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자는 루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키가 컸다. 어깨가 문틀을 거의 채웠다. 얼굴 반을 덮은 수염에 빗물이 맺혀 있었다. 가죽 옷에서 말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작군.”
낮고 짧은 목소리였다.
뒤에서 엘리나가 웃었다. “갓 난 아기는 다 작아요, 가렛.”
“코넬은 더 컸던 것 같은데.”
“당신이 코넬 태어날 때도 국경에 있었잖아요.”
남자 — 가렛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손바닥 하나가 루엔의 몸통만 했다. 그 손이 루엔을 들어 올렸다.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칼자루를 쥘 때보다 훨씬 조심하는 손이었다.
루엔은 울지 않았다.
그 남자의 눈을 보았다. 회색이었다. 지쳐 있었고, 아주 오래 말을 탄 사람의 눈이었다.
“안 우는군.”
“어젯밤 천둥에도 안 울었대요. 마르타가 그러는데, 눈을 뜨고 번개를 보더래요.”
가렛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때 문틈으로 작은 머리가 쑥 들어왔다. 까만 머리를 헝클어뜨린 사내아이였다. 루엔이 요람 너머로 몇 번 본 얼굴이었다. 대여섯 살쯤.
“아빠! 얘가 내 동생이야. 얘 이상해. 잘 안 울어.”
“그래, 코넬. 이리 와서 같이 봐라.”
코넬은 쪼르르 다가와 발끝을 들고 요람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앞이라 그런지 괜히 코를 찡그렸다.
“쪼글쪼글해.”
“너도 그랬다.”
“난 안 그랬어.”
“그랬다.”
“어떻게 알아. 아빠 없었잖아.”
엘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렛은 입을 다물었다.
루엔은 그 셋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형.
이번 생의 가족이었다.
*
말을 알아듣는 데는 반년이 걸렸다.
전생의 서재현은 외국어에 특별히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기의 머리는 달랐다. 소리가 그냥 스며들었다. 어른이 된 뒤 배우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
반년쯤 지나자 들리는 말의 절반은 알아들었다. 입이 따라오지 않을 뿐이었다.
가장 먼저 익힌 건 수였다.
마르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소리 내어 셌다. 루엔을 안고 있으면 더 그랬다. 무거워서 숨을 고르려는 버릇이었다.
“하나, 둘, 셋 … 에구, 우리 도련님 무거워라 … 넷, 다섯.”
성의 돌계단은 서른두 칸이었다. 마르타는 가끔 스물몇에서 숫자 하나를 두 번 셌다. 그런 날엔 계단 끝에서 서른셋이 나왔다.
루엔은 그때마다 속으로 고쳐 셌다. 서른둘.
그렇게 날마다 들었다. 그래서 이 세계의 하나부터 서른셋까지를 계단 한 칸씩 외웠다. 서른셋은 마르타 덕분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이곳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이 땅은 하르트령이었다. 베스트리아 왕국의 북쪽 끝. 아버지 가렛 하르트는 왕에게서 이 땅을 받은 기사였다. 영지는 작았다. 언덕 위에 돌로 쌓은 작은 성 하나, 그 아래 마을 하나.
마을 이름은 노르벡이었다.
마르타가 루엔을 안고 성벽 위를 걸을 때면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개울을 따라 초가지붕과 널지붕이 모여 있었다. 방앗간 물레방아가 돌았다. 마을 한가운데에 종탑이 선 작은 교회가 있었다.
루엔은 굴뚝을 셌다.
연기가 나는 굴뚝이 예순셋. 연기가 없는 굴뚝이 다섯.
아마 집이 예순여덟 채쯤일 것이다. 굴뚝 없는 집이 있으면 더 많고.
쯤.
그는 속으로 그 말을 지웠다. 셀 수 없으면 셀 수 없다고 해야 한다. 나중에 내려가서 직접 세면 된다.
*
겨울이 왔다. 북부의 겨울은 길었다.
