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Penulis: 서담

제1화

Penulis: 서담
무더운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도성 외곽 송별정 옆에 세워져 있는 긴 장대에 한 여인이 벌써 사흘째 매달려 있었다.

이미 누더기가 된 옷차림, 씻지 못해 엉망이다 못해 풍기는 악취, 장군집 여식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땀방울이 허정안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와중에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물... 물을...” 그녀는 구경꾼들을 향해 마지막 희망을 담아 간절히 애원했다.

혼신의 힘을 짜내어 내뱉은 절박한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미약해 바람 속에 묻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동생이 억지로 먹인 벙어리 약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 순간, 날카롭지도 않은 무딘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허정안의 복부를 꿰뚫었다.

“윽...!”

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선혈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구경꾼들이 놀라 소스라치며 황급히 길을 비켰다.

곧이어, 말을 탄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화살을 쏜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허정안의 친동생 허명진이었다.

이윽고 그가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보십시오! 이 여자는 한때 제 누이였습니다. 어릴 적엔 하도 몸이 약해 부모님이 따로 별장에 데려가 돌볼 정도로 아주 지극정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성으로 돌아오더니, 완전히 미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의 생신에서 참석한 장 공주님께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자신이 진짜 신책장군이라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장한 채 출정한 여식이라며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건 전사한 형님을 모독한 것뿐만 아니라, 조정과 대연국이 일구어 온 영광을 짓밟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신책장군을 사칭했다는 말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안쓰러운 눈동자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신책장군이 누구인가? 이 대연의 유일한 불패의 장군, 살아생전 치른 무려 스물아홉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장수였다.

그 덕분에 대연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잃었던 땅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황제가 타국에 인질로 끌려가 겪은 치욕도 깨끗이 되갚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것! 감히 신책장군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뻔뻔하구나! 그토록 뛰어난 장수가 나온 허씨 집안에서 어찌하여 이런 불초한 딸이 나왔던 말인가!”

분노한 사람들이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그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고!'

허정안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신책장군인데!

십 년 전, 다리를 다친 허함산에게 전장에 나가라는 거역할 수 없는 황명이 떨어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남장을 하고 허함산 대신 전장에 출정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그렇게 열다섯, 백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기습하여 군량을 불태우고 변방의 포위를 풀었다. 열여섯에는 만군 속에서 적장을 쓰러뜨리고 대승을 거두며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였다. 스물에는 삼군을 지휘하여 북방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오랑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스물셋에는 북벌을 단행해 12개 성을 줄줄이 점령한 데 이어 적국의 군주마저 생포해 그자더러 삭발은 물론 자결까지 하게 하여 황제의 치욕을 씻었다.

그 공으로 그녀는 신책대장군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혹시라도 남장한 사실이 드러날까 봐 어쩔 수 없이 전사한 척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고대하였던 가족과의 재회, 하지만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배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새로운 딸을 키워, 그녀가 누려야 했을 모든 것을 물려준 상황이었다.

처음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허정안은 가족들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말들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남장을 하고 전장에 나간 건 엄연한 대역죄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 집안은 멸문당할 것이다. 허씨 가문에서 세상에 나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여식은, 결코 네가 아니어야 한다.”

“너는 장녀다. 그러니 참고 견뎌라. 그게 네 팔자다.”

“네가 없었던 동안, 유진 누님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셨는지 알아? 아버지 다리도 누님 덕분에 나은 거야. 그러니 불평 말고, 감사히 받아들여.”

십 년을 전장에서 구른 그녀는 이미 세상 풍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따뜻한 집, 그리고 가족의 품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을 대신해 신책장군의 여동생으로 입궐하여 포상을 받는 허유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신책장군이 생전에 받지 못한 모든 포상을 허씨 집안에 내려줬다. 그녀의 아버지인 허함산, 허 장군은 위국공으로 봉작되었는데, 이는 아홉 대까지 세습이 가능한 그야 말로 철모자왕이라 할 수 있는 작위였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정일품 직위인 고명부인으로 임명되었고, 허유진은 군주로 책봉된 데 이어 황태자와의 혼사도 정해졌다.

심지어 허명진마저 소전신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그 모든 영광 속에, 오직 허정안만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만약 드러나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임금을 속인 죄’로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라며 그녀를 죄인으로 몰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류 가문들이 모인 연회에 다녀온 허유진이 허 부인 앞에서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

“변방에서 돌아온 영왕께서 제가 신책장군과 전혀 닮은 점이 없다고 하셨어요... 저, 너무 두려워요. 혹시라도 영왕께서 언니를 알아보시기라도 하면 어쩌죠...?”

