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혼약, 다시 찾은 삶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0 챕터

제1장

김연우가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여전히 흰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고, 옷깃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단정했다.나를 본 순간 그의 걸음이 잠시 멎었다. 하지만 이내 동요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임지헌의 손에서 꽃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는 순식간에 술이 깬 듯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황급히 내 소매를 붙잡았다."서윤아, 내가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렸다. 그저 너와 연우의 사이가 굳건한 게 부러워서 해서는 안 될 착각을 했을 뿐이다."연우라는 이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나는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었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방금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수 밥을 지어 주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마음도 착각이었느냐?"임지헌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연우가 한 걸음 옆으로 나서며 그녀를 등 뒤로 감쌌다."지헌이가 술을 못 마시는 걸 뻔히 알면서 어찌 말리지 않았느냐?"나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오늘 연회에서 술을 직접 따른 사람은 임지헌이었다.모처럼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났으니, 오늘만큼은 마음 놓고 즐기고 싶다고 했다.김연우는 내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손목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내가 살짝 피하자 그는 손을 허공에서 멈췄다가 천천히 거뒀다."사람이 많으니 일을 크게 만들지 말거라. 돌아가면 내가 설명하마."그 말은 팔 년 전과 똑같았다.당시 후작가가 죄에 연루되자 찾아오던 손님들의 발길이 모두 끊겼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파혼하라고 권했다.열다섯 살의 김연우는 박씨 가문 저택 앞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밝은 뒤, 오래되어 닳은 옥 장식 하나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지금 아무도 나를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를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이 혼약으로 평생 네가 불행해지는 일은 없게 하겠다."나는 팔 년을 기다렸다.그가 다시 세자의 옷을 입는 날까지 기다렸고, 점점 내 체면을 내세워 다른 여인을 감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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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혼례까지는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후작가의 살림을 맡은 곳에서 지출 목록 세 권을 보내왔다.혼례용 초와 연회 음식, 비단은 물론 사당을 새로 칠하는 비용까지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는 여느 때처럼 박씨 가문의 사재로 지불한다고 적혀 있었다.지난 팔 년 동안 이 문구를 너무도 많이 보았다.그날 나는 혼례복 치수를 적은 종이를 들고 포목점으로 향했다.주인이 막 나를 맞으려던 순간, 위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음에 들어 한다면 값은 더 따지지 말거라."별실에는 화려한 선홍빛 옷 한 벌이 펼쳐져 있었다. 금실로 수많은 새가 봉황을 향해 날아드는 문양을 수놓아, 촛불이 비치자 온 방이 눈부시게 빛났다.황실 여인만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었다.임지헌은 옷걸이 옆에 서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저는 평생 혼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저 혼례복 한 벌을 간직하며 위안으로 삼고 싶을 뿐입니다. 서윤이가 알게 되면 제가 분수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김연우가 나의 상단 패를 장부 위에 올려놓았다."서윤이는 이 정도 돈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나는 문밖에 잠시 서 있다가 문을 열었다.김연우가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상단 패를 쥐고 있었다."마침 잘 왔구나. 지헌이가 이 옷을 마음에 들어 하기에 우선 네 장부에 외상으로 올려 두었다. 나중에 갚으마."임지헌은 황급히 겉옷을 가져와 화려한 옷을 가리려 했다.나는 옷걸이 앞으로 다가가 촘촘하게 놓인 금실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삼천 냥, 평범한 집안이라면 몇 대에 걸쳐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고, 후작가의 반년 치 살림을 꾸릴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주인장, 드리거라."임지헌이 굳어 버렸다.나는 사람을 시켜 붉은 종이를 가져오게 한 뒤 직접 선물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 장부 위에 올려놓았다."