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구청은 대성당 뒤편 낮은 돌집이었다.
문을 열면 긴 방에 책상이 여럿. 사제복 입은 사람들이 서류를 넘기고 도장을 찍었다. 혼인, 장례, 땅 경계, 유언. 교단은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 약속을 적어 두는 곳이기도 했다.
앞 책상의 늙은 서기 사제는 루엔의 표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대금업자 계약? 교구 필경사 도장이 있으면 된 거다. 가서 갚아라.”
“이자가 이름만 바뀐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같아서.” 서기 사제가 코웃음을 쳤다. “같아서 가져온 걸 다 봐 주면 교구청 문 닫는다.”
그때 방 안쪽 책상에서 누가 일어섰다.
“제가 보겠습니다.”
젊은 사제였다. 스물 중반쯤. 마르고 얼굴이 창백했다. 밤색 머리를 짧게 깎았다. 흰 사제복이 백색탑 하급 사제의 것이었다. 소매 끝이 젖어 있었다.
서기 사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젊은 사제가 루엔 앞으로 왔다. 표를 받으려고 손을 뻗다가, 멈췄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책상 옆 작은 놋대야로 갔다. 물을 떠서 두 손을 씻었다. 손가락 사이까지. 손톱 밑까지. 마른 천에 닦았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 표를 받았다.
루엔은 그 손을 보았다. 이 세계에서 손 씻는 걸 이렇게 꼼꼼히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여기는 백색탑 교구청이었다. 물은 살갗 구멍을 열어 악한 기운을 들인다고 가르치는 교단.
그런데 소매 끝이 젖어 있었다. 오늘만 젖은 게 아니었다. 천이 늘 젖었다 마른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렐 바스입니다.” 젊은 사제가 말했다. “이 교구에서 계약 서류를 봅니다.”
*
오렐은 칼브 계약서 사본과 루엔의 표를 나란히 펴 놓았다. 한 줄씩 읽었다. 읽는 게 느렸다. 한 줄을 읽고 나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 어딘가에 대 보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 오렐이 선반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교단 법이었다. 가죽 표지가 닳아 반들거렸다.
“빌려준 것보다 더 받지 말라.” 오렐이 한 곳을 짚었다. “셋째 권 열두째 장 첫 줄. 칼브 씨는 이 줄을 지켰다고 합니다. 스무 닢을 빌려주고 스무 닢을 받으니까요.”
“예.”
“그런데 열두째 장에는 줄이 더 있습니다.”
오렐이 손가락을 내렸다.
“품삯은 한 일만큼 받는다.”
오렐이 계약서의 서류 값 줄을 짚었다.
“서류 한 장을 쓰고 도장을 찍는 일은, 스무 닢짜리든 백 닢짜리든 같은 일입니다. 필경사는 같은 종이에 같은 글씨를 씁니다. 그런데 이 서류 값은 빌린 돈이 클수록 커집니다. 한 일에 따라 늘지 않고 빌린 돈에 따라 늡니다.”
오렐이 다음 줄로 넘어갔다.
“시간은 신의 것이니 팔지 말라.”
갱신 수수료 줄.
“주마다 새로 잇는 품삯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잇는 일이란 게 없습니다. 칼브 씨는 주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날이 가는 것만으로 돈이 붙습니다. 날이 가는 값. 시간을 판 겁니다.”
마지막 줄.
“값에 값을 얹지 말라.”
못 낸 수수료를 빚에 얹는 줄.
오렐이 책을 덮었다. 그리고 루엔의 표를 다시 펼쳤다. 왼쪽 칸, 오른쪽 칸. 끝의 예순셋과 백예순일곱.
“도련님 표가 이 세 줄을 숫자로 보여 줍니다. 빌린 돈이 크면 늘고, 날이 가면 늘고, 늘어난 데 또 붙습니다. 이름을 뭐라고 붙였든.”
“그럼 이자입니까.”
