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장

Author: 산꼭대기
노부인을 장지에 모신 지 이레째 되던 날, 후작 가문의 채권자들이 측문까지 몰려왔다.

박씨 가문에서 대 주던 자금이 끊기자, 그동안 감춰져 있던 후작 가문의 문제들을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연우는 며칠째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나를 찾아왔을 때도 옷매무새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혼례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상중에 백일 안으로 혼례를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생전에 네가 시집오기를 가장 바라셨다. 백일 안에 혼례를 올린다면 할머니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후작 가문이 삼 년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김연우는 잠시 침묵하다 내 맞은편에 앉았다.

"둘 다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문 솔직한 대답이었다.

"서윤아, 후작 가문에 네 혼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내가 너와 혼인하려는 것이 오로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팔 년 동안 혼약을 이어 오면서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삼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임지헌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헌이는 후작 가문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김연우가 혼례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지헌이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니 명분을 줄 수는 없다. 내가 세자빈으로 정한 사람은 너다. 그것만큼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붓을 들어 혼례 날짜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

김연우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이내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혼인하고 나면 우리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빼지 않고 그의 손목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바라보았다.

그가 열아홉 살이던 해, 날뛰는 말을 막아 나를 지키다가 생긴 흉터였다.

상처가 가장 깊었을 때 그는 밤새 고통에 떨면서도 내게 알리지 못하게 했다.

과거의 김연우도 진심이었다.

내 남은 생을 바쳐 후작 가문의 빚을 메우게 하고, 다른 여인과의 관계마저 받아들이게 하려는 지금의 김연우 역시 그의 진심이었다.

혼례일은 섣달 초엿새로 정해졌다.

혼례 당일, 박씨 가문의 혼수 행렬이 십 리에 걸쳐 이어지자 온 경성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내 혼수는 거리에서부터 후작 가문 대문 앞까지 끝없이 늘어섰고, 사람들은 모두 팔 년의 혼약이 마침내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고 입을 모았다.

아무도 혼수 상자 밑에 박씨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관아의 인장이 찍힌 파혼 문서가 내 소매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혼례청에서 김연우는 붉은 비단의 한쪽 끝을 잡고 있었다.

주렴에 가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붉은 비단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만 느껴졌다.

팔 년 전, 그는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내 손을 잡고 빠져나오면서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하늘과 땅에 절을 올리고 합근주까지 따랐을 때, 별원의 시녀가 갑자기 뛰어 들어와 유서 한 통을 내밀었다.

임지헌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편지에 남의 혼인을 망칠 수 없으니 이제부터 절에 들어가 불도를 닦으며, 다시는 우리와 만나지 않겠다고 적었다.

김연우는 편지를 다 읽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편지지를 구겼다.

나는 술잔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술잔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가서 지헌이를 데려오겠다. 서윤아, 너는 늘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혼례청을 가득 메운 하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나는 주렴 너머에서 마지막으로 붉은 비단을 힘껏 움켜쥐었다.

"이 문을 나가신다면 오늘 혼례는 더 이상 이어 가지 않겠습니다."

김연우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내가 이토록 분명하게 결단을 요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돌려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지헌이는 지금 홀로 있다. 네 곁에는 가족도, 친우도, 하객들도 있지 않느냐. 어찌 하필 이런 때에 나를 몰아세우는 것이냐?"

붉은 비단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결국 그는 혼례복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 문턱을 넘어갔다.

혼례청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용과 봉황이 새겨진 혼례 초는 여전히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잡고 있지 않은 붉은 비단의 한쪽 끝을 바라보다 웃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봉황관을 벗어 합근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에서 관아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꺼내 펼쳐 혼례상 위에 올려놓았다.

"세자께서 다른 여인을 위해 혼례를 멈추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늘 혼례는 끝까지 치러지지 않았으니 부부의 연 또한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부로 박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후작 가문의 어른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혼수 행렬을 막으려 했다.

내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이미 저택 안으로 들어온 혼수 상자를 들고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박씨 가문의 호위들이 양옆을 지키자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후작 가문에 넘겼던 전답 문서와 은전 증서, 상점 문서까지 그날 밤 모두 거둬들였다.

