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두 조각이 맞붙었다. 그런데 틈이 있었다.
햇빛에 대 보니 가는 빛줄기가 새어 들었다. 막대 한가운데쯤, 손가락 두 마디 길이만큼.
루엔은 그 빛을 보면서 알았다. 이 장부는 누군가 고쳐 썼다.
*
루엔이 여덟 살이 된 해 가을, 세금 날이었다.
광장 돌기둥 위에 쇠 되가 사슬에 묶여 있었다. 깎기 막대도 그 옆에. 한 해 사이 테두리가 조금 반들반들해졌을 뿐, 찌그러진 데는 없었다. 아이들은 올해도 그걸 쓰고 싶어 했지만 사슬이 짧았다.
몰튼이 탁자를 펴고 장부를 폈다. 핌 차례가 되자 몰튼이 장부를 한 장 앞으로 넘겼다.
“노인장. 지난해 치가 모자라네.”
핌이 허리를 펴려다 말았다.
“모자라다니요.”
“지난해 여덟 되 하고 스무 잔. 올해 몫은 열한 되. 밀린 세 되에, 밀린 벌로 한 되를 더 얹네.”
몰튼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낮고 고르고, 조금 피곤했다. 장부를 핌 쪽으로 돌려 보여 주기까지 했다. 핌은 글자를 몰랐다. 몰튼도 그걸 알았다.
“열한 되 냈는디요.” 핌이 말했다. “도련님이 스무 잔까지 쳐 주셨고요.”
“스무 잔은 맞네. 되는 여덟이야.” 몰튼이 말했다. “노인장 나이면 한 해 전 일은 흐릴 수 있지.”
줄 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몰튼의 말이 틀렸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몰튼은 이 광장에서 서른 해 셈을 해 온 사람이었다. 그의 셈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핌이 루엔을 찾았다. 광장 가장자리에 서 있던 루엔과 눈이 마주쳤다.
루엔은 지난해 그 자리에 있었다. 스무 잔을 쇠잔으로 뜬 게 루엔이었다. 되는 세지 않았다. 되를 센 건 몰튼이었다.
기억만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여덟 살 아이의 기억과 서른 해 집사의 장부. 광장 사람들이 어느 쪽을 믿을지는 셈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핌이 허리춤에 손을 넣었다.
*
개암나무 반쪽이 나왔다.
한 해 동안 품에 넣고 다녀서 겉이 손때로 까맸다. 칼금이 열한 개. 그 옆에 짧은 금 하나.
“여기 있는디요.”
몰튼이 막대를 보았다.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다만 대답이 한 숨 늦었다.
“노인장 반쪽이지. 노인장이 금을 더 그었을 수도 있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루엔은 몰튼을 다시 보았다. 이 사람은 한 번에 가장 약한 자리를 짚었다.
“그럼 맞대 보면 됩니다.” 루엔이 말했다. 광장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집사님 반쪽과.”
“내 반쪽은 창고에 있네.”
“가져오시면 됩니다.”
몰튼이 루엔을 보았다. 셈판 위의 돌을 옮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오지.”
몰튼이 창고로 간 사이, 광장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줄 선 사람들은 자루를 내려놓고 서로를 보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몰튼은 이 사람들 대부분의 세금을 서른 해 동안 적어 온 사람이었다. 자기 되 수가 어떻게 적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겔트가 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루엔 쪽을 한 번 보고, 창고 쪽을 한 번 보았다.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닫혔다.
루엔은 속으로 셌다. 둘, 셋, 다섯, 일곱. 창고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여든아홉까지 갔다. 그리 떨리는 날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세고 있었다.
몰튼은 창고에서 끈에 꿴 막대 뭉치를 들고 나왔다. 지난해 세금 날의 반쪽들이었다. 핌처럼 막대를 가져온 사람은 여섯이었다. 몰튼은 여섯 개를 전부 끈에 꿰어 서랍에 두었다.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내밀었다. 칼금이 여덟 개. 짧은 금 하나.