임지헌 아가씨께서 혼례복을 갖고 싶으시다니, 이 삼천 냥은 제가 미리 드리는 혼례 선물로 하겠습니다. 훗날 정말 혼인하고 싶은 분을 만나더라도 남의 부군과 함께 혼례복을 고를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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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첫눈이 내리던 날, 노부인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졌다.노부인은 평소 나를 무척 아껴 주셨다.나는 꼬박 사흘 동안 침상 곁을 지켰고 탕약을 몇 번이나 새로 달여 올리면서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사흘째 되는 밤, 김연우가 마침내 후작 가문으로 돌아왔다.내가 침상 가장자리를 짚고 일어나는 것을 본 그는 손을 뻗어 내 팔을 받쳐 주었다. 손길은 따뜻하고 든든했다."두 시진이라도 가서 쉬거라. 오늘 밤은 내가 할머니 곁을 지키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어의께서 오늘 밤이 고비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김연우가 내 겉옷을 여며 주었다."알고 있다. 네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에 있으마."내가 막 바깥방으로 나왔을 때, 성 밖 산장에서 사람이 찾아왔다.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채 나타난 사내가 흠뻑 젖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임지헌이 홀로 산에 설경을 보러 갔다가 수행원들과 헤어졌다는 내용이었다.쪽지 끝에는 임지헌이 직접 쓴 문장이 있었다."이 설경도 세자와 함께 보지 못한다면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김연우는 쪽지를 읽자마자 벽에 걸린 두꺼운 외투를 집어 들었다.나는 문 앞을 막아섰다."후작 가문에는 호위도 있고 산길을 잘 아는 사냥꾼도 있습니다. 그들을 보내십시오.""지헌이는 어둠을 무서워하고, 일이 생기면 쉽게 당황한다."그는 손목 보호대를 단단히 동여매며 사람을 불러 말을 준비하라 명했다.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힘이 너무 약해 옷자락에는 옅은 주름 하나만 잡혔다."할머니께서 조금 전에도 세자를 찾으셨습니다. 오늘 밤 이곳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김연우는 고개를 숙여 밤샘으로 붉어진 내 눈을 바라보았다.그는 손을 들어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내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사람만 찾으면 곧 돌아오마. 약이 식기 전에는 반드시 돌아오겠다."약그릇에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차가운 눈바람이 함께 밀려들었다.문이 닫히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사라졌다.나는 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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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노부인을 장지에 모신 지 이레째 되던 날, 후작 가문의 채권자들이 측문까지 몰려왔다.박씨 가문에서 대 주던 자금이 끊기자, 그동안 감춰져 있던 후작 가문의 문제들을 드러나기 시작했다.김연우는 며칠째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나를 찾아왔을 때도 옷매무새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그가 혼례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상중에 백일 안으로 혼례를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할머니께서는 생전에 네가 시집오기를 가장 바라셨다. 백일 안에 혼례를 올린다면 할머니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나는 종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후작 가문이 삼 년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입니까?"김연우는 잠시 침묵하다 내 맞은편에 앉았다."둘 다다."근래 들어 보기 드문 솔직한 대답이었다."서윤아, 후작 가문에 네 혼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내가 너와 혼인하려는 것이 오로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팔 년 동안 혼약을 이어 오면서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삼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임지헌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지헌이는 후작 가문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김연우가 혼례 날짜가 적힌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지헌이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니 명분을 줄 수는 없다. 내가 세자빈으로 정한 사람은 너다. 그것만큼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알겠습니다."나는 붓을 들어 혼례 날짜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김연우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이내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혼인하고 나면 우리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나는 손을 빼지 않고 그의 손목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바라보았다.