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열 되가 한 해 만에 서른한 되가 되었다.
하고, 조금.
루엔은 밀랍판 맨 아래 줄에 그 수를 적고 한참 보았다. 곁에서 펠릭스가 셈판으로 같은 길을 따라왔다. 돌이 마지막 줄에 멈췄다. 같은 수였다.
*
겔트가 성에 올라온 건 몰튼의 궤짝을 연 이튿날 아침이었다.
모자를 두 손으로 쥐고 가렛 방 문간에 섰다. 들어오라는 말에도 한 걸음만 들어왔다.
가렛이 얇은 장부를 탁자 위에 펴 놓았다. 겔트의 이름이 적힌 장.
“몰튼에게 빌렸나.”
겔트의 얼굴이 굳었다.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해 전 봄에… 씨보리를요. 그해 겨울에 보리가 썩어서 씨할 게 없었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나.”
“집사 나리가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겔트가 모자를 비틀었다. “말하면 세금 적을 때 어찌 될지 모른다고요. 세금은 집사 나리가 적으니까요.”
가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는 얼굴이었다. 서른 해 동안 그 장부를 믿은 사람은 가렛이었다.
“얼마를 빌렸나.”
“열 되요. 집사 나리 되로. 작은 되였습니다.” 겔트가 말했다. “갚을 땐 성 창고 되로 갚으라 했고요. 그건 컸지요. 그땐 되가 다 제각각이었으니, 따질 데가 없었습니다.”
“이자는.”
“달마다 열에 하나.”
펠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루엔은 이미 밀랍판을 펴고 있었다.
*
“겔트 아저씨는 한 해에 얼마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루엔이 물었다.
겔트가 루엔을 보았다. 이 도련님 앞에서 셈을 틀리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또박또박 말했다.
“열 되에 열에 하나면 달마다 한 되. 열두 달이면 열두 되. 빌린 열 되하고 해서 스물두 되요. 처음엔 그렇게 셈했습니다.”
틀린 셈이 아니었다. 이자가 빌린 것에만 붙는다면 그게 맞았다. 겔트는 손가락으로 제대로 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물두 되를 들고 갔더니,” 겔트가 말했다.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붙은 것에도 붙는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모자란다니까 모자란 줄 알았지요.”
루엔은 밀랍판을 돌려 겔트 앞에 놓았다.
“붙은 것에도 붙으면 이렇게 됩니다.”
첫 줄. 빌린 열 되.
둘째 줄. 한 달 뒤, 열에 하나가 붙어 열한 되.
셋째 줄. 두 달 뒤. 이번엔 열 되가 아니라 열한 되에 열에 하나가 붙는다. 열두 되 하고, 한 되의 열에 하나.
“한 달마다 앞줄 값의 열에 하나를 앞줄에 더합니다. 앞줄이 커지면 붙는 것도 커집니다.”
넷째 줄, 다섯째 줄. 루엔은 줄마다 말로 읽었다. 열세 되 조금 넘게. 열네 되 반쯤—
“반쯤이 아니라 열넷 하고 한 되의 백분의 예순넷입니다.” 루엔이 스스로 고쳤다. 펠릭스가 셈판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맞습니다」 했다.
여섯째 달에 열일곱 되를 넘었다. 여덟째 달에 스물한 되를 넘었다. 열째 달에 스물다섯 되를 넘었다.
열두째 달. 서른한 되 하고 조금.
“세 배가 넘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겔트는 밀랍판을 보았다. 글자는 몰랐다. 그래도 줄이 내려갈수록 길어지는 건 보였다. 맨 아래 줄이 맨 위 줄보다 세 배 넘게 길었다.
“스물두 되가 아니라…”
“서른한 되입니다. 한 해면.”
겔트가 입을 다물었다. 모자를 쥔 손이 풀렸다.
“그래서 해마다 모자랐구먼요.” 겔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제가 셈을 못 해서가 아니라.”
“아저씨 셈은 맞았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셈하는 길이 둘이었을 뿐입니다. 아저씨는 더하셨고, 몰튼은 곱했습니다.”
