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ueil / 판타지 / 무색탑의 수학자 / 5화. 없는 것을 적는 법

Partager

5화. 없는 것을 적는 법

Auteur: Jino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16 18:50:54

가정교사는 첫눈이 오기 사흘 전에 왔다.

노새 한 마리에 책 궤짝 하나. 그게 짐의 전부였다.

이름은 펠릭스 온. 스물여덟 살이라고 했다. 키가 크고 말랐다. 손가락이 길었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옆에 잉크 얼룩이 배어 있었다. 씻어도 안 빠지는 얼룩이었다.

“남쪽 수도원 학교에서 여섯 해 셈과 글을 가르쳤습니다.”

펠릭스는 가렛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수도원을 왜 나왔소.”

“그건 묻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리. 죄를 지은 건 아닙니다.”

가렛은 한참 그를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변경까지 오겠다는 가정교사는 흔하지 않았다.

펠릭스의 눈이 가렛 뒤에 선 아이에게 갔다.

“이 도련님입니까.”

“그렇소.”

“몇 살이지요.”

“넷.”

펠릭스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네 살에게 가정교사를 붙이는 집은 없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었다.

루엔은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펠릭스도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먼저 눈을 돌리나, 하는 식이었다.

펠릭스가 먼저 웃었다.

*

첫 수업은 아버지 방에서 했다.

펠릭스는 궤짝에서 밀랍판을 꺼냈다. 나무틀에 밀랍을 얇게 바른 판이었다. 뾰족한 막대로 긁어 쓰고, 뭉툭한 끝으로 문질러 지웠다.

“도련님,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펠릭스가 밀랍판에 막대 셋을 그었다.

“셋입니다.”

“이건.”

갈래 하나, 막대 하나.

“여섯입니다.”

“이건.”

지붕 둘, 엇갈림 하나, 막대 넷.

“이백열넷입니다.”

펠릭스가 막대를 멈췄다.

“누가 가르쳤습니까.”

“아무도 안 가르쳤습니다. 아버지 장부를 봤습니다.”

펠릭스가 가렛을 돌아보았다. 가렛은 어깨를 조금 들썩였다. 그런 아이라는 뜻이었다.

펠릭스는 밀랍판을 내려놓았다.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도련님, 밖으로 나가지요. 이 판은 도련님한테 좁을 것 같습니다.”

*

마구간 옆에 모래 마당이 있었다. 기사들이 발 딛기를 익히는 곳이었다. 겨울 앞이라 비어 있었다.

펠릭스는 나뭇가지 둘을 주워 하나를 루엔에게 주었다.

“양이 삼백팔십칠 마리라고 해 봅시다. 적어 보십시오.”

루엔은 쪼그려 앉았다. 모래 위에 가지 끝을 댔다.

그리고 망설였다.

아버지 장부처럼 적으면 글자가 열 개였다. 지붕 셋, 갈고리 하나, 엇갈림 셋, 갈래 하나, 막대 둘.

루엔은 그렇게 적지 않았다.

전생에 쓰던 글자로 적었다. 세 글자였다. 셋을 뜻하는 둥근 글자, 여덟을 뜻하는 매듭 같은 글자, 일곱을 뜻하는 꺾인 글자.

펠릭스가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삼백팔십칠입니다.”

“제가 아는 글자가 아닌데요.”

“제가 쓰는 글자입니다.”

펠릭스는 웃지 않았다. 대신 쪼그려 앉아 루엔과 눈높이를 맞췄다.

“설명해 보십시오.”

루엔은 숨을 골랐다. 네 살의 입은 느렸다. 한 번에 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짧게 끊었다.

“글자가 열 개 있습니다. 하나부터 아홉까지, 그리고 하나 더.”

“그리고.”

“맨 오른쪽 글자는 하나짜리입니다. 그 왼쪽은 열짜리. 그 왼쪽은 백짜리.”

“같은 글자가요?”

“예. 같은 글자도 어디 놓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루엔은 가지 끝으로 여덟을 가리켰다.

“이건 가운데 있으니까 여덟 개의 열입니다. 여든.”

펠릭스는 한참 모래를 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셈판이군요.”

루엔이 고개를 들었다.

“셈판의 줄을 옆으로 눕혀 놓은 거지요. 줄마다 크기가 정해져 있고, 거기 돌을 몇 개 놓았는지를 글자 하나로 적는 거고.”

