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판타지 / 무색탑의 수학자 / 1화. 제동 거리

Share

무색탑의 수학자
무색탑의 수학자
Author: Jino

1화. 제동 거리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0:27

“대충 해, 서 박사.”

센터장은 그 말을 오늘만 세 번 했다.

서재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끝자리가 안 맞습니다.”

“어디가.”

“마지막 칸이요. 들어간 열과 나간 열이 같아야 하는데, 조금 빕니다.”

“조금이면 맞은 거야.”

“어디로 샜는지 모르면 안 맞은 겁니다.”

센터장이 한숨을 쉬었다. 쉰을 넘긴, 사람 좋은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서재현도 알았다. 마감은 내일 아침이다. 발주처는 보고서 두께만 볼 것이고, 빈 조금은 그래프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보고서엔 반올림해서 들어가.”

“반올림은 틀린 걸 안 보이게 하는 거지, 맞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말 올해만 몇 번째야.”

“센터장님이 대충 하라고 하신 만큼입니다.”

옆자리 박사후연구원이 웃음을 삼켰다. 센터장도 결국 웃었다.

“서 박사. 연구교수 계약 언제 끝나는지 알지? 끝자리 맞추다가 계약이 먼저 끝나.”

“압니다.”

“알면 들어가. 밤에 비 온대.”

센터장은 가방을 들고 나갔다. 연구실 불이 하나씩 꺼졌다.

서재현은 남았다.

대학 부설 연구소. 물이 어떻게 흐르고 열이 어떻게 퍼지는지를 컴퓨터로 계산하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십 년 가까이 그 일을 했다.

잘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대충」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두 시간 뒤, 그는 찾았다.

계산 격자의 맨 모서리, 딱 한 칸. 벽에 닿은 그 칸에서 열이 밖으로 조금씩 새고 있었다. 경계 조건 한 줄이 잘못 들어가 있었다.

고쳤다. 다시 돌렸다.

들어간 열과 나간 열이 끝자리까지 같았다.

서재현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 순간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됐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혼자 말했다.

그는 메모지를 한 장 떼어 옆자리 모니터에 붙였다.

— 모서리 칸 경계 조건 한 줄 틀렸음. 고쳤음. 내일 아침 다시 돌려 볼 것. 반올림하지 말 것.

마지막 줄은 조금 망설이다 썼다. 박사후연구원은 좋은 연구자였다. 다만 센터장을 너무 잘 따랐다.

시각은 밤 열 시 사십 분이었다.

*

밖은 비였다.

가을비가 굵었다. 우산을 써도 바짓단이 금방 젖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길게 번졌다.

버스 정류장은 큰길 건너편이었다.

걸으면서도 머리는 연구실에 있었다. 내일 아침 센터장은 보고서를 넘기며 또 말할 것이다. 대충 해, 서 박사. 그리고 그는 또 대답할 것이다. 어디로 샜는지 모르면 안 맞은 겁니다.

그 대화가 싫지는 않았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끝자리를 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횡단보도 앞에 섰다. 빨간불. 그는 기다렸다. 무단횡단은 하지 않는다. 신호가 바뀌기까지 남은 숫자를 속으로 셌다.

셋, 둘, 하나.

초록불.

그는 걸었다. 흰 선을 하나, 둘 밟았다.

오른쪽에서 불빛이 커졌다.

트럭이었다. 짐칸에 덮개를 씌운 중형 트럭. 신호를 못 본 건지, 봤는데 늦은 건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빗소리를 찢었다.

바퀴가 잠겼다.

잠긴 바퀴는 구르지 않는다. 미끄러진다. 젖은 길 위에서는 마른 길보다 훨씬 길게.

서재현의 머리는 늘 하던 일을 했다.

저 속도, 이 빗길. 설 수 있는 거리는 —

모자랐다.

딱 한 걸음쯤.

한 걸음쯤이라니.

