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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5 08:00:42

비서가 늦게까지 일을 도와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급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라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고.

차도영은 늘 바빴고, 밤늦게까지 일을 붙잡고 있는 날도 많았다.

연지원은 그의 비서였다.

능력 있는 사람이고, 일정 관리도 꼼꼼하다고 했다.

상사의 컨디션을 챙기는 것도 당연한 업무일 것이다.

상사의 귀가 시간을 챙기고 차량을 준비하는 것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그래야 괜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쓸데없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마침 그때 도영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컵을 들어 올렸다.

커피가 조금 식어 있었다.

***

며칠 뒤였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Y사의 한국 진출을 홍보하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그랑 팔레의 대표이자 SLP그룹 차도영 본부장의 아내로 초대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단장을 마친 우리 둘은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 행사장으로 향했다.

행사장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포토월에 서자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대표님, 이쪽 좀 봐주세요!”

“두 분 여기요!”

나는 익숙하게 도영의 팔에 손을 올렸다.

카메라 앞에 서자 몇몇 기자들이 환하게 웃었다.

“두 분 같이 서 주세요.”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늘 두 분의 시밀러 룩이 굉장히 인상적인데요, 오늘 스타일링에서 서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한 건 도영이었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내라는 사람을 만나서 비로소 실물로 구현된 느낌입니다.”

빈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사람들 앞에서 들은 다정한 말은 이상한 체온을 가졌다.

나는 웃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다.

“덕분에 옆에 있는 저까지 덩달아 근사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잘생긴 외모가 한층 더 도드라져 보였다.

브랜드와 아내를 동시에 추켜세우는 대답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역시 로맨틱하시네요.”

나는 부끄럽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마도 오늘 행사가 끝나고 나면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럭셔리의 정점은 ‘사랑’... 재벌 3세 신혼부부가 보여준 진정한 올드머니 룩>

<결혼하더니 사랑꾼 다됐네... 차도영 본부장 “아내 덕분에 나까지 근사해져”>

<주위 시선 아랑곳 않는 신혼부부의 거침없는 애정 표현>

이후에도 간단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우리는 거의 모든 인터뷰에 짧게나마 대답을 해준 후 본행사가 열리는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

대형 샹들리에 아래로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 있었다.

낮게 깔린 음악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 안을 은근하게 채우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몇몇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했다.

“차 본부장, 왔군요.”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도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나는 그런 그의 곁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자리는 이제 꽤 익숙해져 있었다.

익숙해졌다는 건 편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다만 어디서 웃고, 어디서 물러나고, 어디까지 아내인 척해야 하는지 몸이 먼저 외우게 됐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미소를 짓고, 명함을 건네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도영에게 시선을 넘긴다.

처음 이런 자리에 나왔을 때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도 몰라 어색했었다.

대표 신채은이 아닌 차도영의 아내로, SLP그룹의 며느리로 자리한다는 것은 완벽히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경험하다 보니 어느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차도영 본부장의 아내로서 어디까지 나서야 하는지,

어디서 한 걸음 물러나야 하는지.

그 선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오늘 행사 규모가 꽤 크네요.”

내가 작게 말하자 도영이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재계 인사들이 대부분 왔을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차 본부장님.”

중년의 남자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지난번 투자 건 잘 들었습니다.”

도영이 악수를 받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잘 마무리됐습니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며 주변을 훑었다.

행사장 안쪽에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SLP그룹의 안주인, 그리고 차도영의 어머니인 한정숙 여사였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우리 앞에 섰다.

눈길이 먼저 아들에게 향했다.

“차 본부장.”

도영은 대화를 나누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섰다.

“어머니 혼자 오셨어요?”

“회장님은 이런 자리 싫어하시잖니.”

한정숙 여사는 가볍게 대답하면서 눈으로는 나를 보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서 점수를 매기는 듯한 깐깐함이 엿보였다.

“신 대표, 그간 잘 지냈어요?”

“살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의는 지키지만 특별히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그때였다.

“사모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연지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한정숙 여사의 얼굴은 나를 볼 때보다 먼저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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