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름 방학에 방앗간 기둥 장부는 한 해가 찼다.
삼백예순다섯 칸. 토빈은 장부를 내밀며 가슴을 폈다. 빠진 날이 없다고.
루엔은 장부를 넘겼다. 여름, 가을, 겨울. 봄. 봄 석 달 칸에서 손이 느려졌다. 숫자가 고왔다. 너무 고왔다. 하루 오르면 이튿날 조금 더 오르고, 사흘째 조금 내렸다. 날마다 그렇게 얌전했다. 앞 가을과 겨울의 칸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 온 이튿날엔 금 셋이 뛰었고, 가문 주엔 날마다 같은 금에 머물렀다. 강은 얌전하지 않았다.
루엔은 영점을 셈하지 않았다.
“한 해를 더 적어 주십시오.”
“한 해를 더요?” 토빈이 눈을 끔벅였다. “왜요.”
루엔은 대답을 골랐다. 여러 개가 떠올랐다. 고른 건 가장 짧은 것이었다.
“한 해로는 모자랍니다.”
토빈은 까닭을 더 묻지 않았다. 투덜거리며 장부 뒤에 새 종이를 덧대었다. 루엔은 토빈이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을 짚는 걸 보았다. 그리고 수첩에 적었다. 기둥: 한 해 더. 영점은 열네 살 여름.
*
가을 첫 보름날 밤, 조합 회관에서 되를 댔다.
클라리사가 산가지로 받아 적었다. 도장 찍힌 되 서른하나. 스물아홉이 맞았다. 둘이 찌그러져 있었다. 하나는 수레에서 떨어졌고, 하나는 누가 돌에 대고 두드렸다.
곡물 조합장이 찌그러진 둘의 도장을 끌로 긁어 지웠다. 누가 시키지 않았다.
“두드려 고쳐서 다시 가져오시오. 올해 도장은 그때.”
루엔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규칙이 사람 손으로 돌고 있었다.
도서관 뒤 작은 방에서는 로그표가 사천오백 칸을 넘었다. 벽의 네 무더기는 달마다 작아졌다. 받아올림 무더기가 가장 빨리 줄었다. 가장 어린 학생이 받아올림을 가장 덜 틀리게 되어 있었다.
*
초겨울 어느 주, 편지가 셋 왔다.
첫째는 그 주 첫날이었다. 노란 밀랍. 망치와 컴퍼스가 엇갈린 무늬. 황색탑.
하르트 학생. 봄에 말한 새김 규격 말일세. 조건은 나중에 셈하기로 했지. 그 전에 하나 보겠네. 황색탑 원진 도면 세 장을 넣었네. 어느 것이 한 번에 새겨지는지, 안 되면 몇 군데서 끊기는지. 답을 주게. 오틸리에 브라이트.
도면 세 장이 들어 있었다. 다리 밑에 새기는 원진, 성벽 속 원진, 종탑 원진.
루엔은 사흘 밤을 셌다. 도면을 셌고, 셀 수 없는 것은 셀 수 없다고 적었다. 땅을 볼 수 없었으니까.
답장은 숫자였다.
다리 원진: 홀수 점 둘. 한 번에 새겨짐. 동쪽 끝에서 시작할 것.
성벽 원진: 홀수 점 여섯. 두 군데서 끊김. 선 둘을 더하면 한 번에. 더할 자리를 그려 넣음.
종탑 원진: 홀수 점 넷. 한 군데서 끊김. 다만 가운데 작은 원 둘레의 점 하나는 도면의 먹이 번져 셀 수 없음. 땅을 세어 주십시오.
그리고 맨 아래 한 줄. 도면만 세었습니다. 땅은 세지 않았습니다.
규격을 팔겠느냐는 말에는 답을 적지 않았다. 무엇을 파는 것인지, 루엔은 아직 셈하지 못했다.
*
둘째는 사흘째였다. 푸른 밀랍. 물결 무늬. 청색탑.
봉투 안에 종이가 두 장 있었다. 한 장은 늦겨울 강당 시험 보고서의 사본이었다. 제목 한가운데 작게 끼워 넣은 낱말까지 그대로 옮겨 적혀 있었다. 사기 아님 확인.
