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새김 날 아침, 돌마당에 석공 여섯이 모였다.
늙은 석공이 맨 앞이었다. 나머지는 그의 아들과 손자, 조카들이었다. 한 집안이 백 년 가까이 이 원진을 팠다고 했다. 끌과 망치가 가죽 두루마리 안에 크기대로 꽂혀 있었다.
루엔은 종이 한 장을 늙은 석공에게 건넸다.
새기는 차례였다. 여는 자리에서 닫는 자리까지. 선을 토막으로 나눠 번호를 붙였다. 하나부터 서른일곱까지. 토막마다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새로 긋는 스물두 걸음짜리 선은 열아홉째 토막이었다.
석공은 글을 몰랐다. 그래도 숫자는 읽었다. 루엔 글자 숫자는 장터 빵집 널빤지에서 배웠다고 했다.
“번호대로 가면 한 번도 안 뗀다.”
“예. 번호대로 가시면.”
석공이 종이를 접어 가슴께 옷 속에 넣었다. 끌을 뽑았다.
*
돌마당 가장자리에 구경꾼이 늘었다. 학생들, 교관들. 헤일로크 교수는 교탁 대신 돌 의자에 앉아 보정표를 무릎에 펴 놓았다. 교장은 강당 계단 맨 위에 섰다.
그리고 낯선 여자 하나.
마흔 후반쯤. 키는 크지 않았다. 어깨가 넓었다. 노란 겉옷을 걸쳤는데 치마 끝에 돌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었다. 곧장 공사장에서 온 사람 같았다. 손등이 거칠었다.
“황색탑 건설원장이래.” 테오가 루엔 귀에 속삭였다. “오틸리에 브라이트. 일곱 고리.”
“왜 왔습니까.”
“저 도면을 그린 게 황색탑이라서 해마다 사람을 보낸대. 근데 원장이 직접 온 건 처음이래.”
구경꾼 틈에 디트마르도 있었다. 팔짱을 끼고 턱을 들고. 루엔을 보자 턱으로 돌마당을 가리켰다.
“해마다 끊기는 데서 번쩍인다며. 오늘 번쩍이면 네 셈이 틀린 거지.”
“예. 번쩍이면 제가 틀린 겁니다.”
“그럼 번쩍일 때까지 보고 가지.”
“번쩍이지 않으면요.”
디트마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돌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루 종일 있을 사람처럼.
여자는 돌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새 선을 그을 자리에 석회로 그어 둔 줄 앞에서 멈췄다. 쪼그려 앉아 돌바닥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들보를 두드려 속이 찼는지 보는 사람처럼.
*
끌이 여는 자리에 닿았다.
첫 토막. 늙은 석공의 망치가 고르게 내려갔다. 딱, 딱, 딱. 옛 홈을 따라 돌가루가 튀었다. 아들이 뒤에서 솔로 가루를 쓸었다. 손자가 물을 부었다.
둘째 토막. 셋째. 한 토막을 파면 석공이 가슴께 종이를 꺼내 번호를 짚었다. 짚은 번호에 손톱으로 금을 그었다.
한낮이 되기 전 열한째 토막까지 갔다. 북쪽 작은 원 둘레였다.
열두째 토막에서 석공의 끌이 멈췄다.
석공은 끌을 든 채 한참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끌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홈을 쓸었다. 해마다 그러던 것처럼.
“도련님.”
루엔이 다가갔다.
“여기, 점이 둘이오.”
석공이 손가락으로 짚었다. 한 자리. 그리고 손바닥 두 개쯤 떨어진 다른 자리. 두 자리 사이에 짧은 홈이 이어져 있었다.
루엔은 제 종이를 보았다. 그 자리엔 점이 하나였다. 선 여섯이 모이는 점. 짝이 맞는 점.
“도면엔 하나입니다.”
“도면엔 하나지. 땅엔 둘이오.” 석공이 말했다. “가까워서 도면쟁이가 한 점으로 그렸나 보오. 우리 아버지도 여기서 헷갈렸다고 했소. 마흔 번을 파 보면 손가락이 알지.”
