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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Author: 임서아
어슴푸레한 방 안, 주현우는 허리를 숙이고 허아연 곁에 다가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허아연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주현우는 또 꼬박 밤을 새웠다.

……

다음날.

허아연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 아직 회사 정문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오지은이 멀리서부터 환한 얼굴로 허아연을 불렀다.

"아연아."

허아연이 웃으며 몸을 돌려 오지은에게 인사했다.

"지은 언니."

한쪽에서 김민희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오지은 대표님."

가까이 온 오지은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또 너희 경주 그룹에 왔어. 그런데 아연아, 내 손에 지금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나는……"

오지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 뒤에서 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아연 부대표님."

왠지 묘한 의미가 담긴 오만한 말투였다.

허아연이 돌아보니 오만한 분위기에 한정판 개량한복을 입은 여자가 허아연과 오지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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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06화

    주현우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유건희도 더는 날을 세우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그때 허아연 씨 우울증이 정말 심각했어요. 교진시를 떠나기로 결심할 무렵엔 이미 깜빡깜빡 기억을 못 하고 말도 더듬기 시작했었고요.""다시 발작해서 버티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거예요. 그리고 주현우 씨와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아서 떠나는 걸 택한 거고요.""주현우 씨, 아연 씨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요. 아니면 평생 더 힘들었을 거예요."평소 말수가 적은 유건희였지만 오늘따라 말이 아주 많았다.과거 일을 변명하려는 게 아니라 제삼자인 유건희도 허아연의 결혼 생활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허아연이 깜빡깜빡 기억을 잃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는 유건희의 말에 주현우의 표정이 굳었다.그 모습을 본 유건희가 다시 말했다."허아연 씨 정체를 밝히든 말든 그건 주현우 씨가 결정할 일이에요. 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에요."유건희가 솔직하게 다 털어놓자 주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고맙습니다, 유 대표님."자리에서 일어난 주현우는 유건희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섰다.차로 돌아온 주현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입에서 새어나오며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유건희도, 권승준도 허아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그런데 주현우와 엮인 사람들, 주현우 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허아연은 정말 주현우를 꺼려하며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었다.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한 모금씩 태우던 주현우는 유건희의 말을 곱씹다가 저도 모르게 2년 전 그날 밤을 떠올렸다. 허아연은 한밤중에 나가려던 주현우를 붙잡고 꼭 가야 하냐고 물었다. 그때 주현우는 곧 돌아오겠다고 했었다.하지만 그날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다시 돌아왔을 때 허아연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안시연은 허아연이 맞았다. 안시연이 허아연이라는 진실을 알아냈지만 주현우는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차라리 몰랐던 때보다 더 답답했다.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05화