광장이 웅성거렸다.
*
루엔은 두 반쪽을 받아 쪼갠 면끼리 맞댔다.
나무결이 이어졌다. 쪼갤 때 칼이 비껴 난 자리까지 들어맞았다. 같은 나무였다. 핌의 말대로, 세상에 이 반쪽과 맞는 건 저 반쪽 하나뿐이었다.
칼금을 보았다. 쪼개기 전에 그은 금은 막대를 가로질렀다. 그러니 금 하나가 두 반쪽에 나뉘어 있어야 했다. 핌 쪽 금과 몰튼 쪽 금이 쪼갠 면에서 만나야 했다.
여덟 개는 만났다.
세 개는 핌 쪽에만 있었다. 쪼갠 면에서 끊겼다. 몰튼 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노인장이 더 그은 금이지.” 몰튼이 말했다.
“그러면 이 세 금은 쪼갠 뒤에 그은 겁니다.” 루엔이 말했다. “쪼갠 뒤에 반쪽에 금을 그으면, 쪼갠 면 쪽 끝이 부스러집니다. 받쳐 주는 나무가 없으니까요.”
브란이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루엔은 핌 쪽 세 금의 끝을 손톱으로 쓸었다. 다른 여덟 금과 같았다. 끝이 쪼갠 면까지 곧게 가서 깨끗하게 멈췄다. 부스러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몰튼 쪽 반쪽을 해 쪽으로 기울였다.
그 세 금이 있어야 할 자리. 거기만 나무 겉이 조금 달랐다. 다른 곳은 한 해 묵은 잿빛인데, 그 자리만 결이 희었다. 새로 깎은 나무의 흰빛.
두 반쪽을 다시 맞대고 해에 댔다. 그 자리에서만 가는 빛이 새어 들었다. 깎아 낸 만큼 얇아진 것이다.
“금을 더 그은 쪽이 아닙니다.” 루엔이 말했다. “깎아 낸 쪽입니다.”
*
광장이 조용해졌다.
가렛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탁자 앞으로 왔다. 두 반쪽을 받아 해에 대 보았다. 가는 빛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몰튼.”
몰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엔은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했다. 밀랍판 귀퉁이에 적어 둔 줄.
“아버지. 지난겨울 석 달, 병사 몫이 쉰셋으로 적혀 있습니다. 봄 점호 때 부른 이름은 쉰둘이었습니다. 쉰셋째로 줄에 선 건 한스뿐인데, 한스는 병사가 아닙니다.”
가렛이 몰튼을 보았다.
몰튼이 천천히 장부를 덮었다. 이번엔 빠르지 않았다.
“쉰셋째는 없습니다, 나리.”
그 말은 고르고 낮았다. 핑계를 대지 않았다. 셈이 끝난 사람의 목소리였다.
“병사 몫에는 한 사람을 더 적었습니다. 몇 해째입니다. 이름을 끝까지 세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세금은 글 모르는 집만 골라 되를 줄여 적었습니다. 막대를 가져오는 집은 막대까지 깎았고요.”
“막대까지.” 가렛이 말했다.
“막대를 대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서른 해 동안.” 몰튼이 루엔을 보았다. “도련님이 오시기 전에는.”
“왜 반쪽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루엔이 물었다. “버렸으면 맞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몰튼이 잠깐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장부는 버리는 게 아닙니다, 도련님. 서른 해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가 셈판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 셈판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틀린 건 적은 것이지요.”
몰튼은 셈판을 두고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가 멈췄다. 펠릭스를 보았다.
“그 판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쓰시지요.”
펠릭스가 셈판을 내려다보았다. 가장자리가 손때로 까맣고, 돌 몇 개는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다. 서른 해 치 손때였다.
펠릭스는 한참 있다가 판을 두 손으로 들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
그날로 몰튼은 집사가 아니게 되었다.
가렛은 몰튼을 가두지 않았다. 대신 집을 봉하고, 몰튼의 장부와 궤짝을 전부 성으로 올리게 했다. 몰튼은 마을 끝 제 집에서 나가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날 때 걸음이 느려졌다가 빨라졌다.