*
몰튼의 장부를 끝까지 넘기자 이름이 열하나 나왔다. 겔트처럼 씨보리를 빌린 집들이었다. 몰튼은 빌려준 보리가 어디서 났는지 적지 않았다. 적을 필요가 없었다. 세금 줄에서 줄인 되와 병사 몫에서 더 적은 한 사람이, 창고에서 나가 그 집들로 갔다.
“영지 곡식을 훔쳐 영지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았군.” 가렛이 말했다.
그 말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펠릭스와 루엔은 이틀 동안 열한 집의 셈을 다시 했다. 빌린 것을 광장 쇠 되로 바꾸고, 갚은 것도 쇠 되로 바꾸었다. 몰튼의 작은 되와 창고의 큰 되가 얼마나 달랐는지는 몰튼 궤짝에서 나온 작은 되를 쇠 되에 대 보고 알았다. 작은 되 열은 쇠 되 아홉 하고 조금이었다.
겔트는 세 해 동안 스물여섯 되를 갚았다. 쇠 되로.
*
가렛은 광장에 사람들을 모았다.
돌기둥 옆에 판자 하나를 세웠다. 펠릭스가 거기에 칙령을 적었다. 옛 글자로 한 벌, 루엔의 글자로 한 벌. 그리고 소리 내 읽었다. 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하나. 하르트령에서 곡식을 빌려줄 때 이자는 한 해에 빌린 것의 열에 하나를 넘지 못한다.」
「둘. 붙은 이자에 다시 이자를 붙이지 못한다.」
「셋. 빌리고 갚는 되는 이 광장의 쇠 되로 한다.」
광장이 웅성거렸다.
“몰튼에게 빌린 곡식은 영지 곡식이었다.” 가렛이 말했다. “그러니 그 빚은 영지에 진 빚이다. 이 칙령대로 셈한다. 더 낸 것은 돌려준다.”
펠릭스가 열한 집의 이름을 불렀다. 한 집씩, 셈한 결과를 말했다.
겔트 차례였다.
“빌린 것, 쇠 되로 아홉 되 하고 조금. 세 해 치 이자, 한 해에 한 되가 안 되니 세 되를 넘지 않음. 합해서 열세 되 안쪽. 갚은 것, 스물여섯 되.”
펠릭스가 판자에서 눈을 들었다.
“열세 되 넘게 돌려받습니다. 끝자리는 오늘 밤 다시 셈해서 내일 알려 드리겠습니다.”
루엔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끝자리를 하룻밤 미루는 건 펠릭스다운 일이었다. 틀린 끝자리를 광장에서 말하는 것보다 나았다.
겔트는 한참 서 있었다. 곁에 선 아내가 겔트의 소매를 잡았다. 겔트는 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가, 다시 벗었다.
루엔은 수첩을 떠올렸다. 넷째 줄. 빌리는 사람이 약하다. 겔트가 말한 것이었다.
그 줄 옆에 고침이라고 적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몰랐다. 칙령은 하르트령 안에서만이었다. 고개 너머 로센에서는 여전히 달마다 곱할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이 광장에서는, 약한 쪽이 조금 덜 약했다.
*
그 주 끝에 가을 장이 섰다.
로센 상인들이 고갯길로 수레를 몰고 왔다. 도르크는 오지 않았다. 대신 낯선 사람들이 왔다. 그중 하나가 광장 구석에 작은 판을 폈다.
엎어 놓은 나무 잔 셋. 그 가운데 하나에 콩 한 알.
“자, 어디 있나 맞혀 보시오. 맞히면 두 배!”
사내가 잔 셋을 빙빙 돌렸다. 마을 사람이 하나를 골랐다. 그러면 사내는 남은 둘 가운데 빈 잔 하나를 먼저 들어 보였다.
“여긴 없네. 이제 둘 남았소. 바꾸겠소?”
다들 바꾸지 않았다. 처음 고른 걸 바꿨다가 틀리면 억울하다고들 했다. 둘에 하나니 어차피 반반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대개 졌다.
루엔은 코넬과 함께 한 시간 가까이 그 판을 보았다. 사내는 콩을 몰래 빼지 않았다. 손이 빠르긴 했지만 속이지는 않았다. 판은 정직했다. 그런데 사내가 계속 이겼다.
루엔은 모래에 막대기로 세 칸을 그렸다.
