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식당 식비는 주마다 냈다.
한 주에 동화 열두 닢. 은화로 치면 한 닢. 식당 문 옆 탁자에 두꺼운 장부가 있었다. 돈을 내면 식당 아주머니가 이름 옆에 막대와 갈래로 낸 만큼 적었다. 학생은 그 옆에 손도장을 찍었다.
루엔은 돈을 낼 때마다 제 줄을 읽었다. 아주머니가 제대로 적었는지. 아주머니가 틀린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읽었다. 읽는 김에 위아래 줄도 눈에 들어왔다.
테오 마일스. 루엔 바로 위 줄이었다.
석 주 전: 막대 열하나. 옆에 작은 표시 하나. 외상.
두 주 전: 막대 열하나. 외상.
지난주: 막대 열하나. 외상.
석 주째 한 닢씩 비었다.
루엔은 제 줄에 손도장을 찍고 돌아섰다. 아주머니가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남의 줄은 왜 봐.”
“제 줄 위에 있어서 보였습니다.”
“보인 건 잊어버려.”
“잊는 건 잘 못합니다.”
아주머니가 국자로 장부를 톡 쳤다. 더 말하지 않았다.
*
그날 밤 루엔은 촛불을 켜 놓고 기다렸다. 테오가 지붕에서 내려와 창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밤이슬이 앉아 있었다.
“식비가 석 주째 한 닢씩 비었습니다.”
테오가 창틀에 걸터앉은 채 멈췄다.
“… 남의 장부 보지 마.”
“식당 아주머니도 그러셨습니다.”
테오가 방으로 내려섰다. 침대에 앉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촛불이 한 마디쯤 탔다.
“학비.”
테오가 말했다.
“봄 학기 학비가 모자랐어. 은화 스무 닢. 집에 편지 썼는데, 어머니가 보낸 게 반도 안 됐어. 아버지가 땅을 또 팔았대. 더 팔 땅이 없대.”
테오 집안은 옛날엔 작은 영지가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 때 반을 잃고 아버지 때 나머지를 잃었다. 남은 건 이름과, 옷깃에 실이 풀린 문장뿐이었다.
“그래서 빌렸어. 언덕 아래 모리츠 칼브. 학생들한테 빌려주는 사람. 다들 알아.”
“얼마에.”
“이자는 없어. 교단이 금하잖아. 수수료만 받아.”
테오가 손가락을 폈다.
“한 주에 한 푼. 은화 두 닢마다 동화 한 닢. 스무 닢 빌렸으니까 한 주에 열 푼. 그거 내느라 식비가 한 닢씩 빈 거야.”
테오가 웃으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싸잖아. 한 주에 한 푼이면.”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계약서를 볼 수 있겠습니까.”
*
칼브의 가게는 학교 언덕 아래 좁은 골목에 있었다.
문 옆에 저울이 걸려 있었다. 안은 깨끗했다. 벽에 선반, 선반에 장부. 창가에 책상 하나.
모리츠 칼브는 쉰쯤 된 사람이었다. 말쑥한 회색 옷. 손가락에 은반지 하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말할 때 장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마일스 도련님 친구분이시군요. 소문의 하르트 도련님.” 칼브가 웃었다. 좋은 웃음이었다. “계약서요? 물론 보여 드리지요. 숨길 게 없습니다.”
칼브가 선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필경사 글씨로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아래에 테오의 서명과 칼브의 도장, 그리고 필경사 도장.
루엔은 천천히 읽었다. 한 줄씩. 두 번.
빌려준 돈: 은화 스무 닢.
서류 값: 서류를 쓰고, 도장을 찍고, 지키는 품삯으로 빌려준 돈의 열에 하나를 빌려줄 때 먼저 받음.
갱신 수수료: 빌린 돈을 다 갚기 전까지 주마다 계약을 새로 이어 주는 품삯으로, 은화 두 닢마다 동화 한 닢.
못 낸 수수료: 그 주 수수료를 못 내면 그 몫을 빌린 돈에 얹는다.
갚는 법: 빌린 돈은 한 번에 갚는다.
맨 아래 한 줄. 이 계약에는 이자가 없다. 받는 것은 모두 품삯이다.
