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인형 노릇은 사양하겠습니다: Chapter 1 - Chapter 10

18 Chapters

완벽한 파혼, 그리고 열려버린 새장 (1)

북부의 겨울은 언제나 짐승의 아가리처럼 잔인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창밖으로는 살을 에이는 듯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성채를 짓눌러버릴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복도는 그 날씨만큼이나 서늘하고 적막했다.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횃불들만이 위태롭게 일렁이며 복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아일라는 얇은 숄을 어깨에 두른 채, 숨 막히는 적막을 뚫고 대공의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이번에야말로, 끝내야 해.'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 위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지만, 아일라의 기억 속에는 달랐다. 이전 삶에서 그녀의 두 손목과 발목을 옥죄고 있던 차갑고 묵직한 황금 사슬의 감각이 여전히 피부에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과거의 아일라는 북부대공, 카일락 에이든하르트의 완벽하고 순종적인 약혼녀였다. 그녀는 북부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오직 그만을 바라보며 웃었고, 그가 원하는 대로 숨을 죽이고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완벽한 인형이 되어갈수록 카일락의 집착은 기괴한 방향으로 뻗어나갔다.그는 아일라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참지 못했고, 외출을 금지했으며, 종국에는 빛조차 들지 않는 대공성 깊은 곳의 유리 온실에 그녀를 가두었다."나의 아름다운 아일라.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저 여기서 나와 함께 숨만 쉬면 돼. 평생토록."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던 그 서늘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릴 때면 아일라는 여전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 숨 막히는 통제와 고립 속에서 아일라는 결국 정신이 무너져 내렸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그 끔찍한 생을 마감했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카일락과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기 1년 전으로 회귀해 있었다.'두 번 다시 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겠어.'집무실을 향해 걷는 아일라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이채를 띠고 있었다. 북부를 떠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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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파혼, 그리고 열려버린 새장 (2)

아일라는 그가 가리킨 푹신한 소파 대신,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꼿꼿하게 섰다."가까이 오지 않겠습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이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카일락의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깃펜을 내려놓고 깍지를 낀 채 아일라를 응시했다."나에게 할 말이라. 뭡니까?"아일라는 치마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었지만,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턱을 치켜들었다."파혼해주십시오."침묵.집무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은 듯 멈췄다. 창밖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만이 귓가를 때릴 뿐이었다.카일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동자로 아일라의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볼 뿐이었다. 화를 내는 것도, 당황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난생처음 보는 흥미로운 생물체를 관찰하는 듯한 기이한 시선이었다.그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아일라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는 대공 전하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싶습니다. 북부의 가혹한 환경은 저와 맞지 않고, 무엇보다… 더 이상 전하의 곁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이유가 그게 다입니까?"한참 만에 흘러나온 카일락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아일라는 오히려 그 비정상적인 차분함에 등골이 서늘해졌다."전하께서는 완벽한 북부의 안주인을 원하시겠죠. 어디에도 나서지 않고, 그저 그림자처럼 전하의 뒤에 서서 순종하기만을 바라는 그런 여자 말입니다."아일라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아 내뱉었다."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들어놓은 완벽한 계획에 맞춰 움직이는 것, 미쳐버린 북부대공의 얌전한 인형 노릇은 이제 사양하겠습니다."자신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날카로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 정도면 그도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존심 강한 북부대공이 자신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여자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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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파혼, 그리고 열려버린 새장 (3)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내 곁에 묶어둘 생각은 없습니다. 짐을 싸서 영지를 나가겠다면 호위와 마차를 준비시켜 주지. 네가 정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재산과 신분도 보장해 주겠습니다."그가 거칠어진 아일라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그러니 그렇게 두려워하는 눈으로 나를 보지 마십시오.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볼 때마다, 내 심장이 찢겨 나갈 것 같으니까."아일라는 멍한 얼굴로 카일락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잃게 되었다는 깊은 슬픔과,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체념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정말… 이렇게 쉽게 보내준다고?'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토록 미친 듯이 자신을 속박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카일락은 너무나 이성적이고 다정했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가, 단순히 자신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은 아니었을까?아일라는 혼란스러웠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감사합니다. 전하의 배려는 잊지 않겠습니다."그녀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행여나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워, 발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빨랐다.거대한 흑단목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아일라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카일락은 닫힌 문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적막이 내려앉은 집무실.조금 전까지 애절한 체념으로 가득했던 카일락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지워졌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소름 끼치도록 짙고 끈적한 광기였다."…인형 노릇이 싫다."카일락은 자신의 뺨에 닿았던 아일라의 온기를 기억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낮고 기괴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큭… 크큭… 아아, 나의 아일라. 나의 가엾고 사랑스러운 새."그는 집무 책상 위로 걸어가 놓여 있던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백색의 퀸 체스말을 집어 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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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밖의 하늘 (1)