오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정하는 건 제가 아니라 교구 법정입니다.” 그가 말했다. “올리겠습니다. 이 표를 법정에 증거로 내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하나 청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하룻밤 주십시오. 이 표를 제가 한 칸씩 다시 셈해 보겠습니다. 법정에 올리는 숫자가 틀리면, 옳은 말도 틀린 말이 됩니다.”
*
이튿날 아침 오렐이 기숙사로 찾아왔다.
눈이 빨갰다. 밤을 샌 눈이었다.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루엔의 표를 옆에 놓고, 오렐이 제 손으로 다시 셈한 것이었다. 쉰두 주, 두 칸. 셈판 자국 같은 줄이 빽빽했다. 오렐은 루엔 글자를 몰라서 이 세계 막대와 갈래로 셈했다. 그래서 루엔 것보다 세 배는 길었다.
“다 맞았습니다.” 오렐이 말했다. “끝자리까지. 서른한째 주에서 제가 한 번 틀렸는데, 도련님 표와 다르길래 제 것을 다시 보니 제가 틀렸습니다.”
루엔은 종이 뭉치를 받았다. 한 장씩 넘겼다. 서른한째 주에 지운 자국이 있었다. 고친 값이 옆에 있었다. 맞았다.
루엔은 한참 그 종이를 들고 있었다.
“검산해 주신 분은 처음입니다.”
오렐이 눈을 깜빡였다.
“처음이요?”
“제 셈을 보고 맞다고 하신 분은 많았습니다. 틀렸다고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셈해서 맞는지 보신 분은 처음입니다.”
오렐은 잠깐 말이 없다가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처음 번진 웃음이었다.
“법정에 올릴 숫자니까요.”
“그래도 처음입니다.”
루엔은 수첩을 폈다. 사람 이름 장. 오렐 바스. 백색탑 하급 사제. 교구청 계약 서류. 스물 중반쯤. 그리고 한 줄. 검산: 쉰두 주 전부, 끝자리까지.
*
교구 법정은 교구청 안쪽 방이었다.
판관은 늙은 사제였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왔다. 말이 적었다. 양쪽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칼브가 먼저 말했다. 필경사와 함께 왔다. 회색 옷이 말쑥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교단 법 첫 줄을 외워서 말했다. 빌려준 것보다 더 받지 않았다. 교구 필경사가 도장을 찍었다. 품삯은 일한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학생은 스스로 서명했다. 누구도 억지로 빌리게 하지 않았다.
막힘이 없었다. 틀린 말도 없었다. 루엔은 뒷자리에서 들으며 칼브가 말한 것을 하나씩 적었다. 틀린 곳을 찾으려고 적은 게 아니었다. 틀린 곳이 없어서 적었다. 이 사람은 법의 첫 줄만큼은 정확히 알았다.
판관이 테오를 보았다.
“억지로 빌렸나.”
테오가 일어섰다. 무릎이 조금 떨렸다. 루엔은 테오 입술을 보았다. 소수를 세는 입술은 아니었다. 테오는 소수를 몰랐다.
“아닙니다.” 테오가 말했다. “제가 찾아가서 빌렸습니다. 서명도 제가 했습니다.”
칼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왜 빌렸나.”
“학비가 모자랐습니다. 그리고… 한 주에 한 푼이라서,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테오가 앉았다. 귀가 빨갰다.
판관은 한참 테오를 보다가 계약서 사본을 들었다. 갱신 수수료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싸다고 생각하게 적은 것도 셈이지.”
판관은 그 말만 하고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무릎 위에서 톡톡 움직이던 칼브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오렐이 일어섰다.
그는 열두째 장의 나머지 세 줄을 읽었다. 그리고 루엔의 표를 판관 앞에 펼쳤다. 자기가 밤새 다시 셈한 종이 뭉치를 그 옆에 놓았다.
“셈은 두 사람이 따로 했습니다. 끝자리까지 같습니다.”