다른 한 장은 짧았다.
보고서는 탑 서고에 들어갔다. 사본을 보낸다. 네가 베낀 것과 대 보아라. 이졸드.
그리고 그 아래, 다른 줄보다 조금 작은 글씨로.
오스윈 마로에게 안부를.
루엔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이졸드의 글씨는 작고 반듯했다. 마지막 줄만 획 하나가 조금 떨려 있었다.
루엔은 사본을 제가 베낀 것과 한 줄씩 대 보았다. 모두 같았다. 한 군데만 달랐다. 이졸드 사본엔 둘째 과녁판 금이 열여섯, 루엔 것엔 열일곱. 루엔은 그날 헤일로크가 읽은 값을 떠올렸다. 열여섯. 제가 옮겨 적다 틀린 것이었다.
답장은 짧았다.
사본 받았습니다. 대 보았습니다. 한 군데 제가 틀렸습니다. 둘째 판은 열여섯입니다. 제 것을 고쳤습니다. 안부는 전하겠습니다. 루엔 하르트.
*
셋째는 닷새째였다. 루엔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교장 마그누스 할베르크가 루엔을 불렀다. 교장실 탁자 위에 편지가 한 통 펼쳐져 있었다. 붉은 밀랍이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밀랍에 흰 탑이 찍혀 있었다.
“읽어라.”
왕립 마법학교 교장께.
왕도에 영창 없이 마법을 행하는 학생이 있다 들었습니다. 영창은 마법사의 기도입니다. 기도 없는 마법이 신앙에 어긋나는지, 교구에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때는 교구가 정해 알리겠습니다. 학교의 넓은 뜻을 믿습니다.
백색탑주 카시미르 알바.
루엔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누구인지는 누구나 알았다.
“언제입니까.”
“적혀 있지 않다.” 교장이 말했다. “교구가 정한다. 내일일 수도 있고, 몇 해 뒤일 수도 있다.”
교장은 편지를 접었다. 흰 눈썹 아래 눈이 루엔을 보았다.
“네 쪽 숫자를 모아 두어라.”
“무슨 숫자입니까.”
“네가 한 것 전부. 어디서 무엇을 쟀고, 누가 봤는지. 틀린 것까지.”
“틀린 것도요.”
“틀린 걸 숨긴 숫자는 한 번 틀리면 다 틀린 게 된다. 틀린 걸 적어 둔 숫자는 그 한 칸만 틀린다.” 교장이 말했다. “너한테 배웠다.”
루엔은 고개를 숙였다. 교장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루엔은 수첩과 장부와 표를 다시 묶었다. 매직 미사일 앞 겨누기. 사일런스. 신성광 어림. 검사관 시험. 천 판. 명부. 결계 이음매. 날짜와 곳과 본 사람. 틀린 칸엔 틀렸다고.
백색탑에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편지는 교장에게 온 것이었다. 루엔의 답은 이 묶음이었다.
이튿날 루엔은 교구청에 갔다. 오렐 바스가 방 안쪽 책상에 있었다. 소매 끝이 여전히 젖었다 마른 얼룩이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오렐은 먼저 놋대야에 손을 씻었다.
“교구 심사는 어떻게 합니까.”
오렐의 손이 천 위에서 멈췄다. 소문은 교구청에도 와 있었다.
“교구 심사 장부에 이름이 먼저 오릅니다. 그다음 교구장께서 날을 정해 부르십니다.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오렐이 천을 접었다. “이름만 올라 있고 몇 해 동안 안 불린 사람도 있습니다. 부르는 날을 정하는 것도 셈이지요.”
“누구의 셈입니까.”
오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루엔이 들고 온 묶음을 보았다.
“그게 도련님 셈이군요.”
“틀린 칸까지 묶었습니다.”
오렐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번지는 웃음.
“그럼 제가 한 칸씩 다시 셈해 드릴 일은 없겠네요. 부르는 날이 오면.”
“그날은 다시 셈해 주십시오. 검산은 늘 필요합니다.”
*
그 밤 루엔은 수첩 맨 뒷장을 폈다.
「모르는 것」 첫 줄. 샌 마나는 어디로 가나. 그 바로 밑 틈에 두 해 전 적은 줄. 신성광: 신입생 라이트 천 개쯤. 날마다 흘림. 이만큼이 날마다 어디로 가나.