그 말을 들은 허 부인의 안색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허정안에게 유주의 한 부잣집 가문에서 혼처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주는 도성에서 멀고 먼 외진 곳이었고, 그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허정안이 거절하자, 허함산은 크게 분노했다.

“이 집안은 유주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다. 그런데 왜 싫다는 것이냐? 설마 이 허씨 집안의 명성을 탐하는 것이냐?”

허정안이 차분히 말했다.

“저희 가문의 명성은 모두 제가 싸워서 얻은 것들이 아닙니까?”

그녀가 막 말을 마치자, 허 장군은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장수로 지내온 지 십 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목을 막아냈다.

그러자 허함산이 외쳤다.

“이 불효자식! 겨우 운 좋아서 몇 번 전장에서 이긴 것으로 감히 아비에게 대드는 것이냐!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만하세요!”

이때, 허 부인이 나섰다.

“정안도 그간 변방에서 고생했는데... 우리가 너무했죠.”

그날 이후, 허 부인은 유난히 허정안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심지어 생일 연회까지 열어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등불이 따스하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가 마련되었다. 허정안은 가운데 앉아, 부모와 동생들이 건넨 술잔을 받았다.

“정안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허 부인이 말했다.

“이 잔을 들고, 그간 풍파는 모두 잊자. 이제 남은 인생은 평온하게 사는 거야.”

향긋한 술과 따뜻한 미소들, 허정안은 울컥해 눈물이 맺혔다.

'그래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다 함께 오순도순 앉아 미소 짓는 거.'

그녀는 드디어 가족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아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겨우 눈물을 참으며 마신 그 술잔 안에... 연근산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 그녀를 걱정스럽기는커녕 싸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는 건드리면 안 돼. 걷지 못하면 시댁에서 받아주지 않을 거야.”

허함산이 말했다.

“그러면 손가락을 부러뜨려. 그러면 다시는 검도, 활도 못 들겠지.”

허 부인이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친동생, 허명진이 나섰다.

허정안은 온몸의 힘을 짜내 저항하고자 했지만, 이미 약에 몸이 잠식당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허 부인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하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후에 네가 혹시라도 실수로 무공을 드러내 정체가 발각될 수 있잖니? 다 널 지키기 위함이니, 이해하렴.”

허명진은 잔혹하고도 거침없이 그녀의 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정말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자부심이었던 무공은 그렇게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렇게 겨우겨우 버텨 허 부인의 생신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고 장 공주가 허씨 가문을 찾았다. 허정안은 하녀들의 감시를 겨우 뿌리치고 장 공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이 신책장군임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친 여자 취급을 받으며, 허함산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에게 끌려 나갔다.

‘혹여 또다시 말썽을 부릴까 두렵다’는 이유로, 결국 허명진의 손에 의해 강제로 벙어리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쪽이 돌아온 뒤로, 유진 누님이 얼마나 밤잠을 설쳤는지 알아? 그냥 전장에서 죽지, 왜 돌아왔어?”

벙어리 약은 독에 가까웠다. 목구멍을 불태우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허정안은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허함산은 싸늘한 얼굴로 명했다.

“이 패륜녀를 도상 밖 장대에 묶어라!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 어미도 못 알아보고 해치려 들었다!”

그렇게 허정안은 장대에 묶인 채 사흘 밤낮을 버텼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구해주러 오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불쌍한 눈빛으로, 어떤 이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었다.

그렇게 지금, 허명진이 나타났다. 그가 군중을 향해 외치던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자기 입으로 죄를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장대에서 내려오는 걸 허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허정안이 목소리를 잃은 걸 알면서도 직접 입을 열라고 했다. 이건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닌, 그저 명분을 얻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다.

허정안이 침묵하자, 사람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사람들의 혐오 어린 시선을 받는 그녀를 보며, 허명진은 몰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녀는 그저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황명이 떨어졌는데,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도 따르지 않으면 죽음이었다. 그래서 대신 나간 전장이었는데, 돌아온 것이 겨우 이딴 취급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게다가 돌아온 후에도, 자신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가족이 어려움을 겪게 될까 두려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얻은 모든 공로, 피로 바꿔온 가문의 영광이,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칼날이 되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기에, 적도 아닌 가족의 손에 죽는단 말인가?'

