가 「—습니까」 하고 뒤늦게 붙었다.

“굴러가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대장장이 브란이 가르쳐 줬습니다.”

토빈은 한참 막대를 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밀가루가 눈썹에서 떨어졌다.

“나무는 마르면 휩니다. 도련님.”

“예. 나무는 마르면 휩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런데 늘 방앗삯 쪽으로만 휘었습니다.”

토빈이 입을 다물었다. 방앗간 안에서 물레바퀴 도는 소리만 났다.

“… 휜 쪽이 제 편이었구먼.” 토빈이 말했다. 고개를 긁었다. “이 막대는 아버지 적부터 그랬소. 아버지 되도 그랬고.”

그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원래 그렇다. 루엔은 수첩에 적을 뻔했다.

그날 가렛은 토빈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대신 브란에게 쇠 막대를 하나 더 만들게 했다. 방앗간용으로. 다 만든 막대는 광장 쇠 막대 옆에 나란히 놓고 굴려 보고, 서로 맞대 틈이 없는지 본 다음 토빈에게 넘겼다.

“복사한 막대는 광장 막대에 대 봐야 한다.” 가렛이 말했다. “대 보지 않은 복사는 복사가 아니다.”

토빈은 쇠 막대를 받으며 무게를 가늠했다. “이건 안 휘겠구먼요.”

“그러라고 쇠로 했습니다.” 브란이 말했다.

*

그 주에 성의 암탉 한 마리가 없어졌다.

베르타가 부엌에서 소리를 질렀다. 알을 제일 잘 낳는 얼룩 암탉이었다. 하인들이 성 마당을 뒤졌다. 누구는 마구간을, 누구는 우물가를 보았다. 같은 곳을 세 사람이 보고, 어떤 곳은 아무도 안 봤다.

루엔은 성벽 위에서 그걸 보았다. 반 시간이 지나도 암탉은 나오지 않았다.

루엔은 내려와 모래 마당에서 막대기를 들었다. 성 마당 흙바닥에 금을 그었다. 성벽을 따라 가로로 몇 줄, 성문 쪽에서 세로로 몇 줄. 칸이 생겼다. 가로는 문에서부터 첫째, 둘째, 셋째. 세로는 동쪽 벽에서부터 첫째, 둘째.

“칸마다 한 사람씩입니다. 다섯째 줄 셋째 칸은 마부 아저씨. 다섯째 줄 넷째 칸은 한스.”

하인들이 멍하니 보다가 흩어졌다. 칸마다 한 사람. 겹치는 곳이 없었다. 빠지는 곳도 없었다.

모든 칸을 다 보았다. 암탉은 없었다.

“칸 안에는 없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러면 칸 밖입니다.”

부엌데기 소녀가 부엌으로 뛰어갔다. 조금 뒤 비명이 났다. 암탉은 부엌 화덕 옆, 큰 솥 뒤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자리였다. 알을 두 개 품고.

베르타가 암탉을 안고 나왔다. 칸 밖이었다.

그날 뒤로 성 마당의 금은 빗질에 지워졌다. 그런데 이름은 남았다. 하인들이 「오삼 마구간 앞에 물통 두라」, 「사이 우물가 쓸어라」 하고 불렀다. 다섯째 줄 셋째 칸, 넷째 줄 둘째 칸. 금이 없어도 다들 거기가 어딘지 알았다.

마부는 한 번 더 물었다. “도련님, 그럼 마구간 안에도 칸을 칠 수 있습니까.”

“칠 수 있습니다.”

마부는 그 주에 마구간 기둥마다 숯으로 번호를 적었다.

*

그달 보름밤, 달이 먹혔다.

처음엔 달 왼쪽 아래가 어두워졌다. 성벽 위 보초가 소리를 질렀다. 마을 쪽에서 개들이 짖었다. 교회 종이 한 번 울렸다가 멈췄다. 누가 쳐야 할지 몰라서였다.

루엔은 망루로 올라갔다. 펠릭스가 먼저 와 있었다. 그 옆에 코넬이 목검을 끌어안고 있었다.

“달이 먹히는 거래.” 코넬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마르타가 그러는데, 북쪽 산 너머 드래곤이 배고프면 달을 먹는대.”

“드래곤은 달까지 못 납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수도원 옛 기록에 따르면, 드래곤은 몸이 너무 무거워서 한 번 날 때마다 가슴속 심장 돌이 닳는답니다. 그래서 굴에서 잘 나오지 않고, 해마다 수가 준다고요. 요즘은 봤다는 사람도 드뭅니다.”

코넬이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먹히는 게 아닙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그림자가 드는 겁니다. 해가 땅 뒤에 있고, 땅 그림자가 달에 닿는 거지요. 수도원에서 배웠습니다.”

“땅 그림자?”

“땅은 둥급니다. 도련님.” 펠릭스가 코넬에게 말했다. “배운 사람은 다 압니다. 저 그림자 끝을 보십시오.”

루엔은 보고 있었다.

어두운 쪽과 밝은 쪽 사이의 선이 둥글었다. 달이 기울 때처럼 달 제 모양의 선이 아니었다. 더 완만했다. 더 큰 원의 한 조각이었다.

그림자는 천천히 달을 건너갔다. 어디가 먹혀도 끝은 늘 둥글었다. 모서리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우리가 공 위에 서 있는 거예요?” 코넬이 물었다. “아래쪽 사람은 왜 안 떨어져요?”

“수도원에도 그걸 묻는 아이가 해마다 있었습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답을 들은 아이는 없었고요.”

코넬이 발밑의 돌바닥을 한 번 쿵 밟았다. 떨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는 발이었다.

어떤 모양이 어느 쪽에서 비춰도 늘 둥근 그림자를 만든다면, 그건 공이었다.

루엔은 그림자 끝의 굽은 정도를 눈으로 따라 원을 이어 보았다. 이어진 원은 달보다 훨씬 컸다. 달 두 개 반쯤.

쯤.

루엔은 그 말을 삼켰다. 눈으로 이은 원이었다. 잰 게 아니었다.

“선생님. 땅이 얼마나 큰지도 수도원에서 압니까.”

펠릭스는 한참 달을 보았다.

“모릅니다. 둥글다는 것까지만.” 그가 말했다. “크기를 물어본 사람은 있었을 겁니다. 답을 적은 책은 못 봤습니다.”

달이 완전히 가려졌다. 붉은빛이 조금 도는, 어둑한 구리 같은 달이 되었다. 코넬이 「으」 하고 루엔 쪽으로 붙어 섰다.

루엔은 달을 보면서 셈했다. 그림자는 공의 그림자다. 그림자 크기를 알면 공 크기를 셈할 수 있다. 그러려면 달이 얼마나 먼지 알아야 했다. 해가 얼마나 먼지도.

아무것도 몰랐다.

*

밤이 끝나기 전에 달은 제 모양을 찾았다. 보초가 종 대신 방패를 두드려 알렸다. 마을 개들이 조용해졌다.

방으로 돌아온 루엔은 수첩을 뒤에서부터 폈다.

모르는 것.

하나. 샌 마나는 어디로 가나.

그 아래에 적었다.

둘. 땅은 얼마나 큰가.

두 줄을 한참 보았다. 둘 다, 아직 잴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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