“콩이 첫째 잔에 있고 제가 첫째를 고르면, 바꾸면 집니다. 콩이 둘째에 있고 제가 첫째를 고르면, 저 사람은 셋째를 들어 보입니다. 바꾸면 이깁니다. 콩이 셋째에 있어도 같습니다. 바꾸면 이깁니다.”
셋 가운데 둘.
“바꾸는 쪽이 두 번에 한 번보다 자주 이깁니다.”
옆에서 보던 어른들이 웃었다.
“둘 남았는데 무슨 소리요. 반반이지.”
“도련님, 그건 셈이 아니라 운이오.”
루엔은 대답 대신 코넬을 보았다. 코넬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날은 형이 필요하다는 걸 형도 알았다.
코넬이 조약돌 하나와 나무 잔 세 개를 구해 왔다. 코넬이 몰래 돌을 숨기고, 루엔이 고르고, 코넬이 빈 잔 하나를 들었다. 루엔은 늘 바꾸었다. 모래에 금을 그어 이긴 판과 진 판을 적었다.
서른 판.
바꿔서 이긴 판이 열아홉. 진 판이 열하나.
어른들이 모래를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제 손으로 다시 해 보겠다고 했다. 이번엔 늘 바꾸지 않았다. 서른 판에 이긴 게 아홉.
광장 구석이 조용해졌다.
그다음 판부터 마을 사람들이 바꾸기 시작했다. 사내가 두 배를 내주는 판이 늘었다. 사내의 웃음이 짧아졌다. 셋째 판을 내주고 넷째 판을 내준 뒤, 사내는 잔 셋을 쓸어 담았다. 판을 접었다. 수레도 없이 고갯길 쪽으로 걸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어디 가시오! 한 판 더!”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달리기 시작했다.
코넬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다 조약돌을 손바닥에 굴리며 말했다.
“근데 너, 저 사람이 속이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속였으면 셈이 이렇게 안 나옵니다. 속이지 않고도 이기는 판이라서 오래 버텼던 겁니다.”
*
그날 밤, 코넬이 루엔 방에 쪽지를 밀어 넣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줄지어 있었다. 낮에 루엔이 장터에서 가르쳐 준 놀이였다. 글자마다 글자 차례에서 세 칸씩 밀어 쓰기. 아는 사람만 읽는 편지.
루엔은 쪽지를 풀었다. 「내일 모래 마당. 점 백 개 또.」
루엔도 세 칸씩 밀어 답장을 써서 코넬 방문 밑으로 밀어 넣었다. 코넬이 또 썼다. 쪽지가 방 사이를 세 번 오갔다.
네 번째 쪽지는 엘리나 손에 들려 왔다.
“복도에 떨어져 있더구나.” 엘리나가 쪽지를 펴 보였다. “「내일 아침 꿀과자는 베르타 몰래.」 이거 맞니?”
루엔은 쪽지를 받아 보았다. 밀어 쓴 글자가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그걸 읽었다.
“어떻게 푸셨습니까.”
엘리나가 쪽지 맨 아래를 손끝으로 짚었다.
거기에 코넬이라고 적혀 있었다. 밀지 않은 글자로. 형의 반듯한 글씨로.
“끝에 코넬이라고 썼으니 코넬이 쓴 거고, 코넬이 쪽지를 보낼 사람은 너뿐이니 첫머리는 루엔이겠지.” 엘리나가 말했다. “루엔의 첫 글자가 세 칸 밀려 있더구나. 그럼 나머지도 세 칸이겠고.”
루엔은 쪽지를 오래 보았다. 암호가 풀린 건 암호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이름 하나를 그냥 써서였다.
“형한테 말해 줘야겠습니다.”
“말하지 마라.” 엘리나가 웃었다. “꿀과자는 내가 베르타 몰래 챙겨 두마.”
*
이튿날 아침, 꿀과자보다 먼저 마을 사제가 성에 올라왔다.
광장 판자에 적힌 칙령을 읽고 온 얼굴이었다. 가렛 방 문을 두드리기 전, 복도에서 루엔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교단은 이자를 금합니다, 도련님.” 사제가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눈은 부드럽지 않았다. “한 해에 열에 하나까지는 받아도 된다는 칙령이라면, 영주께서 이자를 허락하신 겁니까.”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