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두 살이 된 가을, 루엔은 나무 블록을 받았다.
성의 목수가 자투리 나무로 깎아 준 것이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네모 조각 열두 개. 목수는 아이 손에 가시가 박히지 않게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주었다.
코넬은 그 나이에 블록을 탑처럼 쌓다가 무너뜨리며 놀았다고 했다.
루엔은 쌓지 않았다.
늘어놓았다.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방바닥 돌 틈 하나를 기준선 삼아, 한 줄로. 블록 사이 간격은 손가락 한 마디씩.
한참 걸렸다. 두 살의 손은 생각만큼 정확하지 않았다. 블록이 자꾸 비뚤어졌다. 루엔은 비뚤어질 때마다 다시 밀어 맞췄다.
다 늘어놓고 나서 한 번 끝에서 끝까지 훑어보았다.
좋다.
그때 코넬이 방에 들어왔다. 일곱 살이었다. 목검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뭐 해? 이거 안 쌓아?”
코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가운데 블록 하나를 집어 갔다. 여섯째 것이었다. 손안에서 굴려 보더니 목검 끝으로 툭툭 쳤다.
루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고, 달려들지도 않았다.
블록 줄에 여섯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루엔은 다섯째와 일곱째를 건드리지 않았다. 빈자리를 빈 채로 두었다. 정확히 그 너비만큼.
그리고 형을 보았다.
빤히.
코넬이 목검 치던 손을 멈췄다.
“… 뭐.”
루엔은 계속 보았다. 빈자리와 형을 번갈아.
“뭐냐고.”
빈자리. 형. 빈자리. 형.
코넬이 블록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빈자리에. 방향까지 맞춰서.
“가질 생각 없었어.”
그러고는 목검을 끌며 도망치듯 나갔다.
복도에서 마르타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쟤 좀 무서워.”
“두 살짜리가 뭐가 무서워요, 도련님.”
“안 울어. 그냥 봐.”
루엔은 여섯째 블록을 손가락 끝으로 조금 밀었다. 반 마디 삐뚤어져 있었다.
*
이태에 한 번 온다던 순회 마법사는 한 해를 더 늦어, 루엔이 세 살 되던 여름에 왔다.
소식이 먼저 왔다. 마법사가 이웃 고을을 지나 하르트령으로 온다고. 노르벡 마을이 들썩였다.
순회 마법사는 북부의 작은 영지들을 돌며 일을 했다. 창고의 곡식을 말리고, 꺼지지 않는 불씨를 새로 놓고, 병든 가축을 보았다. 영주는 삯을 치르고, 마을 사람들은 구경을 했다. 이런 시골에서 마법을 보는 건 몇 해에 한 번 있는 일이었다.
마법사는 말 한 필에 짐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이름은 셀빈이었다. 마흔쯤 된 남자였다. 붉은 천을 덧댄 여행용 망토를 입고 있었다. 적색탑에서 공부한 사람이라고 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루엔은 긴 수염에 뾰족한 모자를 쓴 노인을 떠올렸었다. 셀빈은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짧은 머리, 손에 굳은살이 박인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가렛과 삯을 흥정했다. 창고 한 칸 곡식을 말리는 데 은화 몇 닢, 불씨 하나에 은화 몇 닢.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장사꾼 같았다. 일을 잘 아는 장사꾼.
*
이튿날 오후, 성 마당에서 시범이 있었다.
영주가 부르는 자리였다. 마을 사람들이 성문 안까지 들어와 빙 둘러섰다. 아이들이 어른들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루엔은 아버지 어깨 위에 앉았다.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셀빈이 마당 한가운데 섰다.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었다.
입이 움직였다.
낮게, 빠르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세계의 말도 아니었다. 소리의 높낮이가 일정했다. 노래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했다.
루엔은 셌다. 저절로 셌다.
하나, 둘, 셋 … 열하나.
열한 마디 소리.
셀빈의 손바닥 위에서 빛이 터졌다.
하얀 공. 주먹만 한. 눈이 아플 만큼 밝았다. 마당에 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발밑으로 짧아졌다.
“오오 —”
사람들이 탄성을 냈다. 아이들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 손가락 사이로 보았다.
빛 공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떨렸다. 밝아졌다가 조금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소리가 났다.
윙 — 윙 —
벌 떼가 멀리서 나는 것 같은, 낮은 소리. 귀가 아니라 이 사이로 느껴지는 떨림.
라이트였다. 1서클 마법이라고 했다.
셀빈이 손을 내리자 빛 공이 공중에 조금 머물다가, 깜빡, 꺼졌다.
숨을 몇 번 쉬는 동안이었다.
박수가 쏟아졌다.
루엔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뭔가가 거슬렸다.
*
다음은 파이어 볼트였다.
마당 저편에 짚으로 엮은 과녁이 세워져 있었다. 셀빈은 과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 영창은 길었다.
루엔은 다시 셌다. 스물셋.
셀빈의 손끝에 불이 맺혔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불덩이가 화살처럼 길어졌다. 그리고 날아갔다.
퍽.
과녁에 불이 붙었다. 짚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그런데 루엔이 본 것은 과녁보다 그 앞이었다.
불화살이 날아가는 길을 따라 공기가 일렁였다. 셀빈의 손끝에서 과녁까지 열이 번졌다. 불꽃이 쏘아질 때 번쩍한 빛이 마당 전체를 하얗게 칠했다. 윙 하는 소리가 또 났다.
그리고 열.
루엔은 과녁에서 꽤 떨어진 아버지 어깨 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뺨이 뜨거웠다. 불화살은 과녁으로 날아갔는데, 열은 옆으로도 왔다.
전생의 서재현은 열이 어떻게 퍼지는지 계산하던 사람이었다.