루엔은 쪼그려 앉았다. 두 점을 하나씩 셌다. 이쪽 점에 모이는 선 넷. 저쪽 점에 넷. 사이의 짧은 홈이 두 점을 잇고 있었다.
넷과 넷. 둘 다 짝이 맞았다. 한붓은 여전히 됐다.
그런데 차례가 틀렸다.
루엔의 종이는 두 점을 한 점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 사이 짧은 토막이 차례에 없었다. 번호대로 가면 끌은 이쪽 점에서 곧장 다음 토막으로 넘어갔다. 손바닥 두 개짜리 토막 하나가 파이지 않고 남는다. 나중에 그걸 파려면 끌을 떼고 다시 대야 했다.
한 군데가 끊길 뻔했다. 백 년 동안 끊기던 두 군데를 고치려다, 새로 한 군데를.
루엔은 일어섰다.
“제가 틀렸습니다.”
돌마당이 조용해졌다. 구경꾼들이 그 말을 들었다. 강당 계단 위 교장도, 돌 의자의 헤일로크도.
“도면을 셌습니다. 땅을 세지 않았습니다.”
구경꾼 쪽에서 오틸리에 브라이트의 눈썹이 올라갔다. 디트마르는 팔짱을 풀었다가 다시 꼈다.
루엔은 종이를 펴고 그 자리에서 차례를 고쳤다. 열두째 토막 앞에 짧은 토막 하나를 끼웠다. 번호가 하나씩 밀렸다. 서른일곱이 서른여덟이 되었다. 고친 차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손가락으로 따라가 보았다. 두 번. 끌을 떼는 자리가 없었다.
석공이 끌 끝으로 두 점 가운데 한 점 옆 돌에 작은 금을 새겼다. 세모 하나.
“이건 뭡니까.”
“다음 해 파는 놈이 도련님처럼 안 틀리라고.”
석공의 손자가 킥킥 웃었다. 루엔은 웃지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이 학교에 와서 두 번째로 깊이 숙인 인사였다.
*
해가 기울 무렵 서른여덟째 토막이 닫는 자리에 닿았다.
석공이 끌을 뗐다. 처음 끌을 댄 뒤로 처음이었다.
석공은 한참 끌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돌마당을 둘러보았다. 북쪽 작은 원 옆, 해마다 끊기던 자리. 남쪽, 해마다 끊기던 자리. 두 자리 모두 홈이 이음매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흔한 번째에.” 석공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교장이 계단을 내려왔다. 여는 자리 앞에 섰다. 손바닥을 홈 위에 얹었다. 영창은 짧았다. 교장의 마나가 홈으로 들어갔다.
돌마당 전체가 아주 조금 떨렸다. 발바닥으로만 느낄 수 있을 만큼. 마나가 홈을 따라 도는 것이었다. 북쪽 원을 돌고, 가운데로 들어와, 새 선 스물두 걸음을 지나, 남쪽으로.
사람들 눈이 두 자리로 갔다. 해마다 끊기던 두 자리.
번쩍이지 않았다. 윙 소리도 없었다.
닫는 자리에서 교장이 세워 둔 작은 돌판에 흰 결이 올랐다.
돌 의자에서 디트마르가 일어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마당을 떠났다. 떠나면서 한 번 돌아보았다.
석공들이 연장을 챙기는 동안 손자가 루엔 옆으로 왔다. 열 살 남짓. 물을 붓던 아이였다.
“그 세는 거. 나도 할 수 있어요?”
루엔은 흙바닥에 별을 하나 그렸다. 꼭짓점 다섯, 한 번에 긋는 별.
“점마다 선이 몇 개 모이는지 세 보십시오.”
아이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둘, 둘, 둘, 둘, 둘. 그리고 안쪽 엇갈리는 자리. 넷, 넷, 넷, 넷, 넷.
“홀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디서 시작해도 시작한 데서 끝납니다.”
아이가 막대기로 별을 따라 그었다. 한 번에. 끝이 처음에 닿았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늙은 석공은 연장 두루마리를 묶다가 손을 멈추고 그 별을 보고 있었다.
