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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되가 다르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6 18:50:47

네 살 가을, 세금 날이 왔다.

아침부터 성 마당이 시끄러웠다. 수레바퀴 소리, 소 울음, 자루 끄는 소리. 노르벡 마을 사람들이 거둔 곡식을 지고 성문으로 들어왔다. 밀, 보리, 귀리. 영주 몫을 내는 날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긴 탁자가 놓였다.

탁자 앞에는 집사 몰튼이 앉았다. 머리가 벗어진 마른 남자였다. 펜 끝을 잉크에 적시는 손이 빨랐다. 옆에는 셈판이 있었다.

탁자 앞에는 나무 되가 하나 놓였다.

루엔은 그 되를 오래 보았다.

참나무로 짠 둥근 통이었다. 아이 몸통이 들어갈 만큼 컸다. 쇠띠 두 줄이 둘렸다. 오래 써서 나무가 까맣게 윤이 났다. 테두리 한쪽이 닳아 조금 낮았다.

하르트 되였다. 이 영지에서 곡식을 재는 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썼다고 했다.

농부가 자루를 기울여 되에 곡식을 부었다. 곡식이 되 위로 봉긋 솟으면 몰튼이 장부에 막대 하나를 그었다. 되를 비우고, 다시 붓고, 다시 긋고.

“마흔일곱 되, 보리. 겔트네 집.”

몰튼이 셈판 돌을 옮기며 불렀다. 겔트라는 농부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루엔은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발끝으로 서 있었다. 네 살이 되니 키가 탁자 높이에 겨우 닿았다.

“도련님, 거기 계시면 곡식 먼지 드세요.”

마르타가 뒤에서 말렸다. 루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몰튼이 펜을 멈추고 흘끗 보았다.

“도련님은 셈 구경이 그렇게 재밌으십니까.”

“예.”

“허, 참. 형님 되시는 도련님은 이 날만 되면 마구간으로 도망가시는데.”

실제로 코넬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목검 소리가 마구간 쪽에서 들렸다.

몰튼은 웃으며 다시 막대를 그었다. 루엔은 그 막대의 수를 따라 셌다. 몰튼의 셈과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

점심 무렵, 로센령에서 곡물상이 왔다.

로센령은 하르트령 남쪽 이웃 영지였다. 하르트령보다 크고 장이 컸다. 해마다 가을이면 로센 상인들이 올라와 영지의 남는 곡식을 사 갔다. 북부의 작은 영지는 곡식을 돈으로 바꿀 데가 마땅치 않았다.

곡물상은 도르크라는 남자였다. 배가 나오고 목소리가 좋았다. 수레 두 대에 빈 자루를 싣고 왔다.

그리고 되를 하나 가져왔다.

도르크의 하인이 수레에서 되를 내려 탁자 옆에 놓았다. 소나무 통에 쇠띠 세 줄. 하르트 되와 비슷해 보였다. 조금 더 새것이었다.

가렛이 그 되를 보았다.

“그건 왜 가져왔소.”

“로센 되지요, 나리. 제가 로센 장에서 팔 곡식이니 로센 되로 사야 셈이 맞지 않겠습니까.”

“내 땅에서 사고파는 곡식은 하르트 되로 잰다.”

“그럼 제가 로센에 가서 다시 재야 하는데, 그건 제 손해지요.”

도르크는 웃으며 말했다. 말투가 부드러웠다. 이런 말을 해마다 해 온 사람의 말투였다.

가렛도 이 말을 해마다 들어 온 얼굴이었다.

“그럼 해 봅시다.”

*

하인이 하르트 되에 보리를 가득 담았다. 손바닥으로 테두리를 쓸었다. 그리고 그 보리를 로센 되에 옮겨 부었다.

로센 되가 다 차지 않았다.

테두리 아래로 손가락 한 마디쯤 비었다.

“보십시오.” 도르크가 손바닥을 펼쳤다. “하르트 되가 조금 작습니다. 그러니 값을 좀 깎아 주셔야지요.”

“당신 되가 큰 거요.”