그가 열아홉 살이던 해, 날뛰는 말을 막아 나를 지키다가 생긴 흉터였다.상처가 가장 깊었을 때 그는 밤새 고통에 떨면서도 내게 알리지 못하게 했다.과거의 김연우도 진심이었다.내 남은 생을 바쳐 후작 가문의 빚을 메우게 하고, 다른 여인과의 관계마저 받아들이게 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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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경성을 떠난 지 열사흘째 되는 날, 나는 강남에 도착했다.아버지는 내가 왜 홀로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수운을 총괄하는 장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사람을 시켜 강가의 옛 별채를 정리하게 했다.나는 치맛자락이 긴 옷을 벗고 배에 오르내리기 편한 소매가 좁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긴 머리도 더는 복잡하게 틀어 올리지 않고 나무 비녀 하나로 간단히 틀어 올렸다.처음 배를 점검하러 나간 날, 나는 사람을 시켜 연한 차를 더 준비하게 했다.김연우는 진한 차를 마시지 않았다.밤늦도록 장부를 볼 때면 늘 따뜻한 우전 용정차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차가 나오자 나는 잠시 바라보다가 치우라고 했다.경성의 소식은 계속해서 전해졌다.후작 가문은 하인들의 월급조차 줄 수 없게 되자 먼저 장원 두 곳을 팔았다.과거 김연우와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그가 박씨 가문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나둘 문전박대했다.채권자들이 연이어 찾아왔고, 노부인의 장례를 치르며 진 빚까지 들춰졌다.임지헌은 여전히 후작 가문의 별원에 머물고 있었다.처음에는 김연우와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식량이 줄어들자 음식이 거칠다며 불평했고, 숯마저 줄어들자 김연우가 일부러 자신에게 화풀이한다고 했다.이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편지에는 후작가가 잠시 어려움을 겪는 것뿐이니 상단 패를 돌려보내라고 적혀 있었다."지헌이가 크게 놀라 안정을 취해야 하니, 혼례복 일은 더는 따지지 말거라."끝내 치르지 못한 그날의 혼례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이만큼 소란을 피웠으면 충분하다. 이제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면 된다."나는 편지를 화로에 던졌다.두 번째 편지는 더 빨리 도착했다.이번에는 임지헌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대신 우리가 함께한 지난 팔 년의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내가 처음 후작가에 들어갔을 때 찬 음식을 먹지 못했던 것도, 천둥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심지어 내가 열일곱 살 때 강남으로 가서 봄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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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김연우가 강남에 도착한 그날 밤, 차가운 비가 내렸다.상단의 문을 닫기 전, 호위가 찾아와 김연우가 문밖에 무릎을 꿇고 나를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빗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나는 장부를 덮고 창가로 걸어갔다.김연우는 여전히 돌계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비단 도포는 빗물에 흠뻑 젖었지만 그는 허리를 조금도 굽지 않았다.경성에서 모두가 칭송하던 후작 가문의 세자가 진흙탕에 무릎을 꿇은 채 뒤늦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휘장을 내렸다.날이 밝아 올 무렵, 김연우가 문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하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그 손을 밀어냈다."박서윤이 나를 만나 주지 않는다면 계속 기다리겠다."결국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발소리를 들은 김연우가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그의 눈빛에 너무나 익숙한 빛이 스쳤다.그는 다급히 일어나다 비틀거리면서도 내 손을 잡으려 했다.호위가 칼집을 가로세워 우리 사이를 막았다.김연우의 손이 칼집 앞에서 멈췄고, 손가락 마디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서윤아, 나와 함께 돌아가자."그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여전히 반듯하고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예전의 여유로운 기색은 빗물에 씻겨 나간 듯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내 차림새를 훑다가 머리에 꽂은 나무 비녀에서 멈췄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날 내가 혼례청을 떠난 것은 지헌이가 정말로 출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일로 지헌이의 평생이 망가진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김연우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 주려 했다.내가 한 걸음 물러나자 겉옷은 그의 팔에 걸렸다."