성에서 제일 따뜻한 곳은 아버지 방이었다. 벽난로가 컸다. 마르타는 낮이면 루엔을 담요에 싸서 그 방 구석에 앉혀 두었다.
그래서 루엔은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날마다 보았다.
가렛은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겨울 동안 그는 매일 오후 책상에 앉아 장부를 봤다. 두툼한 종이 묶음이었다. 마을에서 들어온 것, 나간 것, 창고에 남은 것.
책상 한쪽엔 나무판이 있었다.
판 위에 가로줄이 여러 개 그어져 있었다. 가렛은 그 줄 위에 조약돌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손이 빨랐다. 조약돌이 딸각딸각 소리를 냈다.
셈판이었다.
루엔은 담요 속에서 목을 쭉 뺐다.
맨 아랫줄의 돌은 하나씩. 그 윗줄은 다섯씩. 그 윗줄은 열씩. 돌이 넘치면 한 줄 올려 하나로 바꿨다. 줄마다 맡은 크기가 달랐다.
잘 만든 도구였다. 아버지는 그걸 아주 능숙하게 썼다.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셈이 끝나면 가렛은 펜을 들어 장부에 결과를 적었다.
루엔은 그 글자를 보았다.
세로 막대 하나가 하나였다. 막대 둘이 둘. 셋이 셋. 다섯은 아래가 벌어진 갈래 모양. 열은 막대 둘을 엇갈려 그었다. 쉰은 갈고리, 백은 둥근 지붕.
큰 수를 적을 땐 그 모양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양이 삼백팔십칠 마리라고 할 때, 가렛은 지붕 셋, 갈고리 하나, 엇갈림 셋, 갈래 하나, 막대 둘을 적었다.
열 개였다. 글자가 열 개.
루엔은 담요 안에서 눈을 끔벅였다.
전생이라면 세 글자였다.
그는 한참 그 장부를 보았다. 다른 줄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글자들은 어디에 놓여도 같은 크기다. 지붕은 맨 앞에 있든 맨 뒤에 있든 백이다. 막대는 어디 있든 하나다. 글자 자리가 크기를 정하지 않는다.
자리값이 없다.
그래서 셈은 판 위에서 하고, 종이에는 결과만 적는 것이다. 종이 위에서는 셈을 할 수가 없으니까.
셈판에는 자리가 있다. 줄마다 크기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 판을 종이로 옮기는 순간 자리가 사라진다.
아버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셈판은 정확했고, 아버지는 빨랐다.
단지, 종이 위에 자리가 없었다.
루엔은 담요 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뭔가를 그리고 싶었다. 손은 아직 아무것도 쥐지 못했다.
“도련님, 또 나리 장부 보세요?”
마르타가 웃으며 그를 안아 올렸다.
“글자도 모르시면서. 무늬가 예쁘죠?”
무늬가 아니다.
그 말도 아직 할 수 없었다.
*
봄이 왔다. 루엔이 태어난 지 꼭 한 해가 되는 봄이었다.
그즈음 성 사람들은 내기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의 첫말이 무엇일까.
엘리나는 당연히 「엄마」라고 했다. 가렛은 말은 안 했지만, 저녁마다 아기 앞에 쭈그려 앉아 「아빠」를 천천히 되풀이했다. 이 큰 사내가 그러는 걸 보고 하인들이 몰래 웃었다.
루엔은 이미 말할 수 있었다. 혀와 입술이 조금 따라오기 시작했다.
다만 무슨 말을 먼저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식탁에는 베르타가 구운 꿀과자가 올라왔다. 베르타는 성의 요리사였다. 팔뚝이 굵고, 목소리가 크고,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을 국자로 때렸다.
코넬이 꿀과자로 손을 뻗었다. 두 개를 한꺼번에 쥐었다.
가렛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하나.”
코넬이 입을 내밀고 하나를 내려놓았다.
루엔은 아버지의 손가락을 보았다. 굵고 곧은, 흉터가 있는 손가락 하나.
하나.
이 세계에서 수를 부르는 첫 소리였다.