아일라는 자신의 눈앞에 도열한 마차와 호위 기사들을 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북부의 칼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묘하게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정문 앞이었다. 과거의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제 발로 넘어보지 못했던, 육중하고 거대한 철문이 지금 그녀를 위해 활짝 열려 있었다."정말 이것으로 충분합니까."등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아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카일락 에이든하르트. 북부의 지배자이자 그녀를 옭아맸던 거대한 사슬.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집착이나 광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떠나는 정혼자를 걱정하는 다정함과, 그녀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고결한 체념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네. 전하께서 챙겨주신 것만으로도 남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 과분할 정도입니다."아일라는 곁에 놓인 묵직한 가죽 가방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파혼을 선언하고 영지를 떠나겠다는 그녀의 말에 카일락은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준비해주었다. 남부 수도 중심가에 위치한 번듯한 저택의 권리증, 평생을 놀고먹어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금화가 든 전표, 그리고 그녀의 안전을 책임질 정예 호위 기사단까지.'과거의 내가 바보였어.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내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건데.'아일라는 속으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난 삶에서 그녀는 카일락을 두려워하기만 했다. 그가 내어주는 완벽한 환경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녔고, 결국 그의 통제욕을 자극해 파국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당당하게 요구했고, 그는 이성적으로 납득했다. 그것이 이 남자의 진면목이었던 것이다."남부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거나,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에이든하르트의 이름을 쓰십시오. 북부는 영원히 당신의 편일 테니까요."카일락이 천천히 손을 뻗어 아일라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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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밖의 하늘 (2)

***북부에서 남부의 심장인 로젤 수도까지는 꼬박 보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아일라는 내심 이 고된 여행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갈 정도로 안락하고 평화로웠다.아니, 안락하다 못해 기이할 정도로 완벽했다.덜컹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최고급 마차의 성능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차 내부에 구비된 물품들은 하나같이 아일라의 취향을 꿰뚫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융단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옅은 라일락 색이었고, 찬장에는 그녀가 과거 아주 우연히 한 번 스치듯 맛있다고 칭찬했던 남부 특산물인 홍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쿠션의 푹신함 정도마저 아일라가 평소 가장 편안해하는 텐션과 정확히 일치했다.여정 자체도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호위를 맡은 에이든하르트의 기사단장 로웬은 아일라가 조금이라도 피곤함을 느낄 때쯤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마차를 세웠다. 그녀가 멀미를 일으키기 직전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식사 때마다 아일라가 선호하는 향신료가 적게 들어간 담백한 요리만을 대령했다.'에이든하르트의 정보력과 수행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아일라는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감탄했다. 카일락이 그녀를 떠나보내며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의를 베푼 것이 틀림없었다. 완벽주의자인 대공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약간의 과잉보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수도에 도착하면 모두 북부로 돌아갈 사람들이었다. 아일라는 이 완벽한 여정을 그저 회귀자가 누리는 작지만 달콤한 보상쯤으로 여기며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지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던 북부의 설원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난 평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창문을 열자 남부 특유의 따뜻하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아일라의 은빛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흩트려놓았다.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눈부신 도시, 로젤 수도가 그 위용을 드러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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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밖의 하늘 (3)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내내 평안하시길."로웬과 에이든하르트의 기사들은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려 북부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일라는 참았던 환호성을 내질렀다."끝났다! 정말 다 끝났어!"자신을 감시하던 마지막 끈마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이다. 아일라는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내일 당장 상단 연합에 찾아가 상회를 세울 계획을 짜야 했다. 전표에 든 막대한 자본금이라면 남부의 유통망을 꽉 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당당한 상단의 행수로 살아갈 빛나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으로 가득 찬 아일라는 저택의 고용인들이 미리 정리해 둔 침실로 향했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자 피로가 기분 좋게 몰려왔다. 방 안은 따뜻했고, 은은한 조명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던 아일라의 시선이 문득 창가 쪽에 놓인 작은 탁자 위로 향했다.그곳에는 우아한 곡선이 돋보이는 투명한 유리 화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화병 안에는 푸른빛을 띠는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블루 세레나.북부의 아주 깊은 골짜기에서만 극히 드물게 피어나는 꽃. 과거 아일라가 우울해할 때마다 카일락이 한 송이씩 꺾어다 주어,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안을 얻었던 그 귀한 꽃이었다.'남부에서도 이 꽃이 자라던가?'아일라는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병으로 다가갔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꽃잎의 방향, 화병에 물이 채워진 높이, 심지어 꽃들이 꽂혀 있는 배열까지. 마치 과거 대공성 그녀의 방에 놓여 있던 화병을 통째로 뜯어다 옮겨놓은 것처럼 완벽하게 똑같았다.아일라는 갸웃거리며 꽃잎에 손끝을 대어보았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따뜻한 남부의 기후 덕에 북부에서보다 훨씬 생기 있게 피어나 있었다.'저택을 관리하는 시종장의 센스가 좋은 모양이네. 수입하기 까다로웠을 텐데.'그녀는 작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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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 돛을 달고 (1)