내가 김연우에게서 되찾은 것은 십 리에 달하는 혼수만이 아니었다.

팔 년 동안 쏟아부은 기다림과 이해, 그가 당연하게 여겼던 수많은 양보까지 모두 거두어들였다.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팔 년 동안 손목에 차고 있던 붉은 끈을 잘라 후작 가문 문턱 위에 내려놓았다.

"앞으로 세자께서 누구와 혼인하시든, 제가 누구와 혼인하든 서로 아무 상관 없습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제10장

    삼 년 뒤, 박씨 가문의 수운은 열세 성을 잇게 되었다.북방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박씨 가문의 상선은 군수 물자를 무상으로 운송한 공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이례적으로 황실 상단의 금인을 하사받았다.서원에서는 시집에서 내쳐진 여인과 의지할 곳 없는 과부는 물론, 평생 깊은 규방에 갇혀 살기를 원하지 않는 아가씨들도 받아들였다.그곳에서 여인들은 글을 익히고 주판으로 셈하고 계약서를 살피는 법을 배웠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법도 배웠다.첫 제자들이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 누군가는 상점에 들어가 장부를 맡았다.누군가는 뜻을 모아 포목점을 열었고, 또 누군가는 돈을 모아 시집간 딸을 데려왔다.나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장부를 품에 안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봄날 상점들을 둘러보던 중, 내 마차가 옛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길모퉁이에 다리가 불편한 거지가 앉아 있었다. 옷은 낡아 해졌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다.바람에 마차 휘장이 들린 순간,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김연우였다.삼 년의 세월은 과거의 모습을 거의 모두 지워 놓았지만, 두 눈만큼은 여전히 예전과 닮아 있었다.그는 내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벽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다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고 손바닥이 쓸려 피가 맺혔다.지나가던 누군가가 그의 앞에 동전 두 닢을 던졌다.김연우는 동전을 줍지 않았다.대신 품속에서 오래된 옥 장식을 꺼내 오가는 사람들 너머로 내게 들어 보였다.그의 입술이 움직였다.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마차는 멈추지 않았다.오후가 되어 나는 성 밖에 새로 세운 서원에 도착했다.수십 명의 아가씨들이 뜰에서 주판 놓는 법을 익히고 있었고 주판알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친 듯했다.수업을 맡은 여선생이 새로 들어온 제자들의 명부를 내게 건넸다.가장 어린 제자는 열여섯이었다. 살림을 제

  • 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제9장

    후작 가문이 압류되었다는 소식이 강남에 전해졌을 때, 김연우는 이제 막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작위는 박탈되었고 선대부터 내려온 저택은 관아에 몰수되었다.김연우는 세자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했다.임지헌을 대신해 서명했던 담보 문서 역시 그가 끝내 갚지 못한 마지막 빚으로 남았다.김연우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매일 받는 품삯을 전부 회계에게 건넸다.임지헌은 자취를 감췄다.그녀는 김연우가 약값으로 남겨 둔 삼백 냥을 챙겨 강남을 지나던 한 권세가에게 의탁했다.보름 뒤, 나는 술집 밖에서 그녀를 보았다.임지헌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녀들 뒤에 서 있었다.그 권세가의 정실부인이 마차에 오를 때, 그녀는 허리를 숙여 치맛자락을 들어 주었다. 예전의 거침없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마차 곁에 있던 집사가 짜증스럽게 재촉했다."명분도 없이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시녀 주제에 감히 안주인을 기다리게 하느냐?"임지헌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마차에 올랐다.김연우는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그는 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몸은 몹시 야위었고 상처도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임지헌을 발견한 김연우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 마차를 막아섰다."돈을 갚거라."임지헌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네가 자진해서 나한테 남겨 준 것이다. 게다가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데, 설마 나더러 널 따라 고생하라는 것이냐?""너는 후작 가문도,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그때 네가 세자셨으니까."김연우는 더 이상 마차를 막지 않았다.마차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튀긴 흙탕물이 빛바랜 옷자락에 묻었다.김연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고, 그제야 내 마차를 발견했다.나는 휘장을 내리려 했지만 그가 비틀거리며 뒤쫓아 왔다.호위가 마차 앞을 막아섰다."서윤아."삼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나는 그를 쫓아내지 않고, 반쯤 내려온 휘장 너머로 김연우를 바라