그는 자기 손을 들었다. 작은 주먹에서 검지 하나를 폈다. 쉽지 않았다. 다른 손가락들이 자꾸 따라 펴지려고 했다.
겨우 하나만 세웠다.
“하나.”
식탁이 조용해졌다.
엘리나가 손에 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엄마라고 했어요.”
“아니.” 가렛이 말했다. “아빠라고 했다.”
“엄마예요. 제가 들었어요.”
“아빠다. 내 쪽을 보고 했다.”
“손가락은 내 쪽이었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루엔을 봤다.
루엔은 손가락을 세운 채 가만히 있었다.
마르타가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저… 마님, 나리. 도련님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
“……”
코넬이 꿀과자를 입에 문 채 깔깔 웃었다. “하나래! 하나!”
가렛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루엔만 들을 만큼 중얼거렸다.
“… 하나는 맞았군.”
그날 밤 엘리나는 이불 속에서 루엔에게 「엄마」를 스무 번 들려주었다. 루엔은 세면서 들었다.
정확히 스무 번이었다.
*
그해 여름, 비가 많았다.
어느 날 가족은 말수레를 타고 노르벡 교회에 다녀왔다. 한 살이 된 아이를 사제에게 보이는 날이었다. 사제는 루엔 이마에 기름 한 방울을 찍고 긴 기도를 했다. 루엔은 그 기도의 음절을 셌다. 중간에 사제가 숨을 쉬는 바람에 셈이 끊겼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졌다.
언덕길은 흙길이었다. 금방 질척해졌다. 수레바퀴가 진흙을 튀겼다. 가렛이 고삐를 잡고, 엘리나가 루엔을 안고, 코넬은 짚단 위에서 신이 나 발을 굴렀다.
비가 굵어졌다.
수레가 기울었다. 뒷바퀴 하나가 진흙에서 옆으로 쭉 미끄러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말이 다리에 힘을 주자 바퀴는 곧 제 길로 돌아왔다.
하지만 루엔에게는 잠깐이 아니었다.
빗소리. 미끄러지는 바퀴. 멈추지 않는 무게.
젖은 길. 잠긴 바퀴. 불빛.
숨이 막혔다. 몸이 굳었다.
그리고 울음이 터졌다. 한 살 아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울음이었다.
“루엔? 루엔, 왜 그래, 괜찮아, 괜찮아.”
엘리나가 흔들었다. 등을 두드렸다. 소용없었다. 루엔은 어머니 옷깃을 쥐고 몸을 떨었다. 코넬이 놀라서 짚단에서 굴러 내려왔다.
앞에서 가렛이 돌아보았다.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 품에서 뒤로 젖혀진, 하얗게 질린 얼굴.
그리고 말을 멈춰 세웠다.
빗속에서 가렛은 한참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고삐를 짧게 잡고, 말을 천천히 걷게 했다. 사람이 걷는 것보다 느리게.
수레가 흔들리지 않았다.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았다.
루엔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엘리나가 물었다. “왜 그러는지 알아요?”
“모르겠다.”
가렛은 앞을 보며 말했다.
“모르겠는데, 이렇게 가니 안 운다.”
그들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서 갔다. 평소보다 두 배는 오래 걸렸다. 온 가족이 흠뻑 젖었다. 코넬은 투덜댔고 가렛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엔은 어머니 품에서 아버지의 등을 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까닭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속도를 늦췄다.
*
그날 밤, 루엔은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문밖 복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 겁이 많은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은 그래요. 코넬도 개를 무서워했잖아요.”
“그렇지.” 잠깐 말이 끊겼다. “그래도 한번 보게 해야겠다.”
“누구한테요?”
“마법사가 오면. 순회 마법사가 이태에 한 번은 들른다. 그때 이 아이 그릇도 한번 봐 달라고 해야지.”
발소리가 멀어졌다.
루엔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마법사.
그리고 그릇.
이 세계에는 킬로미터도 없고 자리값도 없었다.
대신 전생에 없던 것이 있었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