루엔은 고개를 들었다.
“테오 님은 스무 닢을 빌리셨는데 손에 쥐신 건 열여덟 닢입니다.”
“두 닢은 서류 값이지요. 필경사 삯, 도장 삯, 이 서류를 불나지 않게 지키는 삯.”
“서류 값이 빌린 돈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까.”
“큰 돈의 서류는 더 조심해서 지켜야 하니까요.” 칼브가 장부를 두드렸다. “은화 백 닢짜리 서류를 잃어버리면 제가 백 닢을 잃습니다. 스무 닢짜리면 스무 닢. 지키는 값이 다른 게 당연하지요.”
말이 막히지 않았다. 루엔은 그 점을 적었다. 이 사람은 이 물음을 여러 번 들었고, 여러 번 대답했다.
“갱신 수수료는.”
“한 주마다 계약을 새로 이어 드리는 품삯이지요. 원하시면 언제든 원금을 갚고 끝내시면 됩니다. 붙잡지 않습니다.”
“한 번에 갚아야 합니다.”
“나눠 받으면 셈이 번거롭지요. 번거로우면 품삯이 늘고요. 저는 학생분들 품삯을 줄여 드리려는 겁니다.”
칼브가 다시 웃었다. 부드럽게.
“하르트 도련님. 교단 법을 읽어 보셨습니까. 빌려준 것보다 더 받지 말라. 저는 빌려준 것보다 더 받지 않습니다. 스무 닢을 빌려 드렸고, 스무 닢을 돌려받습니다. 나머지는 품삯입니다. 교구 필경사가 이 문구를 보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루엔은 계약서 아래 필경사 도장을 보았다. 교구 필경사였다.
“베껴 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칼브가 펜과 종이를 내주었다. 루엔이 베끼는 동안, 칼브는 창밖을 보며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다 베끼자 칼브가 말했다.
“마일스 도련님. 이번 주 수수료는 모레입니다. 잊지 마시고요.”
테오가 고개를 숙였다.
*
그날 밤 루엔은 표를 만들었다.
기준은 테오 손에 들어간 돈이었다. 스무 닢이 아니라 열여덟 닢. 손에 쥔 적 없는 두 닢은 빌린 돈이 아니었다. 빌린 것처럼 적힌 돈이었다.
줄은 주마다 하나. 칸은 둘.
왼쪽 칸은 테오가 수수료를 한 주도 빠짐없이 낼 때. 오른쪽 칸은 못 내는 주마다 그 몫이 빚에 얹힐 때.
한 주에 동화 열 닢. 스무 닢에 열 푼이라 들으면 작았다. 손에 쥔 열여덟 닢은 동화로 이백열여섯 닢. 그 가운데 열 닢이 주마다 나갔다. 스무 닢을 빌렸다고 적힌 종이로 셈할 때보다, 손에 쥔 돈으로 셈하면 한 푼 한 푼이 더 무거웠다.
왼쪽 칸부터 채웠다. 한 주에 열 닢씩 쌓였다. 벌써 열두 주가 지났으니 동화 백스무 닢, 은화 열 닢을 냈다. 한 해를 채우면 동화 오백스무 닢. 은화로 마흔세 닢이 넘었다. 거기에 한 번에 갚을 스무 닢.
손에 쥔 열여덟 닢을 쓰는 값으로, 한 해에 예순세 닢 남짓.
세 배 반.
그리고 한 해가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 스무 닢을 한 번에 갚기 전까지 수수료는 주마다 이어졌다. 한 번에 스무 닢이 없는 사람은 계속 냈다. 스무 닢이 없어서 빌린 사람이.
오른쪽 칸.
못 낸 주의 수수료가 빚에 얹히면, 다음 주 수수료는 늘어난 빚으로 셈했다. 두 닢마다 한 푼. 빚이 스물하나가 되면 수수료가 열 푼 반. 그게 또 얹히면. 달마다 곱해 보는 표와 같은 꼴이었다. 여덟 살 때 겔트 아저씨의 씨보리 빚. 다만 이번엔 주마다였다.