  • 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제8장

    김연우는 두 달 동안 상단에서 일했다.예전에는 궂은일에 손 한번 대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배를 따라다니고 물건을 검수하고 화물을 호위하는 일까지 무엇 하나 마다하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를 회계라 불러도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물품 목록을 대조할 뿐이었다.한번은 나루터를 지나다 그가 갑판에 쪼그려 앉아 밧줄을 다시 묶는 모습을 보았다.손가락 끝이 까져 피가 삼베 밧줄에 스며들고 있었다.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감췄다.나는 잠시 멈춰 섰다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바를 약을 보내 주었다.그런데 그날 밤, 김연우는 빈 약병을 깨끗이 씻어 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봄이 시작된 뒤, 상단에서 북쪽 강안으로 물건을 보내야 했다.김연우는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겠다며 자청해 배를 호위하겠다고 나섰고, 황제가 후작 가문에 하사한 문서까지 꺼내 거래의 담보로 삼았다.황제가 하사한 물건은 본래 사사로이 담보를 잡을 수 없었다.나는 그 사실을 일러 주었지만, 그는 끝내 계약서에 서명했다."이번 거래만 성사되면 빚의 절반 이상을 갚을 수 있다. 후작 가문에 남은 것도 이제 이것뿐이니, 마지막으로 한번 걸어 보겠다."도중에 도적을 만났을 때 김연우는 화물선을 지키려다 칼을 맞았다.소식을 듣고 객잔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의원이 그의 상처를 꿰매는 동안 나는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약을 두 번이나 다시 데웠다.김연우는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나를 보았다."물건은 어찌 되었느냐?""지켜 냈습니다."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손을 들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놓지는 않았다."서윤아, 예전의 나는 네가 다른 사람보다 강인하니 서러운 일을 조금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칼을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리 잘 참는 사람이라 해도 아픔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더구나."눈물이 소리 없이 그의 눈가에서 흘러내렸

  • 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제7장

    임지헌이 상단에 들이닥쳤을 때 입고 있던 옷은 바로 그 화려한 붉은 옷이었다.그녀는 경성에서 강남까지 나를 쫓아왔고, 곁에는 시녀 한 명만 데리고 있었다.옷자락은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금실로 수놓은 문양은 여전히 눈부셔 상단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지헌은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대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난 한 번도 너와 다툴 생각이 없었어다. 너한테는 가업도 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있고, 경성에서 누리는 명망도 있지 않느냐. 그런데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은 나를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이냐?"뒤이어 김연우가 달려왔다.그가 임지헌을 데리고 나가려 하자 그녀는 손을 뿌리치고 사람들 앞에서 겉옷을 풀어 붉은 옷을 드러냈다."봐. 이제는 이 옷마저 내 잘못이 된 것이냐? 내가 죽어야만 세자를 놓아줄 것이냐?"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나는 그녀와 김연우를 두고 다투지 않았다. 그저 장부를 맡은 이에게 지난 팔 년간의 거래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과거 우리는 절친한 벗이었다.임지헌이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이며 나들이에 쓴 마차와 말, 절에 올린 공양까지 대부분 내가 대신 값을 치렀다.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그녀는 나의 상단 패로 마흔일곱 차례나 외상 거래를 했다.그중 스물한 건에는 김연우의 서명과 인장이 찍혀 있었고, 나머지는 예전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쓰라고 내가 그녀에게 맡겨 둔 개인 인장을 사용했다.옷과 장신구, 별원 수리 비용까지 모두 일만 육천삼백 냥이었다.장부를 맡은 이가 사람들 앞에서 모든 내역을 읽고 나자 시끄럽던 대청이 점차 조용해졌다.나는 장부를 그 붉은 옷이 기록된 장까지 넘겼다."예전에 선물한 것들은 따지지 않겠다. 허나 상단 패가 이미 회수된 것을 알면서도 계속 후작 가문 세자빈의 명의로 외상을 달아 두었더군."임지헌이 옷깃을 세게 움켜쥐었다."이건 세자께서 내게 준 것이다.""하지만 내 돈으로 산 것이다!"나는 여집사에게 수수한 옷 한 벌을 병풍