“제 되는 로센 영주님 되와 같습니다. 조상 대대로 쓰는 거지요.”

“내 되도 조상 대대로 쓰는 거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구경하던 농부들이 킬킬거렸다. 해마다 보는 광경이었다.

루엔은 두 되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 맞나.

둘 다 맞았다. 둘 다 틀렸다. 하르트 되는 하르트 되 하나였다. 로센 되는 로센 되 하나였다. 어느 쪽이 「진짜 한 되」인지 정할 기준이 없었다.

크다, 작다는 말만 있고, 무엇보다 큰지는 없었다.

*

가렛은 바보가 아니었다.

“열 번 해 보자.”

하인이 로센 되에 보리를 열 번 채웠다. 채울 때마다 그 보리를 하르트 되로 옮겨 쟀다. 몰튼이 셈판에 돌을 놓았다.

로센 되 열 번이, 하르트 되로 열한 번 하고 조금 더였다.

가렛은 셈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센 되 열이 하르트 되 열하나를 넘는다. 값은 그만큼 올려 받겠소.”

도르크가 셈판을 들여다보았다. 입맛을 다셨다. 조금 넘는 부분을 놓고 한참 흥정이 오갔다. 결국 은화 몇 닢 사이에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루엔은 속으로 감탄했다.

아버지는 기준이 없는 걸 안다. 그래서 두 되를 서로 견줘 셈판으로 풀었다. 재빠르고 틀림없었다. 도르크도 바로 알아들었다. 둘 다 이 일을 오래 해 온 어른들이었다.

다만 그 「조금 더」는 끝내 아무도 재지 않았다.

흥정으로 사라졌다.

*

영주 창고의 곡식 흥정이 끝나자, 농부들 몇이 자기 몫의 남는 곡식을 들고 도르크 앞에 섰다. 세금을 내고 남은 걸 조금 팔아 겨울 소금 값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중에 핌이 있었다.

핌은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등이 굽고 흰 수염이 까칠했다. 손가락 마디가 옹이처럼 불거져 있었다.

“보리 열두 되요.”

핌이 말했다. 하르트 되로 집에서 재 온 양이었다.

도르크의 하인이 핌의 자루를 로센 되로 쟀다.

한 되, 두 되 … 열 되.

그리고 바닥에 조금 남았다. 로센 되를 다 채우지 못하는 양이었다.

“열 되요. 남은 건 한 되가 안 되니 치지 않소.”

도르크가 동화를 셌다. 한 되에 동화 두 닢. 스무 닢이 핌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핌은 동전을 보았다. 자루 바닥에 남은 보리를 보았다.

“… 집에서 잴 땐 열두 되였는디.”

“그거야 하르트 되로 잰 거고.”

핌은 잠깐 서 있었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하고, 남은 보리를 자루에 털어 넣었다.

“원래 그렇지요.”

루엔은 그 말을 들었다.

핌은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린다고 말하듯이 말했다.

루엔이 탁자 모서리에서 손을 떼고 핌에게 다가갔다. 마르타가 붙잡기 전이었다.

“할아버지.”

핌이 내려다보았다. 영주님 둘째 아들이었다. 허리를 조금 더 굽혔다.

“예, 도련님.”

“열두 되였습니까.”

“그럼요. 우리 집 되로 딱 열두 번 떴는디.”

“그럼 동화 스물네 닢입니다. 스무 닢이 아닙니다.”

핌이 눈을 끔벅였다. 옆에 있던 농부 몇이 웃었다.

“도련님, 되가 다르니께요. 사는 사람 되로 재는 게 원래 그런 거요.”

“되가 다르면, 누구 되가 맞습니까.”

핌은 대답하지 못했다. 웃지도 않았다. 한참 루엔을 보다가, 굽은 손으로 루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걸 알면 이 늙은이가 보리를 팔고 있겠습니까.”

핌은 자루를 메고 성문 쪽으로 갔다.

*

그날 저녁, 루엔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되가 둘입니까.”

가렛은 셈판을 정리하다 말고 아들을 보았다. 요즘 이 아이가 뭔가를 물으면 그는 잠깐 멈추는 버릇이 생겼다.