아일라는 뺨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공기에는 옅은 소금기와 향긋한 오렌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언제나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한기와 무거운 눈구름으로 가득했던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의 아침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일라는 기지개를 켜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이토록 즐겁고 기대되는 일이었다니, 과거의 삶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탁자 위에는 어젯밤 보았던 푸른빛의 블루 세레나가 여전히 생기 넘치는 자태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일라는 꽃잎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활기찬 발걸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두꺼운 모피와 목을 옥죄던 검은색 드레스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녀는 남부 특유의 가볍고 부드러운 실크로 지어진 연한 레몬색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복잡하게 틀어 올리는 대신, 산뜻하게 하나로 땋아 내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결 젊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아니, 원래 이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이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생기를 이제야 되찾은 것에 가까웠다.'오늘은 드디어 내 이름으로 된 상회를 세우는 날이야.'아일라는 카일락이 넘겨주었던 막대한 자본금이 든 전표와 신분 증명서를 작은 가죽 가방에 챙겨 넣었다. 심장이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콩닥거렸다. 누구의 인형도, 누구의 약혼녀도 아닌 온전한 상단주 아일라로서 내딛는 첫걸음이었다.***로젤 수도의 중심부는 아일라의 예상보다 훨씬 활기차고 거대했다. 마차의 창문을 열자 끝없이 늘어선 상점들과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경쾌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북부의 억눌린 정적에 익숙해져 있던 아일라에게 이 시끄러운 소음은 차라리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마차가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 정면에는 거대한 황금 저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남부 전체의 상권을 쥐락펴락한다는 황금 천칭 상단 연합의 본부였다.마차에서 내린 아일라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연합 건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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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 돛을 달고 (2)

그곳은 로젤 수도에서도 가장 자릿세가 비싸고, 기존의 상인들이 절대로 자리를 내놓지 않는 황금 구역이었다. 아일라도 내심 거절당하거나 몇 달을 대기해야 할 것이라 예상하고 던진 조건이었다.바르토는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장부를 펼쳤다. 장부를 넘기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아주 찰나의 순간, 바르토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묘하게 굳어지는 듯했지만, 그것은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아아, 영애께서는 참으로 운의 여신이 따르시는 모양입니다."바르토가 장부를 덮으며 과장된 손짓으로 웃어 보였다."마침 어젯밤, 교차로 정중앙에 위치한 3층짜리 양장점 주인이 갑작스럽게 낙향을 결정하며 점포의 권리를 연합에 위임하고 떠났습니다. 건물 상태도 최상급이고, 영애께서 원하시는 조건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아일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어젯밤에요. 그 황금 상권을 그렇게 갑자기 포기하고 떠난다고요.""가족 중에 몹시 위독한 분이 생겨 야반도주하듯 떠나버렸지요. 덕분에 권리금도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지금 바로 계약하시면, 이 훌륭한 건물이 영애의 차지가 되는 겁니다."아일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시세의 절반이라니, 너무 조건이 좋았다. 마치 누군가 그녀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자리를 비워둔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장사를 하다 보면 이런 급매물이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내가 운이 좋긴 좋은 모양이네. 하긴, 죽음의 문턱에서 회귀까지 했는데 이 정도 행운쯤이야.'자본금을 아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아일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토의 안내를 받아 직접 방문해 본 점포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넓은 아치형 창문은 채광이 훌륭했고, 내부의 목재 장식들은 고급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아일라가 1층의 진열장 위치를 구상하며 건물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딸랑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건물의 문이 열리며, 화려한 프릴 장식의 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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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 돛을 달고 (3)