너는 추위를 많이 타지 않느냐.""임지헌은 어디 있습니까?""사람을 시켜 임씨 가문으로 돌려보냈다."그가 반걸음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췄다."앞으로는 지헌이를 만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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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임지헌이 상단에 들이닥쳤을 때 입고 있던 옷은 바로 그 화려한 붉은 옷이었다.그녀는 경성에서 강남까지 나를 쫓아왔고, 곁에는 시녀 한 명만 데리고 있었다.옷자락은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금실로 수놓은 문양은 여전히 눈부셔 상단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지헌은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대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난 한 번도 너와 다툴 생각이 없었어다. 너한테는 가업도 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있고, 경성에서 누리는 명망도 있지 않느냐. 그런데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은 나를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이냐?"뒤이어 김연우가 달려왔다.그가 임지헌을 데리고 나가려 하자 그녀는 손을 뿌리치고 사람들 앞에서 겉옷을 풀어 붉은 옷을 드러냈다."봐. 이제는 이 옷마저 내 잘못이 된 것이냐? 내가 죽어야만 세자를 놓아줄 것이냐?"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나는 그녀와 김연우를 두고 다투지 않았다. 그저 장부를 맡은 이에게 지난 팔 년간의 거래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과거 우리는 절친한 벗이었다.임지헌이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이며 나들이에 쓴 마차와 말, 절에 올린 공양까지 대부분 내가 대신 값을 치렀다.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그녀는 나의 상단 패로 마흔일곱 차례나 외상 거래를 했다.그중 스물한 건에는 김연우의 서명과 인장이 찍혀 있었고, 나머지는 예전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쓰라고 내가 그녀에게 맡겨 둔 개인 인장을 사용했다.옷과 장신구, 별원 수리 비용까지 모두 일만 육천삼백 냥이었다.장부를 맡은 이가 사람들 앞에서 모든 내역을 읽고 나자 시끄럽던 대청이 점차 조용해졌다.나는 장부를 그 붉은 옷이 기록된 장까지 넘겼다."예전에 선물한 것들은 따지지 않겠다. 허나 상단 패가 이미 회수된 것을 알면서도 계속 후작 가문 세자빈의 명의로 외상을 달아 두었더군."임지헌이 옷깃을 세게 움켜쥐었다."이건 세자께서 내게 준 것이다.""하지만 내 돈으로 산 것이다!"나는 여집사에게 수수한 옷 한 벌을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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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김연우는 두 달 동안 상단에서 일했다.예전에는 궂은일에 손 한번 대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배를 따라다니고 물건을 검수하고 화물을 호위하는 일까지 무엇 하나 마다하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를 회계라 불러도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물품 목록을 대조할 뿐이었다.한번은 나루터를 지나다 그가 갑판에 쪼그려 앉아 밧줄을 다시 묶는 모습을 보았다.손가락 끝이 까져 피가 삼베 밧줄에 스며들고 있었다.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감췄다.나는 잠시 멈춰 섰다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바를 약을 보내 주었다.그런데 그날 밤, 김연우는 빈 약병을 깨끗이 씻어 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봄이 시작된 뒤, 상단에서 북쪽 강안으로 물건을 보내야 했다.김연우는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겠다며 자청해 배를 호위하겠다고 나섰고, 황제가 후작 가문에 하사한 문서까지 꺼내 거래의 담보로 삼았다.황제가 하사한 물건은 본래 사사로이 담보를 잡을 수 없었다.나는 그 사실을 일러 주었지만, 그는 끝내 계약서에 서명했다."이번 거래만 성사되면 빚의 절반 이상을 갚을 수 있다. 후작 가문에 남은 것도 이제 이것뿐이니, 마지막으로 한번 걸어 보겠다."도중에 도적을 만났을 때 김연우는 화물선을 지키려다 칼을 맞았다.소식을 듣고 객잔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의원이 그의 상처를 꿰매는 동안 나는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약을 두 번이나 다시 데웠다.김연우는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나를 보았다."물건은 어찌 되었느냐?""지켜 냈습니다."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손을 들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놓지는 않았다."서윤아, 예전의 나는 네가 다른 사람보다 강인하니 서러운 일을 조금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칼을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리 잘 참는 사람이라 해도 아픔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더구나."