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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4 08:00:27

다음 날 아침, 차도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고, 주방에서는 커피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도영은 이미 정장을 입은 채 커피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컵을 하나 더 꺼내 커피를 내렸다.

“설탕 두 스푼 맞죠?”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커피 향이 조용히 퍼졌다.

나는 컵을 받아 들었다. 고소한 커피향이 코를 간질였다. 밤새 긴장되어 있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커피 잔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도영이 내려준 커피였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도영은 이렇게 무감한 얼굴로 커피를 내렸었다.

그게 조금 의외였던 기억이 난다.

SLP그룹 차남. 재계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한 남자.

그런 사람이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준다는 건, 생각보다 현실감 없는 장면이었다.

“앞으로 모닝커피는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딱히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처해서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며칠 그러다 말겠지.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내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늘 커피 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출장을 가지 않는 이상 아침 커피는 늘 도영의 몫이었다.

사람은 반복되는 다정에 약해진다.

그 다정에 이름이 없을 때조차도.

“오늘 일정 많죠?”

그는 커피와 함께, 묻기도 했고, 어떤 날은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커피만 마신 후 각자 출근하기도 했다.

말이 많지도, 감정이 넘치지도 않는 대신 서로의 일상을 크게 침범하지 않는 관계.

그래서 가끔은 그가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는 이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덕분에 아침에 깨어나면 도영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출장이 길어지면 괜히 집이 조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새 그와 함께하는 것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굳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편해진 것뿐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보다 조금 다른 감정이었을지도.

어젯밤, 현관에 놓여있던 하이힐에 심장이 내려앉고, 단 둘이 집에 있었다는 것에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약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정이라는 것이 들어버려서.

“오늘 일정은요?”

내가 묻자 도영이 태블릿을 넘겼다.

“오전에는 회의 두 개 있고, 오후에는 투자 미팅이 있습니다.”

“늦겠네요.”

“아마도요.”

대화는 짧았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가볍게 말했다.

“오늘 저녁은 같이 먹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어졌다.

어쩌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도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이 잠깐 켜졌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내려다봤다.

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

‘본부장님,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실 거죠?’

나는 잠깐 화면을 바라봤다.

연락처는 간결하게 이름으로만 저장되어 있었다.

<연지원>

별 생각 없이 화면을 넘기려던 순간, 두 번째 메시지가 이어서 올라왔다.

‘어제처럼 차 준비해 둘게요.’

나는 잠깐 멈췄다.

어제처럼.

그 말은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손톱 밑 가시처럼 거슬렸다.

어제 그 집에 있었던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이미 반복 가능한 일상처럼 느껴졌다.

어제.

나는 순간 현관에 놓여 있던 하이힐을 떠올렸다.

좀처럼 휴대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메시지를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화면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손을 거뒀다.

명목상 부부였지만, 내겐 그걸 확인할 자격이 없었다.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을 것.>

우리의 계약 조건 중 하나였다.

나는 그 조항을 아주 오래 믿었다.

서로를 지키기 위한 선이라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감정과 오해를 막아주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어떤 선은 사람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문밖에 세워두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의 휴대폰에서 손을 거뒀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또 한 번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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