*
그날 밤은 추웠다. 봄밤이었지만 서리가 올 만큼.
루엔은 테오와 돌마당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마다 이런 밤이면 끊긴 두 자리에서 서리가 반짝거린다고 석공이 말했었다.
반짝거리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교관 셋이 여는 자리에 섰다. 해마다 하던 대로. 루엔은 닫는 자리에 마나석 과녁판을 세워 두었다. 결계가 가득 차면 닫는 자리로 마나가 넘어와 판에 결이 오를 것이었다.
교관들이 부었다. 루엔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지난해 당번 장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봄. 새벽 당번 셋. 모래시계 한 번씩. 여러 해 장부가 다 비슷했다.
오늘 판에 결이 오른 건 모래시계가 반을 조금 넘게 떨어졌을 때였다.
교관 하나가 부는 걸 멈추고 판을 보았다. 다시 모래시계를 보았다.
“벌써?”
다른 교관이 루엔 손의 모래시계를 빼앗듯 가져갔다. 뒤집어 보고 흔들어 보았다.
“이 모래시계가 빠른 거 아니냐.”
“기숙사 복도 물시계에 대 보시면 됩니다. 지난가을 새로 들인 통입니다. 금 하나에 이 모래시계 한 번입니다.”
교관이 입을 다물었다. 그 통이 누구 것인지는 기숙사 사는 사람이면 다 알았다. 그 시계 아이.
루엔은 그날부터 이레 동안 새벽마다 쟀다. 반 번 하고 조금. 반 번 하고 조금. 날마다 모래 한 줌 안쪽으로 같았다. 열에 넷 가까이가 줄었다.
백 년 동안 두 이음매에서 새던 몫이었다.
*
이레째 아침, 황색탑 건설원장이 루엔을 불러 세웠다. 돌마당 가장자리였다. 치마 끝 돌가루는 그대로였다.
“하르트 학생이지.”
“예.”
“오틸리에 브라이트일세. 황색탑.” 여자가 말했다. 말투가 짧고 거침이 없었다. “이레 동안 새벽마다 쟀다며. 교관들이 떠들더군.”
“예.”
“열에 넷.”
“넷 가까이입니다. 넷은 아닙니다.”
오틸리에가 크게 웃었다. 돌마당 건너편 석공들이 돌아볼 만큼.
“황색탑은 해마다 원진을 수백 개 새기네. 다리 밑에, 성벽 속에, 대성당 천장에. 큰 것마다 한두 군데씩 끊기지. 끊긴 데는 마나를 더 붓고. 백 년 동안 원래 그런 줄 알았어.” 오틸리에가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그 점 세는 법. 새기는 차례 짜는 법. 규격으로 만들어서 황색탑에 팔게.”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셈할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을 파는 것인지, 팔면 누가 쓰는지, 값은 무엇으로 매기는지.
오틸리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조건은 나중에 셈하지. 편지를 하겠네.”
그녀가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가 늙은 석공 앞에서 멈췄다. 석공이 새겨 둔 작은 세모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누가 새겼나.”
“제가.” 석공이 말했다.
오틸리에는 그 세모를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석공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탑 원장이 석공에게 하는 인사로는 깊었다.
*
그 주에 헤일로크 교수가 보정표를 펴고 루엔을 불렀다.
표 맨 위 여백. 한 해 전에 적은 줄이 있었다. 쉰 뼘 넘는 원진: 바깥 줄 둘레. 두 줄 홈이라 셈할 때 조심할 것.
그 아래 새 줄이 있었다. 먹이 아직 짙었다.
원진 선이 만나는 자리마다 모이는 선을 셀 것. 홀수 자리가 둘을 넘으면 한 번에 못 새긴다. 셀 때는 도면 말고 땅을 셀 것.
그리고 그 아래 작게.
땅은 석공 영감이 먼저 셌음.
“두 번째 줄일세.” 교수가 말했다. 한 마디씩. “사십 년 동안. 한 줄도 안 적었는데. 두 해에. 두 줄이군.”