분노와 비통함이 몰려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왈칵, 견디다 못한 그녀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사흘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신 것은 결국 비릿하디 비릿한 피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번 생의 가장 큰 실수,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모든 공로를 가족에게 넘겨준 것,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상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곧 온몸을 덮치는 한기와 함께 시야가 암전으로 물들었다.

이것이 바로 얼마 전 죽음을 맞이했던 그녀의 과거였다.

----------

“아가씨, 아가씨?”

하녀 소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허정안은 눈앞에 놓인 등불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흘 전,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도 모자라 과거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 참혹했던 잔상은 틈만 나면 그녀를 괴롭혔다.

허정안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 어디까지 왔지?”

소영이 답했다.

“지금 도성 외곽까지 왔습니다. 한 시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곧 가족들을 뵐 수 있을 겁니다.”

신책장군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전사한 척하고 남장을 풀어, 다시 여인의 모습으로 허씨 가문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소영은 어쩌다 보니 데리고 다니게 된 아이로, 당연히 그녀가 회귀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허정안은 말없이 수레의 창문을 걷어 올렸다. 곧 차가운 겨울바람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살결을 스쳤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 풍경이, 적막하게 펼쳐져 있었다.

회귀하고 겨우 사흘째, 아직도 장대에 매달린 채 뜨거운 햇빛을 받던 기억이 생생한데, 차가운 바람을 만나자 겨우 현실감이 찾아왔다.

이 시기는 도성에 이미 신책장군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전해질 무렵, 허씨 부부가 창평후 부인을 초대해 허유진을 신책장군의 유일한 여동생이라 소개할 자리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그들은 허둥지둥 숨기려 들 것이다.

원래는 하루 전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만난 눈보라에 수레바퀴가 빠져 늦었다.

창평후 부인은 허씨 가문에 도착했을 텐데, 허정안은 아직 한 시진이 남았다. 이 만남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내 인생을 또다시 빼앗길 순 없어.'

회귀까지 했는데, 똑같이 살 순 없었다.

허정안은 소매 안에 넣어뒀던 밀서를 꺼내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갔다. 곧 그녀의 표정이 결연해졌고, 소영을 향해 말했다.

“나는 여기서 내릴 테니, 너는 이 마차를 타고 먼저 도성 안에 들어가 있거라.”

허정안은 밀서를 다시 소매 안으로 넣고 수레를 내렸다.
Lanjutkan membaca buku ini secara gratis
Pindai kode untuk mengunduh Aplikasi

Bab terbaru

  •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제40화

    허정안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허함산을 포함해 허 부인, 허명진, 허유진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허명진과 허유진은 허함산 바로 옆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허정안에겐 문 쪽 구석진 자리를 주었다.그녀는 이러한 부모의 냉대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말보단 태도로 그녀에게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라는 압박을 보내왔었다. 과거의 허정안이었다면 이 상황에 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고민하며 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부모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한편, 허명진은 이전보다 많이 얌전해지긴 했다. 하지만 허정안을 바라보는 눈에 적대감이 가득한 건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선 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오늘 밤샘할 생각 없습니다. 몸이 피곤하니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그녀는 형식적으로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줄곧 그녀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허함산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조차 못 하고 있는 듯한 허정안에게 크게 화가 났다.“멈춰라!”허함산이 단호하게 외쳤다.“허정안, 넌 도대체 예의를 어디가 팔아먹었느냐? 부모 앞에서 이게 무슨 태도야!”허정안이 담담한 얼굴로 되물었다.“제 태도, 어디가 문제였죠?”검고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자 허함산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살짝 멈칫했다. 자신이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정안은 더 이상 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허함산은 다시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내세우며 말했다.“다 들었다. 네가 명욱이를 어영군에 들게 했다면서? 누구의 인맥을 썼든 상관없다. 네 동생도 어영군에 들게 해라. 네가 이 집의 장녀인 이상 그래야 할 의무가 있어.”허 부인도 덧붙였다.“명욱이를 도와준 건 그렇다고 쳐도, 명진이는 네 동생이잖니. 친동생이 잘되면 너도 좋지 않겠어?”옆에 앉아 있던 허유진도 허명진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어서 언