그 줄 옆에 작게 한 줄을 더 붙였다.
결계 두 이음매: 백 년 동안 새벽마다 교관 셋의 열에 넷 가까이. 이것도.
새 줄은 만들지 않았다. 같은 물음의 가지였다. 가지가 늘고 있었다.
*
오스윈에게 가는 편지는 그 주 끝에 썼다.
영창책 둘째 장이었다. 한 장에 겨울 하나라고 약속했었다. 둘째 장은 겨울 둘이 걸렸다. 지난겨울엔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라 한 줄도 보내지 못했다. 그 까닭을 루엔은 편지에 적지 않았다.
스승님. 둘째 장입니다. 틀렸을지도 모름이 네 군데였습니다. 스승님 표기 가운데 틀린 것 하나. 옛 기록이 틀린 것 둘. 그리고 제가 틀린 줄 알았던 것 하나. 셋째 줄 반 박자 쉼은 제가 틀렸다고 적어 보냈다가 다시 보니 스승님이 옳았습니다. 서고의 거울의 책 옆 칸에 더 오래된 기록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한 번 어겼습니다. 지난겨울 한 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올해 두 장을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한 해에 한 장은 틀림없이 할 수 있는 만큼입니다.
청색탑 검사관 이졸드님께서 안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루엔 하르트. 열세 살 겨울.
보움 상단의 겨울 짐마차가 북쪽으로 떠났다. 편지는 거기 실렸다.
*
늦겨울, 식당 창이 번쩍였다.
저녁을 먹던 학생들이 일어섰다. 실습장 쪽이었다. 뒤이어 윙 하는 소리가 식당 유리를 떨게 했다.
디트마르였다. 넷째 고리를 닫는 빛이었다. 한참 뒤 디트마르가 식당에 들어왔다. 얼굴이 붉었다. 루엔 식탁 앞에서 멈췄다.
“먼저 쌓았다.”
“축하합니다.”
“… 몇 번 번쩍였냐고 안 묻냐.”
“세 번입니다. 식당 창으로 셌습니다.”
디트마르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러고는 짧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웃음이었다. 두 해 전 모래판에서처럼.
“다음엔 한 번으로 줄인다.”
“그럼 저는 셀 게 줄어듭니다.”
*
오스윈의 답장은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왔다.
짐마차가 돌아오는 길에 실어 왔다. 편지는 한 장이었다. 접힌 종이를 펴자 글씨가 한 줄 있었다. 떨리는 획이 섞인 글씨.
이졸드가 아직 검사관이더냐.
그뿐이었다.
둘째 장 이야기는 없었다. 약속을 어긴 이야기도 없었다. 루엔은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루엔은 그 한 줄을 오래 보았다. 한 줄이 편지 전체보다 무거웠다. 무게를 셈할 수 없었다.
수첩 사람 이름 장, 이졸드 줄 아래 적었다. 스승님이 물으심: 아직 검사관이냐. 전할 것.
*
생일까지 아흐레였다.
그 밤 루엔은 셋째 고리 바깥에 그릴 원을 셈했다. 앞의 셋을 모두 감싸는 둘레. 매듭 자리가 닫힐 곳. 셋째 때보다 둘레가 길었다. 틀릴 곳도 많았다.
셈은 거의 끝나 있었다. 한 군데만 남았다. 넷째 고리가 셋째 고리와 맞닿는 자리. 거기서 모이는 선을 세면 몇이 될까. 봄 돌마당에서 배운 대로.
루엔은 밀랍판을 내려놓았다. 창밖에 별이 떠 있었다. 북쪽 별. 마흔여섯 칸 하고 조금.
테오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몇까지 셌어?”
“백아흔일곱.”
“결투 때보다 적네.”
“소수는 거기서 멈췄습니다. 지금은 선을 셉니다. 넷째 고리와 셋째 고리가 만나는 자리에서.”
“그게 더 떨리는 거야, 덜 떨리는 거야.”
루엔은 대답을 골랐다. 고르지 못했다.
테오가 이불 속에서 웃었다. 루엔은 촛불을 껐다. 넷째 고리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