루엔은 속으로 놀랐다.

이 사람은 한 번에 알아들었다.

“… 예. 그렇습니다.”

“그럼 셈판 없이, 종이 위에서 바로 셈을 할 수 있겠군요.”

“예.”

펠릭스가 턱을 문질렀다. 눈이 반짝였다. 뭔가를 재 보는 눈이었다.

*

“이백칠은 어떻게 적습니까.”

펠릭스가 물었다. 시험이었다. 루엔은 알았다.

루엔은 모래에 적었다. 둘을 뜻하는 굽은 글자. 그 옆에 동그라미 하나. 그 옆에 일곱.

펠릭스가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이건 무엇입니까.”

“없음입니다.”

“없음.”

“열짜리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표시입니다.”

펠릭스가 몸을 뒤로 조금 뺐다. 가지 끝으로 동그라미 둘레를 천천히 그렸다.

“없는 걸 왜 적습니까.”

“안 적으면 스물일곱이 됩니다.”

루엔은 동그라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웠다. 둘과 일곱이 나란히 붙었다.

펠릭스는 그걸 보았다. 끄덕였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셈판에서는 빈 줄을 그냥 비워 둡니다. 그러면 종이에서도 한 칸 띄워 쓰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없는 것에 글자를 줄 까닭이 있습니까.”

좋은 물음이었다.

진짜 좋은 물음이었다. 전생에 이 문제를 두고 사람들이 몇백 년을 헤맸다. 루엔은 그걸 알았다.

“한 칸이 얼마만큼입니까.”

펠릭스가 눈을 깜박였다.

“예?”

“띄운 칸이요. 선생님이 띄우는 칸하고 아버지가 띄우는 칸하고 같습니까.”

루엔은 모래에 둘과 일곱을 다시 적었다. 이번엔 사이를 조금 띄웠다. 그 옆에 또 한 번, 조금 더 띄워서.

“이건 한 칸입니까, 두 칸입니까.”

펠릭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띄운 칸도 되처럼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적어야 합니다. 없다는 걸.”

한참 조용했다.

마구간에서 말이 투레질을 했다.

펠릭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모래 마당에 주저앉을 만큼.

“되처럼! 되처럼이라.”

그는 한참 웃다가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없는 게 둘이면요.”

“예.”

“없는 게 둘이면, 동그라미 둘입니까.”

“예.”

루엔은 모래에 적었다. 하나, 동그라미, 동그라미.

“백입니다.”

펠릭스가 그걸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무언가를 따라 셌다.

“하나 뒤에 없음이 둘이면 백. 셋이면…”

“천입니다.”

“넷이면 만.”

“예.”

“그럼 아무리 큰 수라도, 글자 열 개로 다 적을 수 있겠군요.”

“예.”

펠릭스는 가지를 쥔 채 굳어 있었다.

루엔은 그 얼굴을 보았다. 똑똑한 사람이 무언가를 처음 볼 때의 얼굴이었다. 전생의 연구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대개는 밤을 새우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

그 뒤로는 루엔도 시간을 세지 못했다.

펠릭스는 끝없이 물었다. 천에서 하나를 빼면 어떻게 적느냐. 루엔이 적었다. 아홉 셋이 나란히. 펠릭스는 그걸 보고 한참 끙끙댔다. 빈자리에서 어떻게 빌려 오느냐. 루엔은 셈판으로 보여 주었다. 셈판에서 윗줄 돌 하나를 아랫줄 돌 열 개로 바꾸듯이.

“아.”

펠릭스는 알아들을 때마다 짧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곧장 다음 걸 물었다.

더하기를 했다. 빼기를 했다. 펠릭스가 수도원에서 쓰던 셈 문제를 모래에 적어 주면, 루엔이 자기 글자로 바꿔 풀었다. 펠릭스는 루엔의 글자를 하나씩 따라 그리며 익혔다. 매듭 같은 여덟을 자꾸 거꾸로 그렸다.

“아닙니다. 위가 작습니다.”

“위가 작다고요.”

“예. 위가 작고 아래가 큽니다.”

펠릭스가 다시 그렸다. 이번엔 너무 작았다.

“… 대충 이 정도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펠릭스가 또 웃었다.

모래 마당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모래 위의 글자도 늘어났다. 한쪽 구석부터 반대쪽 구석까지 숫자가 빼곡했다.

*

“두 사람, 거기서 뭐 해요?”