    ……오후 2시, 식사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차에 돌아온 주현우는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지르던 주현우의 마음이 답답해졌다.눈을 감고 전에 확인한 DNA 보고서를 떠올리자 미간이 더 팍 찌푸려졌다.기분이 다운된 주현우를 룸미러로 살피던 기사는 감히 차를 출발시키거나 말을 걸지도 못했다.한참 뒤 다른 차들이 다 떠나는 걸 보고서야 기사가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이제 회사로 돌아갈까요?"기사의 물음에 콧대를 문지르던 주현우가 느긋하게 말했다."택시 타고 들어가요. 차는 내가 몰고 갈게요."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 있고 싶었다."네, 대표님." 기사는 그 말에 얼른 차 문을 열고 먼저 자리를 떴다.주현우가 오늘 기분이 안 좋다는 건 기사도 아침부터 눈치채고 있었다.차 안에 혼자 남으니 주현우는 오히려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혼자 차 안에 잠시 앉아 있던 주현우는 다시 보고서를 들고 꼼꼼히 훑어보았다.한참 보고서를 조용히 바라보던 주현우는 보고서를 다시 넣어두고 뒷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탄 뒤, 시동을 걸고 자리를 떠났다.회사나 허아연에게 가는 게 아니라 차를 몰고 스타라이트 테크로 향했다."주 대표님.""주 대표님."스타라이트 테크와의 협력이 많아서 거의 자기 회사 드나들듯 하는 주현우를 직원들도 다 알아보았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주현우는 한 손은 주머니에, 한 손은 서류를 든 채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가 유건희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유건희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며 태연하게 물었다."주 대표님이 오늘 어쩐 일이세요?"유건희의 태연한 모습에 주현우도 빙빙 돌리지 않고 손에 든 보고서를 건네고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유건희는 DNA 보고서를 건넨 주현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서류를 펼쳐 확인했다.안시연이 곧 허아연이라는 DNA 대조 결과를 보고도 유건희는 전혀 놀라지 않았고 감정 변화도 없었다.진실은 언젠가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04화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회사 다른 직원들과 동승 그룹 사람들이 다가왔다."주 대표님.""주 대표님."사람들의 인사에 주현우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당당하게 인사를 받았다.잠시 후 일행이 위층에 도착하자 마침 도착한 권승준도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권승준을 본 주현우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며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두 사람이 가까워지던 그때, 안서준과 허아연이 룸에서 나와 사람들을 맞이했다. "주 대표님.""비서실장님."권승준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안서준은 주현우가 권승준을 초대한 걸 꺼려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게다가 오늘 두 회사가 정부에서 계약을 체결한 만큼 권승준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의적인 의도도 다분하긴 했다. 허아연이 연애를 한다면 권승준을 선택하겠다고 안서준에게 밝힌 뒤였다.안서준 옆에 서 있던 허아연은 권승준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비서실장님."환하게 웃는 허아연을 돌아본 주현우는 마음이 쓰라렸다. 주현우와 함께 할 때면 환하게 즐거운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눈을 떼지 못하는 주현우와 달리 허아연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권승준에게 인사하며 함께 룸으로 들어갔다.안서준과 인사를 나눈 주현우도 무심하게 룸으로 들어갔다.자리에 앉을 때 권승준이 허아연을 위해 옆자리를 비워두고 의자를 빼며 말하는 모습에 주현우는 더 부아가 치밀었다."안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권승준의 배려에 허아연이 웃으며 다가가 앉았다."네, 감사해요. 비서실장님."말하며 권승준이 빼준 의자에 앉았다.잠시 후 직원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하자 권승준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허아연을 챙기며 음식을 집어주기도 했다.허아연도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안서준은 정중하게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주현우나 허아연과 권승준 쪽을 구경하듯 바라보았다. 주현우가 사무동 매입에서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허아연과 권승준의 만남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이 정도는 2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03화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허아연은 대수롭지 않아하며 시선을 거두었다.지금의 허아연은 더 이상 주현우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잠시 후, 다들 계약서를 다 확인하고는 서로 옆자리 동료들과 눈빛을 확인하고는 상대 회사 직원들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계약서는 문제없습니다."사람들이 대화하는 사이, 주현우와 안서준도 계약서 검토를 마치고 옆에 놓인 펜을 들어 각자 서명했다.이어서 계약서를 맞바꿔 상대방 계약서에도 서명했다.서명을 마친 안서준이 당당하게 일어나 주현우한테 걸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주 대표님, 좋은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 태광 건물 인수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주현우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태광 그룹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했을 것이다.안서준의 손을 마주 잡은 주현우가 웃으며 말했다."안 대표님도 별말씀을요. 좋은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주현우의 말이 끝나자 안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주 대표님, 염색하시니까 훨씬 활기 있어 보이시네요."주현우가 대꾸하기도 전에 안서준이 이어 말했다."호텔에 경주 그룹 직원분들 위해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저희 동승 그룹을 환대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라고 생각해 주세요." 안서준이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는 말에 주현우가 답했다."좋습니다, 이따 가겠습니다."이어서 양측은 회의실에서 잠시 더 얘기를 나누다가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안서준과 얘기하고 계약서에 서명하는 내내 주현우는 계속 허아연이 신경 쓰이고 눈길이 갔다. 다만 허아연의 담담한 거리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잠시 후 안씨 남매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주현우도 정부 청사를 나섰다.주차장에 세워둔 마이바흐 앞에서 기사가 막 차 문을 열어주는데 오원빈이 헐레벌떡 뛰어왔다.주현우가 차창을 내리고 바라보자 숨을 헐떡이던 오원빈이 검사 보고서 두 장을 다급하게 건네며 말했다."대표님,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모근 검사 결과로는 머리카락이 두 사람 것이었습니다."주현우는 오원빈이 건넨 보고서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02화