눈물이 소리 없이 그의 눈가에서 흘러내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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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후작 가문이 압류되었다는 소식이 강남에 전해졌을 때, 김연우는 이제 막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작위는 박탈되었고 선대부터 내려온 저택은 관아에 몰수되었다.김연우는 세자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했다.임지헌을 대신해 서명했던 담보 문서 역시 그가 끝내 갚지 못한 마지막 빚으로 남았다.김연우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매일 받는 품삯을 전부 회계에게 건넸다.임지헌은 자취를 감췄다.그녀는 김연우가 약값으로 남겨 둔 삼백 냥을 챙겨 강남을 지나던 한 권세가에게 의탁했다.보름 뒤, 나는 술집 밖에서 그녀를 보았다.임지헌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녀들 뒤에 서 있었다.그 권세가의 정실부인이 마차에 오를 때, 그녀는 허리를 숙여 치맛자락을 들어 주었다. 예전의 거침없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마차 곁에 있던 집사가 짜증스럽게 재촉했다."명분도 없이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시녀 주제에 감히 안주인을 기다리게 하느냐?"임지헌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마차에 올랐다.김연우는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그는 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몸은 몹시 야위었고 상처도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임지헌을 발견한 김연우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 마차를 막아섰다."돈을 갚거라."임지헌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네가 자진해서 나한테 남겨 준 것이다. 게다가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데, 설마 나더러 널 따라 고생하라는 것이냐?""너는 후작 가문도,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그때 네가 세자셨으니까."김연우는 더 이상 마차를 막지 않았다.마차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튀긴 흙탕물이 빛바랜 옷자락에 묻었다.김연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고, 그제야 내 마차를 발견했다.나는 휘장을 내리려 했지만 그가 비틀거리며 뒤쫓아 왔다.호위가 마차 앞을 막아섰다."서윤아."삼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나는 그를 쫓아내지 않고, 반쯤 내려온 휘장 너머로 김연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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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삼 년 뒤, 박씨 가문의 수운은 열세 성을 잇게 되었다.북방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박씨 가문의 상선은 군수 물자를 무상으로 운송한 공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이례적으로 황실 상단의 금인을 하사받았다.서원에서는 시집에서 내쳐진 여인과 의지할 곳 없는 과부는 물론, 평생 깊은 규방에 갇혀 살기를 원하지 않는 아가씨들도 받아들였다.그곳에서 여인들은 글을 익히고 주판으로 셈하고 계약서를 살피는 법을 배웠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법도 배웠다.첫 제자들이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 누군가는 상점에 들어가 장부를 맡았다.누군가는 뜻을 모아 포목점을 열었고, 또 누군가는 돈을 모아 시집간 딸을 데려왔다.나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장부를 품에 안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봄날 상점들을 둘러보던 중, 내 마차가 옛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길모퉁이에 다리가 불편한 거지가 앉아 있었다. 옷은 낡아 해졌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다.바람에 마차 휘장이 들린 순간,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김연우였다.삼 년의 세월은 과거의 모습을 거의 모두 지워 놓았지만, 두 눈만큼은 여전히 예전과 닮아 있었다.그는 내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벽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다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고 손바닥이 쓸려 피가 맺혔다.지나가던 누군가가 그의 앞에 동전 두 닢을 던졌다.김연우는 동전을 줍지 않았다.대신 품속에서 오래된 옥 장식을 꺼내 오가는 사람들 너머로 내게 들어 보였다.그의 입술이 움직였다.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마차는 멈추지 않았다.오후가 되어 나는 성 밖에 새로 세운 서원에 도착했다.수십 명의 아가씨들이 뜰에서 주판 놓는 법을 익히고 있었고 주판알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친 듯했다.수업을 맡은 여선생이 새로 들어온 제자들의 명부를 내게 건넸다.가장 어린 제자는 열여섯이었다. 살림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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