마리안은 사랑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그 자연스러운 변명에 아일라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구나.'수도의 귀족가에 새로운 부자가 나타났으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복숭아꽃 홍차는 남부의 특산물이니 외지인에게 대접하기 가장 무난한 선물일 것이다. 친절을 베풀러 온 이웃에게 과한 의심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워진 아일라는 활짝 웃으며 차를 받아 들었다."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차라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신기할 정도네요. 앞으로 자주 왕래하며 지내요, 마리안.""그럼요, 아일라. 당신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저희 이웃들이 아주 끔찍하게 아껴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마리안의 다정한 인사를 끝으로 점포 시찰을 마친 아일라는 다시 연합 건물로 돌아와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깃펜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리고, 붉은 왁스 위에 상회의 인장을 찍어 누르는 순간, 심장 깊은 곳에서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건물을 빠져나온 아일라는 중앙 광장의 한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시게 푸른 남부의 하늘 위로 하얀 새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었다.자신이 세운 상회의 건물, 넘쳐나는 자본, 그리고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들까지. 모든 것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일라는 두 손을 모아 쥐며 벅차오르는 자유와 해방감을 온몸으로 만끽했다.***같은 시각.수도의 화려한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금 천칭 연합의 3층 귀빈실.해와 달 거리가 붉은 석양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창가에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바르토 관리장이 천천히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일라를 대할 때의 유능하고 친절하던 상단 관리장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잘 만들어진 밀랍 인형처럼 기괴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그는 책상 서랍의 가장 깊은 곳에 손을 집어넣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틈새를 꾹 눌렀다.달칵둔탁한 소리와 함께 책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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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완벽한 우연들 (1)

수도 펠루아 구역의 중심, 해와 달 거리가 교차하는 황금 상권에 자리 잡은 아일라 상회는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아일라는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응대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남부의 질 좋은 실크 원단부터 동대륙에서 들여온 희귀한 향신료까지, 그녀가 과거의 기억과 안목을 살려 엄선한 물건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귀족 부인들은 아일라가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의 우아한 선에 감탄했고, 까다로운 상인들도 그녀가 제시하는 합리적인 단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에 서명했다.딸랑상점의 문이 열리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묵직한 금화 주머니가 금고에 쌓이는 소리가 매장을 가득 채웠다. 아일라는 층계를 오르내리며 직원들을 지휘하고, 창고의 재고를 꼼꼼히 확인했다. 몸은 녹초가 될 정도로 피곤했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도무지 내려올 줄을 몰랐다.내 힘으로 일궈낸 나의 상단, 나의 사람들, 그리고 나의 온전한 하루. 과거 에이든하르트 대공성에서 숨 막히는 정적 속에 갇혀 창밖만 내다보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토록 분주하고 시끄러운 일상은 그 자체로 눈부신 구원이었다.오후 늦게 상점의 문을 닫고 정산을 마친 아일라는 2층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오늘 하루 동안 맺은 여러 상단과의 거래 계약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일라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흐뭇한 표정으로 서류들을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향신료를 독점 공급하기로 한 로베르 상회, 북부의 최고급 모피를 남부로 유통해 주기로 한 카일 상단, 그리고 보석 세공을 전담할 델루아 공방까지. 모든 계약이 그녀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성사되어 있었다. 마치 상대방이 아일라가 원하는 마지노선을 미리 알고 그에 맞춰준 것처럼 협상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내가 생각해도 내 사업 수완이 제법 훌륭한 모양이야.'아일라는 자화자찬하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그녀의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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