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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갯짓의 대가 (1)

Author: 뮤네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3 21:28:08

상회로 배달된 작고 둥근 향신료 통 안에는 아무런 내용물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그 바닥에, 손톱만 한 크기로 접힌 푸른색 양피지 조각이 깔려 있었다.

자정이 되는 시각, 펠루아 구역의 뒷골목 십자로. 푸른 등불을 단 마차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일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꽉 쥐었다. 해냈다. 샤엔 사절단이 그녀의 밀서를 읽었고, 망명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막대한 물품을 대가로 약속하긴 했지만, 제국의 화폐와 권력을 불신하는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일락 에이든하르트가 직조한 완벽한 톱니바퀴 세상에 마침내 이질적인 이방인의 구원이 틈입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연기했다.

오후에는 카운터에서 장부를 꼼꼼히 정리했고, 수석 서기 렌에게 내일 발주할 원단 목록을 지시했다. 이웃 마리안이 들러 차를 권했을 때도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가 구워온 과자를 베어 물었다. 속으로는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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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스스로 잠그는 족쇄 (2)

    그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아일라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안색이 창백합니다. 아침에 수프를 억지로 남김없이 비웠다고 들었는데, 속이 안 좋은 겁니까."아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저택의 하녀들까지 통제하며 자신의 아침 식사량조차 보고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카일락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입을 여는 순간 또 무슨 꼬투리를 잡혀 누군가가 피를 흘릴지 몰랐기에,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그녀의 완고한 침묵에도 카일락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창백한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반항하며 가시를 세우던 인형이 죄책감에 짓눌려 스스로 입을 닫아버린 이 순간조차, 그에게는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황홀한 유희였다.그때, 집무실의 닫힌 창문 너머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은 앳된 소년이 거친 나무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귀족들의 세련된 관현악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서툰 곡조였지만 어딘가 맑고 경쾌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소리였다.잔뜩 긴장한 채 굳어 있던 아일라의 눈동자가 아주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향했다.자신이 잃어버린 자유로운 숨결을 대신 토해내는 듯한 그 투박한 피리 소리에, 아일라는 아주 찰나의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그 소년의 연주에 빠져들었다.'곡조가 참 맑다…….'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던 그 작은 찬사가, 그녀도 모르는 사이 아주 희미한 숨결이 되어 입술을 새어 나왔다.그 순간, 뺨을 어루만지던 카일락의 손길이 뚝 멎었다.아일라는 헉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렸다. 카일락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창밖의 소년을 향해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다정한 미소가 기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스스로 잠그는 족쇄 (1)