    바로 휴대폰을 꺼낸 안서준은 주현우에게 전화를 걸어 태광 건물 양도에 관해 만나서 얘기하자고 약속을 잡았다.주현우는 그 건물을 가지고 있어봤자 쓸모가 없었고 어차피 합리적인 가격에 인수할 생각이었기에 굳이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다.사업하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돈을 버는 것이었다. 주현우와의 통화 중에 두 사람은 건물 매입 문제에 대해 거의 확정 지었다. 안서준이 부른 가격은 태광과 협의했던 희망 가격 그대로였고 일부러 경주 그룹의 가격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사실 주현우가 부지를 매입한 가격이 곧 안서준이 부른 가격이었다. 태광이 높은 가격을 부른 건 안서준이 강성시에서 온 데다 사무실 건물이 필요했고 태광은 자금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건물 양도 얘기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 주현우의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원빈이 들어와 문을 닫고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찾으셨어요."주현우는 서랍을 열어 어젯밤 챙겨둔 머리카락을 건네며 말했다."이거랑 허아연 DNA 데이터와 대조 검사해봐. 같은 사람인지 확인해."비록 이미 사망 신고로 호적이 말소됐지만 경찰 시스템 데이터베이스에는 여전히 허아연의 DNA 자료가 남아 있었다.주현우도 따로 갖고 있었다.그러니 대조 검사만 하면 안시연이 정말 허아연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오원빈이 주현우가 건넨 머리카락을 받아 들고는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병원에 다녀오겠습니다."말을 마친 오원빈은 허아연의 머리카락 샘플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사무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주현우는 시선을 거두었다.이제는 허아연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다.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현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안서준은 주현우와 양도 가격을 합의할 때 계약 일정을 금요일로 정했다. 태광 그룹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일 줄 알았는데 주현우가 나타나면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금요일 오전, 안서준은 정부 청사로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01화

    허아연의 말이 끝나자 한참 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안서준은 그제야 손을 뻗어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계약서를 펼쳐 앞부분을 볼 때까지는 안서준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주현우가 제시한 가격을 본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역시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거였다.허아연이 건넨 계약서를 다 읽은 안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인심 한번 후하네. 아직 미련을 완전히 못 버린 모양이야."안서준의 말에 허아연이 말했다."그럼 이 계약서는 서준 씨한테 넘길 테니 직접 얘기해봐요. 볼일이 있어서 스타라이트 테크에 좀 다녀와야겠어요."안서준이 말을 마치고 나가려는 허아연을 불러 세웠다."허아연."안서준의 부름에 허아연이 바로 돌아서며 바라보았다."더 할 얘기 있어요?"시선을 떨구고 허아연을 바라보던 안서준은 손에 든 계약서를 힐끗 쳐다보고는 물었다."주현우가 이렇게 통 크게 나오는데 마음 흔들리지 않았어?"허아연이 안서준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주현우 오래 알고 지냈잖아요. 원래 돈에 관해서는 늘 시원시원했어요.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성격이에요."예전에도 오씨 가문과 오성 그룹에 놀라울 정도로 쏟아부었다. 스캔들 상대 여자들한테도 씀씀이가 후했다.허아연의 말에 안서준의 눈빛이 저도 모르게 약간 누그러졌다.그 눈빛을 본 허아연은 혹시라도 안서준이 오해하거나 잘못된 힌트를 줬을까 걱정되어 바로 덧붙였다. "걱정 말아요, 주현우와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만약 연애를 한다면 권승준을 선택할 거예요."사실 여러 사람을 만나도 권승준과 있을 때가 제일 부담이 없었다.물론 안서준과 안씨 가문에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다만 고맙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감정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주현우와의 실패한 결혼 생활이 가장 좋은 본보기였다.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듯한 허아연의 말에 안서준은 웃음이 터졌다."이젠 머리도 잘 돌아가네, 나 들으라고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안서준의 장난스런 말에 허아연이 진지하게 말했다."오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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