일을 하는 건 과녁에 닿는 불이다. 옆으로 퍼지는 열, 사방으로 튀는 빛, 귀에 들리는 소리 — 그건 과녁에 닿지 않는다.
그건 어디로 가나.
전생에 쓰던 옛날 전구가 생각났다. 먹은 전기 대부분을 빛이 아니라 열로 버렸다. 밝고 뜨겁고 요란한 것은, 대개 새는 쪽이었다.
새는 것 같다.
루엔은 그 생각을 붙들었다. 아직 근거는 없었다. 한 번 본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역시 적색탑이야!”
“저 빛 좀 봐, 저렇게 밝으니 얼마나 센 거야.”
셀빈은 망토를 털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몸짓이었다.
*
시범이 끝나고, 마법사는 가렛과 성벽 그늘에서 물을 마셨다.
루엔은 아버지 다리 옆에 서 있었다. 이번엔 용기를 냈다. 세 살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왜 번쩍입니까.”
셀빈이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존대를 쓰자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마나가 위엄을 드러내는 거다, 꼬마 도련님. 센 마법일수록 밝지. 백색탑 어르신들이 쓰는 마법은 눈을 못 뜰 만큼 밝아.”
“소리는요.”
“그것도 위엄이지.”
셀빈은 웃었다.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아이의 물음을 귀엽게 여기는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가렛에게 몸을 돌렸다. 영창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창이 길면 마법이 고르게 맺히지만, 그만큼 늦는다고. 싸움에서는 짧은 영창이 사람을 살리고, 일할 때는 긴 영창이 곡식을 덜 태운다고. 그래서 자기는 곡식을 말릴 때 일부러 영창을 두 배로 늘인다고.
루엔은 들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일을 아주 잘 안다. 길게 말하면 고르고, 짧게 말하면 빠르다. 그걸 몸으로 알고 골라 쓴다.
다만 빛과 소리와 열은 위엄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믿을 까닭도 있었다. 밝을수록 세다는 건,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럴듯했다.
“그런데 마법사님.” 가렛이 말했다. “이 아이 그릇을 한번 봐 줄 수 있소?”
셀빈이 루엔을 다시 보았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
“그릇은 여섯 살은 넘어야 잽니다, 나리. 그 전엔 물이 다 차지 않아서, 재 봐야 헛것이 나와요. 다음에 들를 때 보지요.”
“그렇군.”
“궁금하시면 제 파이어 볼트가 닿는 데까지 걸어 보시든가.” 셀빈이 농담처럼 성문 밖을 가리켰다. “제 불은 한 백 걸음쯤까지 갑니다.”
*
마법사가 창고로 간 뒤, 가렛은 루엔의 손을 잡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밀밭이 누렇게 흔들렸다.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늙은 참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가렛이 턱으로 가리켰다.
“저 나무까지가 한 백 걸음쯤이다.”
루엔은 나무를 보았다. 아버지를 보았다.
또 쯤이었다.
“몇 걸음입니까.”
가렛이 내려다보았다.
“한 백 걸음.”
“몇 걸음입니까.”
같은 말을 두 번 들은 가렛은 잠깐 말이 없었다. 수염을 쓸었다. 그러고는 아이 손을 놓고 성문 문턱에 발뒤꿈치를 댔다.
“세라.”
가렛이 걸었다.
기사의 걸음이었다. 넓고 곧고 고른 걸음. 루엔은 소리 내어 셌다. 세 살의 혀가 가끔 꼬였다. 그래도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 백.
나무는 아직 멀었다.
가렛의 등이 조금 굳는 것이 보였다. 멈추지는 않았다.
… 백이십.
… 백삼십.
백서른일곱.
가렛의 손바닥이 참나무 껍질에 닿았다.
가렛은 한참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돌아서서, 성문 앞에 선 작은 아들을 보았다.
“… 백서른일곱.”
“예.”
“백 걸음쯤이라고 했지.”
“예.”
가렛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걸어서 돌아왔다. 이번엔 속으로 세는 게 입술로 보였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고 앞을 지났다.
창고 문이 열려 있었다. 셀빈이 곡식 더미 앞에 서서 영창을 하고 있었다. 곡식을 말리는 마법이었다.
루엔은 아버지 손을 당겨 멈춰 세웠다. 그리고 셌다.
마흔여섯.
파이어 볼트의 꼭 두 배였다. 셀빈이 말한 그대로였다.
곡식 더미 위로 따뜻한 기운이 고르게 내려앉았다. 번쩍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마당에서 본 것보다 훨씬 흐렸다. 윙 소리도 낮았다. 문 앞에 선 루엔의 뺨은 뜨겁지 않았다.
길게 말하면, 덜 번쩍인다.
루엔은 그것도 머릿속에 적어 두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코넬이 물었다. “아빠, 방앗간까지 얼마나 돼?”
가렛은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 가까워.”
엘리나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남편을 보았다. 루엔은 조용히 수프를 먹었다.
*
그날 밤, 루엔은 잠들기 전에 낮의 일을 다시 늘어놓았다.
라이트, 열한 마디. 파이어 볼트, 스물세 마디.
그런데 하나가 걸렸다.
셀빈은 시범이 끝날 무렵, 사람들이 한 번 더 보여 달라고 조르자 파이어 볼트를 한 번 더 쏘았다. 새 과녁에.
루엔은 그때도 셌다.
스물셋. 똑같았다. 소리 높낮이까지 똑같았다.
그런데 두 번째 불은 작았다. 첫 번째보다 눈에 띄게. 더 많이 떨렸고, 더 많이 번쩍였다. 셀빈은 쏘고 나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같은 말. 다른 불.
그렇다면 불의 크기를 정하는 건 말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