    아일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얇은 실크 잠옷이 피부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젯밤의 끔찍한 잔상이 망막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달빛 아래에서 두 손목이 뭉텅 잘려 나간 채 텅 빈 눈으로 웃고 있던 마리안. 그리고 그녀의 피로 얼룩진 치맛자락."아아……."아일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손바닥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만 같아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하지만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두 손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카일락 에이든하르트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녀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 있지만, 그녀가 뻗은 손에 닿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찢기고 망가졌다.똑똑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은쟁반에 아침 식사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수프, 그리고 신선한 과일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영애, 아침을 드실 시간입니다. 오늘은 주방장이 특별히 영애께서 좋아하시는 양송이 수프를 끓였습니다."하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식사를 세팅했다. 평소라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기분 좋게 숟가락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일라는 하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은 아일라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평소보다 소금이 과하게 들어가 혀가 아릴 정도로 짰다.과거의 그녀라면 다정하게 하녀를 불러 수프가 조금 짠 것 같으니 다음에는 소금을 줄여달라고 부드럽게 지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아일라는, 이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꽉 쥐고 억지로 뜨거운 수프를 삼켰다.'안 돼. 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면, 카일락은 내 입맛을 거스른 주방장의 혀를 뽑아버릴지도 몰라.'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날갯짓의 대가 (2)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카일락은 단순히 돈으로 사람을 매수한 것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생명줄을 틀어쥐고, 그들의 숭고한 충성심과 애국심마저 짓밟아 자신의 연극판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아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카일락은 몹시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자, 그럼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군요."카일락이 손가락을 튕기자, 멈춰 있던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마차는 인적 없는 밤거리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펠루아 구역의 중앙 광장에 멈춰 섰다. 카일락은 아일라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마차의 창문 커튼을 열어젖혔다."이 완벽한 무대에서 감히 나의 극본을 망치고, 여주인공을 도망치게 하려 했던 불순물들에 대한 청소를 시작해야겠지요.""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절단은 당신이 협박해서 굴복했다며!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어!""사절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자국으로 도망치듯 배를 돌렸으니 내버려 둘 생각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밀서를 전하기 위해 이용했던 아주 다정하고 불쌍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카일락의 서늘한 속삭임과 동시에, 창밖 광장의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마리안이었다.어둠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마리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기괴했다. 그녀는 마차 창문 너머의 아일라를 발견하고는, 입술이 찢어질 듯 환하고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마리안……."아일라가 창문에 매달리며 이름을 부른 순간, 마리안이 인사를 마치고 들어 올린 두 팔이 달빛에 선명하게 비쳤다.아일라는 짐승처럼 헐떡이며 비명을 집어삼켰다. 마리안의 두 손목 아래가 뭉텅 잘려 나가 있었다. 하얀 붕대가 거칠게 감겨 있었지만, 그 위로 붉고 검은 피가 쉼 없이 배어 나와 그녀의 드레스를 끔찍하게 적시고 있었다.그런데도 마리안은 고통에 찬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텅 빈 눈동자로, 잘려 나간 두 팔목을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날갯짓의 대가 (1)

    상회로 배달된 작고 둥근 향신료 통 안에는 아무런 내용물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그 바닥에, 손톱만 한 크기로 접힌 푸른색 양피지 조각이 깔려 있었다.자정이 되는 시각, 펠루아 구역의 뒷골목 십자로. 푸른 등불을 단 마차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아일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꽉 쥐었다. 해냈다. 샤엔 사절단이 그녀의 밀서를 읽었고, 망명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막대한 물품을 대가로 약속하긴 했지만, 제국의 화폐와 권력을 불신하는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일락 에이든하르트가 직조한 완벽한 톱니바퀴 세상에 마침내 이질적인 이방인의 구원이 틈입한 순간이었다.그녀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연기했다.오후에는 카운터에서 장부를 꼼꼼히 정리했고, 수석 서기 렌에게 내일 발주할 원단 목록을 지시했다. 이웃 마리안이 들러 차를 권했을 때도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가 구워온 과자를 베어 물었다. 속으로는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지만, 겉으로는 이 기괴한 연극판의 얌전한 여주인공 배역을 충실히 수행했다.밤이 깊고, 저택의 고용인들이 모두 잠든 자정.아일라는 짐을 챙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 새장 안의 모든 것은 카일락이 만들어준 가짜였다. 오직 그녀 자신이 상단주로서 직접 벌어들인 은화 몇 닢만을 챙긴 채, 짙은 색 망토를 깊게 눌러쓰고 저택의 뒷문을 빠져나왔다.수도의 밤공기는 서늘했지만, 아일라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뒷골목 십자로에 다다르자, 짙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흔들리는 푸른 등불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화려한 귀족의 마차가 아닌, 눈에 띄지 않는 투박한 짐마차였다. 샤엔 사절단의 철저한 위장이 틀림없었다.아일라는 기쁨에 찬 숨을 내쉬며 마차로 달려갔다. 마부석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차의 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틈을 보이고 있었다.'이제 끝이야. 정말로 안녕이다, 카일락 에이든하르트.'아일라는 벅차오르는 해방감을 느끼며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숨겼다.덜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완벽한 장막의 틈새 (2)