“세 번째 줄은 제가 틀린 것으로 적어 주십시오.”
교수가 굵고 느리게 웃었다.
“그건. 네 수첩에. 있지 않나.”
있었다. 루엔의 수첩 고친 것 쪽에. 도면을 셌음. 땅을 세지 않았음. 석공. 열세 살 봄.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
마르케스 본대가 온 건 열흘 뒤였다.선봉 뒤로 깃발이 끝없이 이어졌다. 링겐 고개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틀 동안 끊이지 않았다. 강 동쪽 둑 위에 천막이 들어찼다. 붉은 천막은 스무 채가 넘었다.“이만 넘는다.”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이만 오천쯤.”천막 안 사람들이 루엔을 보았다. 귀족 회의에서 삼만이 한계라고 한 사람이었다.“이만 오천이면 셈 안입니다.” 루엔이 말했다. “강 아랫마을 곡식을 우리가 먼저 옮겼으니 오래 못 버팁니다. 문제는 마법사입니다.”“몇이오.”“어젯밤 번쩍임을 셌습니다. 쏜 자리가 마흔하나. 한 자리에 한 사람이면 마흔하나.”*싸움은 이튿날 새벽에 시작됐다.적은 쉬지 않고 쏘았다. 파이어볼이 선 앞까지 와서 떨어졌다. 선을 넘으려는 마법사는 궁수가 막았다. 방패벽 뒤에서 아군은 엎드려 버텼다. 적 보병이 여울을 건너려 했고, 아군 창병이 여울 끝에서 밀어냈다.루엔은 둔덕 위에서 한 가지만 했다.셌다.번쩍임 하나에 밀랍판에 금 하나.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금을 묶어 따로 적었다. 이 세계의 한 시간, 낮을 열둘로 나눈 그 한 칸.첫날 번쩍임은 삼백열두 번이었다.시간마다 고르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넷. 해 질 녘까지 줄지 않았다.“하나도 안 줄었어.” 테오가 루엔 어깨 너머로 밀랍판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지치지도 않나.”“오늘은 안 지칩니다. 그릇이 가득 찬 채로 왔습니다.”한낮이 지나자 루엔의 손목이
첫 불은 해가 진 직후에 왔다.강 건너 둑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했다. 한 점. 그리고 둘, 셋. 빛이 먼저 오고, 한참 뒤에 소리가 왔다. 쿵. 둔덕 아래 밭에서 흙이 치솟았다. 불붙은 짚단이 사방으로 튀었다.“파이어볼이다!”앞줄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엎드렸다. 기사들이 말을 돌렸다. 둔덕 위 막료 자리에서 루엔은 엎드리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번쩍.루엔은 셌다. 하나, 둘.쿵.“둘.” 루엔이 말했다. “구백 걸음 남짓.”옆에 엎드린 테오가 고개만 들었다. “뭐가?”“저 불을 쏜 사람까지.”*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빛은 보는 즉시 오지만, 소리는 하나를 세는 동안 사백오십 걸음쯤을 온다. 루엔 걸음으로. 루엔은 이 셈을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했다. 번개가 치면 천둥까지 셌다.속으로는 다른 숫자가 함께 돌았다. 1초에 343미터. 이 세계에서는 쓸 데가 없는 숫자였다. 쓸 데가 있는 건 걸음이었다.적 마법사는 쏠 때마다 번쩍였다. 마나의 여덟 할이 빛과 소리와 열로 샜다. 이 세계에서 그걸 「마나의 위엄」이라 불렀다. 위엄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셀 수 있었다.다만 한 사람이 세면 거리만 나왔다. 어느 쪽인지는 나오지 않았다.“테오. 둔덕 왼쪽 끝 참나무로 가십시오. 번쩍이면 세어서 적으십시오. 코넬 형은 오른쪽 끝 방앗간 터로.”“나도 세?” 코넬이 방패 밑에서 말했다.“형은 번개 셀 줄 압니다. 어릴 때 제가 가르쳤습니다.”“대충 기억나.”“대충이면 충분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