엘리나였다. 숄을 두르고 모래 마당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온 참이었다. 해가 성벽 뒤로 거의 넘어가 있었다.

펠릭스가 벌떡 일어났다. 무릎에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마님, 죄송합니다. 시간을 잊었습니다.”

“무얼 하길래요.”

엘리나가 다가왔다. 모래 위에 빼곡한 낯선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치맛자락을 조심스레 걷었다.

“이게 다 무어예요?”

“숫자입니다, 마님. 도련님의 숫자입니다.”

“루엔의?”

엘리나는 아들을 보았다. 루엔은 가지를 쥔 채 흙투성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엘리나의 눈이 모래 위의 동그라미 하나에 멈췄다.

“이 동그라미는 뭐예요? 여기저기 있네.”

펠릭스가 대답했다. 목소리에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없음이랍니다.”

“없음?”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표시입니다. 도련님 말로는, 없는 것도 적어 둬야 한답니다.”

엘리나는 동그라미를 한참 보았다.

그러다 치맛자락을 놓고, 모래 마당 가장자리에 앉았다. 루엔 옆에.

“어머니, 저녁은.”

“조금 있다 먹자.”

엘리나는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건, 무엇이 비어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그려 두는 거네.”

루엔은 어머니를 보았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전생에도 없었다.

“… 예.”

“그럼 이것 좀 더 보여 줘. 나도 보고 싶어.”

루엔은 다시 모래에 적었다. 펠릭스가 옆에서 설명을 보탰다.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가끔 물었다. 루엔이 답했다.

마르타가 등불을 들고 찾으러 왔을 때, 세 사람은 여전히 모래 마당에 앉아 있었다. 해는 진 지 오래였다. 식탁의 수프는 두 번 데워졌다고 했다.

*

밤이 되자 바람이 불었다.

이튿날 아침, 하인 하나가 갈퀴를 들고 모래 마당으로 갔다. 기사들이 쓰기 전에 모래를 고르게 펴 두는 게 그의 일이었다.

엘리나가 창문으로 그걸 보았다.

“기다려!”

마님이 치맛자락을 쥐고 뛰어나오는 걸 성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모래 위의 글자는 밤바람에 반쯤 지워져 있었다. 엘리나는 그 가운데 아직 선명한 동그라미 하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날 오후, 루엔은 어머니의 수틀을 보았다.

하얀 아마천 위에, 옅은 잿빛 실로 동그라미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아무 무늬도 넣지 않았다.

“지우지 말라고 했는데 바람이 먼저 지웠어.” 엘리나가 바늘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래서 여기에 적어 뒀지.”

루엔은 그 동그라미를 오래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원이었다.

*

그날 저녁, 펠릭스가 루엔의 방 문을 두드렸다.

손에 밀랍판을 들고 있었다. 밤새 무언가를 긁어 쓴 흔적이 빼곡했다. 눈 밑이 거뭇했다.

“도련님. 하나 여쭙겠습니다.”

“예.”

“어젯밤 셈 문제 서른 개를 제 방식으로 한 번, 도련님 글자로 한 번 풀어 봤습니다.”

펠릭스는 밀랍판을 내밀었다.

“편한 건 알겠습니다. 적는 것도 짧고요. 그런데 빠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셈판으로 스무 해를 셈했습니다. 손이 먼저 갑니다.”

루엔은 밀랍판을 보았다. 펠릭스의 매듭 같은 여덟은 여전히 위가 조금 컸다.

펠릭스가 허리를 펴고 말했다.

“내일, 겨뤄 보시지요. 제 셈판과 도련님의 동그라미. 곱셈으로.”

Continuez à lire ce livre gratuitement
Scanner le code pour télécharger l'application

Dernier chapitre

  • 무색탑의 수학자   86화. 열 가운데 하나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 무색탑의 수학자   85화. 무는 금화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 무색탑의 수학자   84화. 여섯째 서클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 무색탑의 수학자   83화. 열일곱과 일흔하나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 무색탑의 수학자   82화. 사흘째 오후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 무색탑의 수학자   81화. 세 번 센 불빛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

Plus de chapitres
Découvrez et lisez de bons romans gratuitement
Accédez gratuitement à un grand nombre de bons romans sur GoodNovel. Téléchargez les livres que vous aimez et lisez où et quand vous voulez.
Lisez des livres gratuitement sur l'APP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