판관이 표를 보았다. 오래. 왼쪽 칸 끝, 오른쪽 칸 끝. 그리고 맨 위의 한 줄. 기준: 손에 쥔 돈 열여덟 닢.
판관이 칼브를 보았다.
“서류 값을 백 닢짜리에선 얼마 받나.”
“열 닢입니다.”
“서류 한 장에 열 닢.”
“큰 돈 서류는 지키는 값이—”
“종이 한 장이 불에 타는 건 백 닢짜리나 스무 닢짜리나 같네.”
칼브의 입이 닫혔다. 처음이었다.
판관이 판결을 말했다. 짧았다.
계약은 무효. 서류 값과 갱신 수수료는 이름만 바꾼 이자다. 빌린 돈은 손에 쥐여 준 열여덟 닢으로 본다. 이미 받은 수수료 열 닢은 그 열여덟 닢을 갚은 것으로 친다. 남은 여덟 닢은 가을 학기 끝까지 나눠 갚는다. 그 뒤로 붙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한 줄 더.
“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필경사는 앞으로 대금 계약에 도장을 찍지 못한다.”
필경사가 고개를 떨궜다.
*
법정을 나서는데 칼브가 루엔 옆으로 왔다.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은반지 낀 손가락이 제 손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장부가 없는데도.
“하르트 도련님.”
“예.”
“셈을 잘하시더군요. 끝자리까지.”
“예.”
“저도 잘합니다. 셈도, 기억도.” 칼브가 웃었다. 좋은 웃음이었다. 좋아서 더 서늘했다. “잘 기억해 두지요.”
칼브는 그 말만 하고 골목으로 걸어갔다. 서두르지 않았다.
루엔은 수첩을 폈다. 사람 이름 장, 칼브 줄 아래 한 줄을 보탰다. 잘 기억해 두겠다고 함. 그러고는 그 옆에 날짜를 적었다. 기억한다는 사람의 말은 날짜와 함께 적어 두는 게 좋았다.
테오가 옆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덟 닢. 가을까지.”
“가을 학기 끝까지 스물여섯 주입니다. 한 주에 동화 네 닢이 조금 안 되면 됩니다. 방학 동안 못 내신 몫은 가을에 나눠 더하시면 됩니다. 식비에서 빼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것도 셈했어?”
“어제 셈했습니다. 판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는 셈해 두었습니다.”
테오가 루엔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거웠다. 루엔은 떼어 내지 않았다.
*
교구청 문간에서 오렐이 다시 놋대야에 손을 씻고 있었다.
법정에서 서류를 많이 만졌다. 칼브의 계약서, 필경사의 장부, 루엔의 표. 오렐은 그 손을 손가락 사이까지, 손톱 밑까지 씻었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루엔이 말했다.
“손이요?”
“예.”
오렐이 천에 손을 닦으며 웃었다. 조금 부끄러운 웃음이었다.
“서류는 여러 손을 거칩니다. 깨끗한 손으로 받고, 깨끗한 손으로 돌려주고 싶어서요. 기도 전에 손을 씻는 옛 의식이 교단 책 어디엔가 있는데, 요즘은 아무도 안 합니다. 저만 합니다. 버릇입니다.”
“씻으면 악한 기운이 든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르치지요.” 오렐이 소매 끝을 내려다보았다. 젖어 있었다. “그런데 저는 씻고 나서 아팠던 적이 없어서요.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첩 사람 이름 장, 오렐 줄 아래에 적었다. 서류 받기 전·후 손을 씻음. 손가락 사이, 손톱 밑. 기도 전 옛 의식. 씻고 나서 아픈 적 없음.
적고 나서 오렐을 보았다. 그러고는 한 가지를 더 적었다. 북쪽 노르벡의 앨드릭 사제님도 새벽에 몰래 씻으셨다.
오렐은 몰래 씻지 않았다. 교구청 문간, 사람들이 드나드는 자리에서 씻었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