첫 주는 거의 늘지 않았다. 넉 주가 지나도 스물세 닢 반. 루엔은 칸을 이어 갔다. 열세 주에 서른넷. 스물여섯 주에 쉰여덟.
쉰두 주째 칸에서 펜이 멈췄다.
백예순일곱 닢.
손에 쥔 열여덟 닢의 아홉 배가 넘었다.
루엔은 끝자리를 두 번 셈했다. 아홉 빼기 검산도 했다. 맞았다.
*
테오는 표를 오래 보았다.
왼쪽 칸 끝, 예순셋. 오른쪽 칸 끝, 백예순일곱.
“… 난 한 주도 안 빠졌어. 왼쪽이야.”
“예. 지금까지는 왼쪽입니다.”
“그럼 세 배 반. 세 배 반이면….”
“세 배 반은 한 해 동안 한 주도 안 빠지실 때입니다. 식비가 석 주째 한 닢씩 비었습니다. 넷째 주엔 두 닢이 빌 수도 있습니다. 여름 방학엔 집에 가셔야 합니다. 방학 동안 수수료는 누가 냅니까.”
테오 얼굴이 하얘졌다. 방학을 셈하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표는 끝나지 않습니다.” 루엔이 표 맨 아래를 짚었다. “스무 닢을 한 번에 갚으실 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스무 닢을 모으려면, 수수료를 내고 남는 돈으로 모아야 합니다. 식비에서 한 닢씩 빼시는 걸로는 스무 닢이 모이기 전에 졸업하십니다.”
테오가 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칼브가 그랬어. 이자는 없다고. 교단 법에 안 걸린다고. 교구 필경사가 도장도 찍었고.”
“예.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럼 된 거잖아. 법에 안 걸리면.”
루엔은 잠깐 말을 골랐다.
“법에 걸리는지는 제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는 셈만 할 수 있습니다. 셈으로는, 손에 쥔 돈에 주마다 곱이 붙습니다. 날짜가 가면 늘고, 빌린 돈이 크면 늡니다. 그걸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 정할 일입니다.”
“누구.”
“교구입니다. 필경사가 도장을 찍은 곳이면, 법을 읽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너 설마 교구에 가려고?”
“표를 들고 가려고 합니다.”
“칼브가 가만히 있겠냐.”
“칼브 씨는 숨길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숨길 게 없습니다.”
*
테오가 한참 있다 말했다.
“네 돈으로 갚아 준다고는 안 하네.”
“생각했습니다.”
루엔은 솔직하게 말했다. 한 해 생활비 금화 두 닢. 한 닢은 은화로 바꿔 거의 다 썼다. 남은 건 은화 두 닢, 동화 일곱 닢, 그리고 매듭을 하나 더 지은 주머니 속 깎인 금화 한 닢. 그 금화를 바꾸면 스무 닢을 한 번에 낼 수는 있었다. 여름 방학 뱃삯과 가을 학기 끝까지 먹을 것을 빼면 모자랐지만.
“그런데 그러면 이 계약이 맞는 계약이 됩니다. 테오 님이 갚고 끝나면, 칼브 씨는 다음 학생에게 같은 종이를 내밉니다. 그 학생에겐 저 같은 방 친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테오가 루엔을 보았다.
“그리고,” 루엔이 덧붙였다. “제 돈으로 갚으시면 테오 님이 저한테 빚지십니다. 제 빚에는 수수료가 없지만, 테오 님이 그걸 편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 그건 맞아.”
테오가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천장을 보았다.
“한 주에 한 푼이라서 싸다고 생각했어.”
“한 주는 짧고 한 푼은 작습니다. 그래서 곱해 보기 전엔 작게 들립니다.”
“너는 처음부터 곱해 봤지.”
“저는 뭐든 곱해 봅니다.”
테오가 웃었다. 이번엔 조금 되었다. 그러고는 모로 돌아누웠다.
“모레 수수료는 낼 거야. 그 전엔 왼쪽 칸에 있어야지.”
“예.”
루엔은 촛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표를 한 번 더 떠올렸다. 칼브의 계약서 맨 아래 줄. 이 계약에는 이자가 없다.
이자라는 말만 없었다.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