    다음 날 아침.아일라는 상회 밖을 쓸고 있는 이웃 마리안을 불렀다."마리안. 오늘 시간 괜찮아요.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서요."마리안은 빗자루를 내려놓고 눈부시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어머, 우리 아일라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죠. 무슨 일인가요.""제가 항구 쪽에 상회 지점을 하나 더 내볼까 고민 중이거든요. 마침 동대륙에서 온 샤엔 사절단이 진귀한 물건을 좋아한다기에 저희 상회의 최고급 향신료 샘플을 선물로 보내고 싶은데, 제가 오늘은 장부 정리가 너무 바빠서요. 혹시 마리안이 제 대신 항구의 사절단 대표에게 이 상자를 전해주실 수 있나요. 심부름값은 섭섭지 않게 챙겨드릴게요."아일라는 평온한 얼굴로 상자를 내밀었다. 마리안의 동공이 순간 잘게 흔들렸다.대공이 설정한 마리안의 배역은 '아일라를 끔찍이 아끼고 그녀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는 다정한 이웃'이었다. 평범한 향신료 배달 심부름을 거절할 명분이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본의 맹점을 역으로 찌른 완벽한 논리였다.마리안의 입가 경련이 멈추고, 이내 그녀는 인형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호호, 당연하죠. 우리 예쁜 이웃의 사업이 번창한다는데 제가 발 벗고 나서야죠. 걱정 말고 다녀올게요, 아일라."마리안이 상자를 품에 안고 항구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일라는 가게 문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이겼어.'사절단의 손에 밀서가 들어가기만 한다면, 외교적 면책 특권을 가진 그들의 배에 오를 수 있다. 카일락이 아무리 북부의 지배자라 한들, 동대륙 국왕 직속의 사절단 배를 강제로 세우거나 무력으로 빼앗는 것은 국가 간의 전쟁을 의미했다. 아무리 미치광이라도 그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거대하고 완벽했던 카일락의 유리장에 마침내 균열을 내었다는 환희가 그녀의 가슴속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같은 시각. 로젤 수도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중앙 시계탑의 가장 높은 첨탑 위.서늘한 바

  •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완벽한 장막의 틈새 (1)

    아일라는 찬물로 세수를 하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창백하게 질린 뺨과 붉게 충혈된 눈. 카일락이 가장 즐거워할 만한, 완벽하게 공포에 질린 사냥감의 얼굴이었다. 아일라는 수건으로 물기를 거칠게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저 거만한 통제광은 지금도 그림자 속에서 그녀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달콤한 유희로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방구석에 숨어 있는 것은 그가 짜놓은 극본대로 움직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이 기괴한 연극판을 무너뜨리려면, 철저하게 상단주 아일라의 가면을 쓰고 저들의 허를 찔러야 했다.아일라는 심호흡을 한 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카운터에는 수석 서기 렌이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 광장에 불을 지르라는 비상식적인 명령 앞에서도 소름 끼치도록 순응하던 그 미소 그대로였다."렌. 어제는 제가 너무 피곤해서 예민하게 굴었네요. 무리한 지시를 내려서 미안해요."아일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하자, 렌은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다정하게 대답했다."당치 않으십니다, 점주님. 점주님의 뜻이라면 언제든 따르는 것이 제 역할인걸요. 편안히 쉬셨다니 다행입니다.""네. 머리를 식히고 나니 오히려 사업 구상이 명확해졌어요. 렌, 비안 상단과 맺은 원단 거래 내역서와, 그들을 보증하는 황금 천칭 연합의 최근 삼 년 치 자금 운용 장부를 전부 제 집무실로 가져와 주세요."렌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연합의 장부를 말씀이십니까. 그건 방대한 양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 텐데요.""비안 상단이 우리에게 납품하는 단가는 시장 원리에 맞지 않을 정도로 낮아요. 그들이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우리에게 물건을 댄다면, 분명 배후 자본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나 빚에 쫓기고 있다는 뜻이죠. 이참에 비안 상단의 숨통을 쥐고 있는 연합의 자금줄을 우리가 역으로 매입해서, 그들을 아예 우리 상회 밑으로 흡수해 버릴 생각이에요. 저는 남부 최고의 상단주가 될 테니까요."아일라는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고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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