  • 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제6장

    김연우가 강남에 도착한 그날 밤, 차가운 비가 내렸다.상단의 문을 닫기 전, 호위가 찾아와 김연우가 문밖에 무릎을 꿇고 나를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빗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나는 장부를 덮고 창가로 걸어갔다.김연우는 여전히 돌계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비단 도포는 빗물에 흠뻑 젖었지만 그는 허리를 조금도 굽지 않았다.경성에서 모두가 칭송하던 후작 가문의 세자가 진흙탕에 무릎을 꿇은 채 뒤늦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휘장을 내렸다.날이 밝아 올 무렵, 김연우가 문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하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그 손을 밀어냈다."박서윤이 나를 만나 주지 않는다면 계속 기다리겠다."결국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발소리를 들은 김연우가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그의 눈빛에 너무나 익숙한 빛이 스쳤다.그는 다급히 일어나다 비틀거리면서도 내 손을 잡으려 했다.호위가 칼집을 가로세워 우리 사이를 막았다.김연우의 손이 칼집 앞에서 멈췄고, 손가락 마디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서윤아, 나와 함께 돌아가자."그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여전히 반듯하고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예전의 여유로운 기색은 빗물에 씻겨 나간 듯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내 차림새를 훑다가 머리에 꽂은 나무 비녀에서 멈췄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날 내가 혼례청을 떠난 것은 지헌이가 정말로 출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일로 지헌이의 평생이 망가진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김연우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 주려 했다.내가 한 걸음 물러나자 겉옷은 그의 팔에 걸렸다."너는 추위를 많이 타지 않느냐.""임지헌은 어디 있습니까?""사람을 시켜 임씨 가문으로 돌려보냈다."그가 반걸음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췄다."앞으로는 지헌이를 만나지 않겠다.

  • 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   제5장

    경성을 떠난 지 열사흘째 되는 날, 나는 강남에 도착했다.아버지는 내가 왜 홀로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수운을 총괄하는 장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사람을 시켜 강가의 옛 별채를 정리하게 했다.나는 치맛자락이 긴 옷을 벗고 배에 오르내리기 편한 소매가 좁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긴 머리도 더는 복잡하게 틀어 올리지 않고 나무 비녀 하나로 간단히 틀어 올렸다.처음 배를 점검하러 나간 날, 나는 사람을 시켜 연한 차를 더 준비하게 했다.김연우는 진한 차를 마시지 않았다.밤늦도록 장부를 볼 때면 늘 따뜻한 우전 용정차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차가 나오자 나는 잠시 바라보다가 치우라고 했다.경성의 소식은 계속해서 전해졌다.후작 가문은 하인들의 월급조차 줄 수 없게 되자 먼저 장원 두 곳을 팔았다.과거 김연우와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그가 박씨 가문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나둘 문전박대했다.채권자들이 연이어 찾아왔고, 노부인의 장례를 치르며 진 빚까지 들춰졌다.임지헌은 여전히 후작 가문의 별원에 머물고 있었다.처음에는 김연우와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식량이 줄어들자 음식이 거칠다며 불평했고, 숯마저 줄어들자 김연우가 일부러 자신에게 화풀이한다고 했다.이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편지에는 후작가가 잠시 어려움을 겪는 것뿐이니 상단 패를 돌려보내라고 적혀 있었다."지헌이가 크게 놀라 안정을 취해야 하니, 혼례복 일은 더는 따지지 말거라."끝내 치르지 못한 그날의 혼례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이만큼 소란을 피웠으면 충분하다. 이제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면 된다."나는 편지를 화로에 던졌다.두 번째 편지는 더 빨리 도착했다.이번에는 임지헌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대신 우리가 함께한 지난 팔 년의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내가 처음 후작가에 들어갔을 때 찬 음식을 먹지 못했던 것도, 천둥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심지어 내가 열일곱 살 때 강남으로 가서 봄날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