그는 그 순간에도 그 말이 싫었다. 한 걸음이면 한 걸음이고, 반 걸음이면 반 걸음이다. 쯤이 어디 있나.

끝까지 셈을 맞추기 전에, 불빛이 전부를 덮었다.

*

어둠.

소리가 먼저 왔다.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멀리서 웅웅거리는 소리. 누가 말을 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었다. 그가 들어 본 어떤 말도 아니었다.

다음은 따뜻함이었다.

무언가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두껍고 까슬까슬한 천.

눈을 떴다.

흐렸다. 빛과 그림자만 겨우 갈렸다. 커다란 얼굴 하나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였다. 둥근 얼굴, 머리에 두른 흰 천.

여자가 웃으며 무어라 말했다.

서재현은 대답하려고 했다.

입에서 나온 건 울음이었다.

가늘고 높은, 제 귀에도 낯선 울음.

그는 손을 들어 보려 했다. 손이 들렸다. 흐린 눈앞에 작은 것이 들어왔다. 주먹이었다. 쥔 채로 펴지지 않는, 아주 작은 주먹.

아.

그는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건 병원이 아니다.

*

며칠이 걸렸다. 어쩌면 몇 주였다. 날짜를 셀 방법이 없었다. 아기는 자꾸 잠들었고, 깨어 있는 시간은 짧았다.

그래도 서재현은 정리했다.

첫째, 그는 아기다. 갓 태어난.

둘째,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어쩌면 지구도 아니다. 그걸 판단할 재료는 아직 없다.

셋째, 사람들은 그를 「루엔」이라고 부른다.

그 소리가 자기 이름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안을 때마다, 그를 볼 때마다 그 소리를 냈다. 루엔. 루엔.

둥근 얼굴의 여자는 「마르타」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 천을 갈고, 밤에 요람을 흔드는 사람.

또 한 여자가 있었다. 마르타보다 젊고 가늘었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았다. 그녀가 오면 마르타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루엔을 안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몰라도 음은 따라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엘리나」라고 불렀다.

어머니였다.

서재현은 이상하게 담담했다. 죽었다는 것도, 다시 태어났다는 것도.

슬픔이 없지는 않았다.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는 밤도 있었다. 하지만 아기의 몸은 슬픔을 오래 붙들지 못했다. 배가 고프면 울었고, 배가 부르면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 있는 동안, 그는 셌다.

*

누워 있으면 보이는 건 천장뿐이었다.

나무 천장이었다. 굵은 서까래가 가로로 나란히 걸려 있었다. 눈이 조금 맑아지자 서까래가 하나씩 갈려 보였다.

그는 세기로 했다.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몸이 바뀌었다. 머리도 바뀌었을지 모른다.

하나. 둘. 셋.

눈이 자꾸 미끄러졌다. 아기의 눈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넷. 다섯. 여섯.

다시 처음부터. 이번엔 서까래 끝에 박힌 쇠못을 기준으로 삼았다.

일곱. 여덟. 아홉. 열.

좋다. 머리는 괜찮다.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

천장이 옆으로 흘렀다.

마르타였다. 해가 들어오는 창가 쪽으로 요람을 끌어 옮기고 있었다. 햇볕을 쬐어 주려는 것이었다. 좋은 뜻이었다.

하지만 서까래가 전부 제자리를 벗어났다.

어디까지 셌더라. 열넷이 어느 서까래였더라.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루엔의 입이 비죽 나왔다. 서재현은 참으려 했다. 참는 건 어른의 일이었고, 그는 어른이었다. 적어도 속은.

아기의 몸은 동의하지 않았다.

울음이 터졌다.

“어머, 어머. 배고프구나, 우리 도련님.”

말은 몰라도 뜻은 알았다. 마르타는 그를 안아 올려 젖을 물렸다.

아니다, 배고픈 게 아니다.

서까래를 세고 있었다.

그 말을 할 입이 없었다.

그는 젖을 먹으면서 곁눈으로 천장을 봤다. 새 자리에서, 처음부터.