“둘이 아니다. 고을마다 있다. 교회 되도 따로 있고, 방앗간 되도 따로 있다.”

“전부 다릅니까.”

“조금씩.”

조금씩.

“왜 하나로 안 합니까.”

“누구 것으로?”

가렛이 되물었다. 진지한 물음이었다.

“내 되로 하자면 로센 영주가 싫어하고, 로센 되로 하자면 내가 싫다. 왕의 되가 있긴 하지만 왕도는 멀다. 원래 그렇다.”

원래 그렇다.

오늘만 두 번째였다.

루엔은 더 묻지 않았다. 네 살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말이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누구 것으로. 그게 진짜 문제였다.

킬로미터가 없는 세계. 그 말이 떠올랐다.

여기엔 킬로미터만 없는 게 아니다. 모두가 같이 쓰는 「한 되」도 없다.

*

“자, 도련님. 조금만 더 자요.”

밤이었다. 마르타가 이불 끝을 여며 주었다. 루엔은 눈을 뜨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네 살 방의 천장엔 서까래가 스물세 개였다.

루엔은 잠이 오지 않았다. 핌 할아버지 자루 바닥의 보리가 자꾸 떠올랐다.

“조금은 얼마만큼입니까.”

마르타의 손이 멈췄다.

“네?”

“조금. 얼마만큼입니까.”

오늘 하루 종일 들은 말이었다. 조금 작다. 조금 넘는다. 조금씩 다르다.

마르타는 이불 위에 손을 얹은 채 한참 생각했다. 그녀는 글을 몰랐다. 하지만 아이 넷을 키워 보낸 사람이었다. 아이가 진심으로 묻는 것과 떼쓰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았다.

“그럼… 서른까지 세는 동안이요.”

“서른.”

“네. 도련님이 서른까지 세는 동안 눈 감고 있으면, 그게 조금이에요.”

좋은 답이었다. 루엔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끝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 둘, 셋으로 세면 너무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서른은 정해졌지만 무엇을 서른 개 셀지는 정하지 않았다.

루엔은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둘. 셋. 다섯. 일곱.”

마르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넷은 어디 갔나.

“열하나. 열셋. 열일곱. 열아홉.”

자기 자신과 하나로만 나눠지는 수. 전생에 긴장할 때마다 세던 수였다. 이 세계에 와서도 그 수들은 그대로였다. 되처럼 고을마다 달라지지 않았다.

“스물셋. 스물아홉. 서른하나. 서른일곱.”

마르타는 서른을 넘어가는 숫자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러다 도련님이 무얼 세든, 눈을 감고 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마흔하나. 마흔셋. 마흔일곱. 쉰셋.”

루엔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쉰아홉. 예순하나. 예순일곱. 일흔하나.”

“일흔셋 … 일흔아홉 … 여든셋 …”

“여든아홉 … 아흔일곱 …”

“백하나 … 백셋 … 백일곱 …”

“… 백아홉.”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스물아홉 번째에서 멈췄다. 서른 번째는 백열셋이었다. 루엔은 그 수를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잠들었다.

마르타는 한참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촛불을 끄고 살금살금 방을 나갔다.

복도에서 엘리나와 마주쳤다.

“잠들었어?”

“예, 마님. 그런데…”

마르타는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이 셈을 하시는데요. 넷이랑 여섯을 빼먹으세요. 여덟도, 아홉도요. 이상한 수만 골라서 백 넘게까지 세시는데, 한 번도 안 막히세요.”

엘리나는 닫힌 문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날 밤 영주 부부의 방에는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가렛이 빵을 떼다 말고 말했다.

“가정교사를 부르겠다. 남쪽 수도원 학교에서 셈과 글을 가르치던 사람이다.”

코넬이 수프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나 벌써 글 배우잖아!”

“너 말고.”

가렛의 눈이 식탁 끝으로 갔다.

루엔은 빵을 씹다 멈췄다.

셈을 가르치는 사람.

그 사람은, 빈자리를 적을 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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