  •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제39화

    허정안은 곧바로 종이를 받아 펼쳐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왕 유모의 필체로 적힌 간략한 상황 설명이었다. 그녀는 허 부인에게 쫓겨난 뒤 어쩔 수 없이 고향인 담주로 돌아갔는데 다시 양씨의 도움으로 은전을 마련해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였다. “지금 내가 보낸 사람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왕 유모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말지는 네가 알아서 하거라.”양씨는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네가 베푼 은혜는 이것으로 다 갚았으니 앞으로 서로 다시 얽히는 일 없도록 하자.”그녀는 단호히 돌아서려 했다. “백모님!”하지만 허정안이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명욱이가 어영군이 되었다고 해도 앞길을 튼튼히 다지려면 혼자서는 어려울 것입니다.”양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허정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백모님과 손잡고 싶습니다. 저에겐 신책장군의 동생이라는 명목이 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앞으로 더 많은 인맥을 쌓을 것이고 명욱이에게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양녀만 편애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영예에만 관심이 있어요. 저는 동생과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명욱이를 돕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제가 백모님, 백부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저희 집에서 진 빚, 제가 대신 갚을게요.”짧은 침묵이 흘렀다.“허정안, 네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너무 방대하다. 우리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이다.”양씨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했다.“이번에 명욱이의 출세를 지연시켰으니 다음은 주연이의 혼사에도 손을 대려 하겠지요. 백모님께선 현명하시니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양씨는 잠시 얼어붙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무언가 떠오른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금 당장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뒷모습을 보며 허정안은 다시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허씨 가문 여식이라면 모두 혼인을 하기 전, 따로 선생을 모셔

  •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제38화

    국공부, 본채 안.허함현의 아내, 양씨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머리에는 검은 옥비녀가 꽂혀있었고 깃에 모란꽃이 길게 수놓아져 있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하인들이 내온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아주 고집스러운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허 부인이 하인들과 함께 본채로 들어오며 말했다.“안 그래도 사람을 보내려던 참인데, 잘 오셨어요. 오늘 섣달그믐이니 셋째네도 함께 불러다 같이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거 어떠세요?”하지만 양씨는 아주 냉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것 없다. 섣달그믐 같은 날에 괜히 아랫사람들 앞에서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형님, 그렇게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어쨌든 다 한집 식구인데.”허 부인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요즘 저희 부군께서 폐하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건 아시죠? 듣자 하니 명욱이가 무과에 급제한 지도 일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부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다지요? 오늘 명욱이도 데려와 한 번 저희 부군께 사정을 얘기해 보세요. 부군께서 입김을 넣어준다면 분명 명욱이에게도 좋은 자리가 차려질 거예요.”그러자 양씨가 냉소를 띠며 말했다.“네 도움 따위 필요 없다. 며칠 전에 이미 이부에서 명욱이를 어영군에 배치한다고 공문이 내려왔다.”“뭐라고요?”허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추태를 깨닫고 얼른 웃음 띤 얼굴로 말을 돌렸다.“어영군이라니... 순방사에 근무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그러자 양씨가 귀찮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이부에서 내려온 공문인데 내가 어찌 알겠느냐?”바로 이때, 소영이 문 앞에 나타났다.“백모님, 아가씨께서 방에서 편하게 차 한잔하자고 모시고 오랍니다.”그러자 양씨는 허 부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영을 따라갔다. 그들이 떠난 뒤 허 부인이 손수건을 꽉 쥔 채 탁자를 내리쳤다.“틀림없어! 허정안이 뒤에서 수를 쓴 거야!”“부인, 왜 큰 아가씨께선 남에게만 이토록 너