하나. 둘. 셋.

마르타가 웃었다. “잘 먹네. 아주 잘 먹어.”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열아홉 개.

루엔은 젖꼭지를 문 채로 조금 만족했다. 마르타는 아기가 배불러서 조용해진 줄 알았다.

*

그 뒤로도 그는 날마다 셌다.

창문의 격자. 벽에 걸린 방패의 못. 마르타가 하루에 기저귀 천을 가는 횟수. 엘리나가 부르는 노래의 한 소절에 든 음.

아기에게 주어진 세상은 좁았다. 그래서 그 좁은 세상을 끝까지 셌다.

엘리나의 노래는 특히 오래 셌다.

그녀는 같은 노래를 매일 밤 불렀다. 한 소절에 음이 열둘. 그런데 이상했다. 어떤 밤엔 열하나였고, 어떤 밤엔 열셋이었다. 졸린 밤엔 음 하나를 삼켰고, 기분 좋은 밤엔 하나를 더 꾸며 넣었다.

틀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불렀다.

루엔은 어느 밤, 음이 열셋인 걸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어머니 얼굴을 빤히 보았다.

엘리나가 노래를 멈추고 웃었다.

“왜, 우리 아기. 엄마 노래가 이상해?”

이상하지 않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그걸 알아챈 것이 조금 기뻤다.

조금씩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이 집은 돌로 지은 집이었다. 벽이 두껍고 창이 작았다. 밤이면 불빛은 촛불과 벽난로뿐이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는 버릇이 한동안 남았다. 남자들의 발소리가 무거웠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자주 났다.

전기는 없다.

차 소리도 없다.

대신 말 울음이 있었다.

*

첫 여름비가 온 밤이었다.

저녁부터 공기가 무거웠다. 마르타가 덧창을 닫았다. 빗소리가 돌벽을 두드렸다.

루엔은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빗소리는 좋지 않았다. 젖은 아스팔트, 번지는 가로등, 잠긴 바퀴. 몸은 아기인데 기억은 그 밤에 멈춰 있었다.

숨이 가빠졌다.

그때 덧창 틈으로 흰빛이 번쩍였다.

서까래 열아홉 개가 한순간에 하얗게 드러났다.

루엔은 생각보다 먼저 셌다. 몸에 밴 버릇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

우르르릉.

천둥이 벽을 타고 내려왔다. 요람이 조금 떨렸다. 옆방에서 마르타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아홉.

루엔은 속으로 답을 냈다. 어릴 때부터 해 온, 몸이 먼저 아는 답이었다.

삼 킬로미터.

그리고 곧바로 멈췄다.

아니.

이 세계엔 킬로미터가 없지.

아무도 킬로미터를 모른다. 미터도 모른다. 그가 아는 모든 단위는 그 빗길에 두고 왔다.

그러면 여기선 거리를 무엇으로 재나.

걸음으로? 누구의 걸음으로?

또 번쩍였다. 루엔은 다시 셌다. 이번엔 일곱.

조금 가까워졌다.

이상하게도 숨이 고르게 돌아와 있었다. 빗소리가 아까만큼 무섭지 않았다.

세는 동안은 무섭지 않았다.

그는 밤새 셌다. 번개가 칠 때마다, 천둥이 닿을 때마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는 것을.

다만 답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새벽녘, 비가 그치고 덧창 틈으로 파란빛이 들 무렵. 문이 열리고 낯선 발소리가 들어왔다. 무겁고 느린 발소리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요람 위로 몸을 숙였다.

수염이 까슬까슬한,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무색탑의 수학자   86화. 열 가운데 하나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 무색탑의 수학자   85화. 무는 금화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 무색탑의 수학자   84화. 여섯째 서클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 무색탑의 수학자   83화. 열일곱과 일흔하나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 무색탑의 수학자   82화. 사흘째 오후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 무색탑의 수학자   81화. 세 번 센 불빛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