새 셈은 펠릭스가 맡았다. 가렛이 부탁했다. 펠릭스는 한참 망설이다 받았다.
“셈판도 쓰고 도련님 글자도 쓰겠습니다. 두 길로 셈해서 같게 나오면 적겠습니다.”
“그리고 아홉을 버리고.” 루엔이 덧붙였다.
“그리고 아홉을 버리고.”
이튿날부터 펠릭스와 루엔은 몰튼의 장부를 처음부터 다시 셈했다. 막대를 가져온 여섯 집부터. 여섯 집 가운데 넷의 막대가 깎여 있었다. 나머지 둘은 멀쩡했다. 깎은 자리의 흰빛은 막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오래된 것일수록 다시 잿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글 모르는 집들은 막대가 없었다. 그 집들은 기억으로 말했고, 기억은 사람마다 달랐다. 펠릭스는 그 집들 줄 옆에 따로 표시를 해 두었다. 셈할 수 없는 것은 셈할 수 없다고 적어 두어야 한다고 했다. 루엔도 같은 생각이었다.
가렛은 핌에게 세 되를 돌려주었다. 벌로 얹으려던 한 되도 광장 쇠 되로 깎아서 얹어 주었다. 핌은 한 되를 더 받는 걸 한사코 사양하다가 결국 자루를 열었다.
*
이레 뒤, 루엔은 핌의 집에 갔다.
개울 위쪽에서 세어 스무 번째 집이었다. 가는 길에 우물가를 지났다. 마흔한 번째 집과 마흔두 번째 집 아낙이 여전히 물동이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은 누가 먼저인지가 아니라 몰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이 같은 편이 된 건 처음 보았다.
핌의 집 문 위에 막대가 걸려 있었다.
두 반쪽이었다. 가렛이 돌려준 것. 핌은 두 쪽을 맞붙여 끈으로 묶고 문 위 나무에 못으로 박아 두었다. 깎인 자리의 흰빛이 아직 조금 보였다.
“걸어 두셨습니까.”
“걸어 뒀지요.” 핌이 문간에 앉아 막대를 올려다보았다. “글 모르는 놈 장부가 글 아는 놈 장부를 이겼으니께요. 죽을 때까지 걸어 둘 거요.”
루엔은 막대를 올려다보았다. 쪼갠 면이 맞닿은 선이 보였다. 그 선에서 칼금 열한 개가 끊기지 않고 건너갔다. 세 개만 한쪽이 희었다.
“원래 그렇다고 하셨지요.” 루엔이 말했다. “되가 다른 것도, 나머지를 안 쳐 주는 것도.”
“그랬지요.”
“오늘은 원래 그렇지 않았습니다.”
핌이 이 빠진 입으로 웃었다. 오래 웃었다.
집 안에서 어린 손자가 기어 나와 할아버지 무릎에 매달렸다. 핌이 아이를 안아 올려 문 위의 막대를 가리켰다.
“저거 만지면 안 된다. 저건 할애비 장부여.”
아이는 막대를 보고, 할아버지를 보고, 손가락으로 칼금을 세는 시늉을 했다. 하나, 둘, 셋. 셋에서 멈췄다. 루엔은 그 아이가 언젠가 열하나까지 셀 거라고 생각했다.
*
그날 밤, 가렛이 루엔을 불렀다.
아버지 방 탁자에 몰튼의 궤짝이 열려 있었다. 펠릭스가 옆에서 종이 묶음을 넘기고 있었다.
“영지 장부 말고 하나가 더 있었다.” 가렛이 말했다.
얇은 장부였다. 몰튼의 옛 글자. 한 장에 이름 하나씩. 이름 밑에 보리 되 수가 달마다 한 줄씩 적혀 있었다. 줄이 내려갈수록 수가 커졌다.
루엔은 첫 장의 이름을 읽었다.
겔트.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