  •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제37화

    “어머니께서 많이 신경 쓰셨네요. 하지만 제가 제대로 이들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너는 그냥 마음껏 부리면 돼. 만약 이 아이들이 네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한다면 바로 내게 알려주면 된다.”허 부인이 그렇게 말하자 하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충성을 맹세하기 시작했다. 허정안은 거절하지 않고 일단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고 허 부인은 표화원을 나왔다. 하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은 다시 안채로 돌아왔고 허유진이 벌겋게 부은 눈을 비비며 허 부인에게 말했다.“어머니, 언니가 저 하인들을 경계 안 할 수 있을까요?”“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 갈 것 같으냐? 어차피 혼사가 정해지고 시집갈 준비를 하게 되면 차라리 우리 쪽에서 손 내밀어 주길 바라게 될걸?”그러자 허유진이 말을 돌리며 말했다. “어머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언니가 순순히 우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방법이요.”모녀는 낮은 목소리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은 깊어갔고 점점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사받은 재물과 은전 덕분에 허 부인도 더 이상 핑계 대지 못하고 화로 두 개를 더 보내주었고 허정안의 방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해졌다. 그녀는 이 따뜻함을 만끽하며 창가에서 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 부인이 남겨놓고 간 하인 중 한 명인 계 아주머니였다. “잘 때는 차 안 마신다. 가져가거라.”허정안이 계 아주머니가 들고 온 차를 보며 단호히 말했다.계 아주머니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오늘 허 부인이 남겨두고 간 하인은 총 다섯 명이었다. 계 아주머니와, 어린 하녀 넷, 연운, 청운, 단운, 설운, 모두 뒷글자가 운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허정안은 그들을 소영에게 붙여 창고 물품을 정리하게 했다. 소영의 필두로

  •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제36화

    하지만 허 부인은 혼자가 아닌 눈가가 벌겋게 부은 허유진와 하인들까지 대동해 함께 찾아왔다.“정안아, 이번 고금 일은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진작 하인들의 실수를 눈치챘어야 했는데... 뒤바뀌었을 줄이야, 정말 생각지 못했다.”허 부인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부드럽게 말했다.허정안은 탁자 앞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어머니, 굳이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분명 하녀장이 제대로 못 챙긴 탓이겠지요.”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언급된 하녀장은 몸을 부르르 떨며 창백하게 질렸다. 이어서 허정안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린 하녀장은 겁이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큰... 큰아가씨, 살려주십시오. 제가 늙어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러고는 스스로 몇 차례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자신이 이 정도로 하면 당연히 허정안이 용서해 주며 그만해도 된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느긋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듯이 말이다.하녀장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파놓은 무덤에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허 부인 또한 계속하라는 듯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억울했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이를 악물고 계속 뺨을 때렸다. 찰싹, 찰싹, 방안엔 살갗이 부딪히는 매서운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어느새 하녀장은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이 터져 핏물이 배어 나왔다. 허 부인은 차마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지 못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하녀장은 그녀를 아주 어릴 적부터 돌봐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허정안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백대쯤 넘어갔을 때 허정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되었다, 하녀장. 그래도 어머니를 그동안 오래 보살펴온 정을 봐서 나도 이쯤 용서하도록 하겠다. 일어나거라.”그러자 하녀장이 비틀거리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 묻힌 이름, 피로 갚으리라   제35화

    허정안은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사실 이런 말 꺼내는 게 조금 부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집안 어르신이 워낙 걱정하고 계셔 부득이하게 대신 여쭙겠습니다.”장 부인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말씀하세요.”“저에게 사촌 동생이 한 명 있는데 작년 무과에 급제해 방안으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이부에서 아무런 인사 발령이 없어서 계속 집에서 대기만 하고 있다네요. 백부님께서 워낙 조심스러운 성정이라 이부에 직접 여쭤보는 것을 꺼려 하셔서... 혹시 부인께서 여유 되실 때 상서 대인께 한 번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허정안은 매우 공손하게 말했지만 뜻은 분명했다. 장 부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조정 일에는 제가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인연이 닿았으니 기회가 될 때 제가 한 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허정안은 몇 마디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소영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허정안이 떠나자 장 부인은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당장 집으로 돌아간다. 상서 어르신을 보거든 당장 날 뵈러 오시라 전하거라.”그 말투엔 다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차 안, 소영은 자신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아가씨, 저희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폐하께서 이미 많은 상을 하사하셨는데 황후 마마께서도 상자 두 개를 더 얹어주시다니요!”“폐하의 하사품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황후마마의 하사품은 언젠가 그 값어치를 치를 때가 올 것이다.”허정안이 담담히 말했다.조금 전 연회장에서 허정안이 알아차린 것이 있었다. 장 공주와 황후는 겉보기엔 사이좋아 보였으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후궁에 두 명의 주인이 있다는 건 원래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 공주는 황제의 친누이로 고난과 역경을 함께 이겨낸 끈끈한 혈육 관계였다. 황후는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자식도 봤으며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나누어져

Bab Lainnya
Jelajahi dan baca novel bagus secara gratis
Akses gratis ke berbagai novel bagus di aplikasi GoodNovel. Unduh buku yang kamu suka dan baca di mana saja & kapan saja.
Baca buku gratis di Aplikasi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