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권승준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초대하자 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좋아요."권승준과 한 약속은 제멋대로 어길 생각이 없었다.허아연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권승준은 미소가 더 환해진 얼굴로 반찬을 집어 건네며 말했다."허 선생님, 많이 먹어요.""고마워요, 비서실장님."허아연은 여전히 예의를 차리는 게 습관이 된 듯했다.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이 강가를 산책하던 중 진태호가 허아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진태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 씨, 지금 어디예요? 빨리 호텔로 돌아올 수 있어요? 서준 씨 정말 답이 없네요. 얼른 좀 와줄래요?"허아연은 다급해하는 진태호에게 서둘러 물었다. "진 부장님, 저희 오빠한테 무슨 일 있어요?"전화기 너머에서 진태호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전화로는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돌아와서 얘기해요.""네, 바로 갈게요." 답하고 전화를 끊은 허아연은 권승준을 돌아보며 말했다."비서실장님, 산책은 다음에 또 해요. 저 지금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방금 통화는 권승준도 들었기에 더 캐묻지 않고 바로 허아연을 호텔로 데려다주었다.20분 뒤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서자 허아연은 차에서 내려 권승준에게 인사를 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겨 위층으로 올라갔다.안서준의 방 앞에 도착하니 진태호가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막막한 얼굴로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간 허아연이 물었다."진 부장님, 저희 오빠한테 무슨 일 있어요?"허아연의 목소리에 진태호가 흠칫 돌아서더니 고개를 들어 허아연을 보며 말했다."교도소에 면회 갔다가 용의자를 때려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 처치 중이래요."진태호의 말에 허아연은 할 말을 잃었다.더 물을 것도 없이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서준이 허아연의 교통사고를 낸 용의자를 때린 것이었다.숨을 길게 들이쉰 허아연이 스위트룸 안쪽을 바라보니 안서준이 한 손에는 전화기를, 다른 손은 허리에 얹은 채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 두 사람은 방금 유서희와 마주쳤던 일은 언급하지 않고 계속 업무 얘기만 나눴다.……같은 시각, 유서희의 차 안.무거운 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아있는 유서희는 방금 권승준이 나타나 허아연을 데려가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다.허아연이 너무 많은 억울함을 겪었다는 걸 알기에 이해를 하려 하면서도 막상 권승준과 함께 있는 걸 직접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유서희의 머릿속에서 허아연은 늘 주씨 가문과 가까운 사람이자 며느리였으니까.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어떤 습관이든 마찬가지였다.한참을 고민하던 유서희는 그 시절 주현우가 허아연을 저버렸다는 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주현우가 전화를 받았다. 주현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서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현우야, 포기해. 아연이 놓아줘."전화기 너머에서 주현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어리둥절해하는 주현우에게 유서희가 말을 이었다."방금 아연이 만나러 갔는데 권승준이 데리러 왔더라, 두 사람 사이도 좋아보이고. 아연이도 그 사람이랑 있는 게 즐거운가 봐."잠시 멈칫하던 유서희가 다시 말했다."현우야, 아연이 놓아줘."주현우한테 허아연을 놓아주라고 하는 유서희도 미처 몰랐던 게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신분인 안시연으로 사는 허아연은 이미 예전의 허아연이 아니었기에 놓아주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법적으로 허아연은 이미 자유의 몸이었고 누구와 함께하든 본인의 선택이었다. 유서희가 다시 한번 얘기하자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주현우는 순간 더 답답해졌다.잠시 침묵하던 주현우가 말했다."전 못 내려놔요."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너 어떻게……"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던 유서희는 문득 허아연이 지금은 안시연이라 불린다는 사실에 다시 말을 삼켰다.그 생각이 든 유서희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그럼 끊을게."말을 마친 유서희는 주현우의
유서희를 본 순간 허아연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유서희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아연을 보러 온 것이 분명했다.허아연의 정체나 죽은 척해서 도망갔다는 사실도 이미 다 알고 있겠지. 주민경 앞에서는 그래도 차분할 수 있었지만 유서희 앞에서는 조금 달랐다.어쨌든 윗어른이었다. 허아연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가가자 유서희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외쳤다."아연아."전에 허아연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겨우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감정이 격해진 유서희 앞에 다가선 허아연은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 결국 도로 말을 삼켰다.정확히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부터 문제였다. 예전에는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됐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무지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남 같고 어색했다. 주현우와는 망설임없이 선을 그을 수 있었지만 어른들에게는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 허아연의 복잡한 표정을 본 유서희가 말했다."아연아, 아무 말 안 해도 돼. 엄마는 다 알아, 다 현우 잘못인 거 알아. 현우 때문에 네가 억울한 일을 겪어서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다 알아.""네가 무사하게 건강히 잘 지내기만 하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같은 여자로서 허아연이 이렇게까지 한 사정을 유서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 찾아온 것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서였다.다 안다는 유서희의 말에 허아연은 잠시 신중히 고민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고마워요, 어머니."허아연의 어머니라는 말에 유서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꾹 참고 다시 말했다."아연아, 엄마 다 알아. 너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 네가 민경이처럼 나를 엄마라고 부른 거 알아."허아연의 손을 잡은 유서희가 이어 말했다."아연아, 우리 둘 밥 한 끼 같이 할 수 있을까? 네 일에 관해서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유서희의 식사 약속에 허아연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손목
"게다가 요즘 계속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너랑 안 선생님 사고 걱정 때문에."오지은의 하소연에도 주현우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다른 볼일 없으면 나가."여전히 싸늘한 주현우의 태도에 오지은은 약간 민망해진 눈치였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주현우를 빤히 쳐다보던 오지은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현우야, 정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아연이한테 받은 화풀이를 왜 나한테 하는데?""너 진짜 예은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 예은이 자체를 아예 잊은 거야?" 말을 마친 오지은이 다시 주현우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죽었다 다시 살아 돌아온 허아연이 이렇게 중요한 거면 예은이가 살아 돌아온다면 현우 너는 대체 어떻게 할 건데? 어떤 선택을 할 건데?"오지은이 억울한 얼굴로 몰아붙이자 주현우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눈빛이 한없이 날카로웠다.정면으로 마주한 눈빛에 오지은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란 동시에 하지 말아야 할 말과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오지은은 황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해본 말이야. 예은이는 아연이랑 다르잖아, 계산적이고 꿍꿍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많이 아팠던 거 너도 알잖아."허아연이 계산적이라는 오지은의 말에 주현우는 들고 있던 서류를 탁하고 책상에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주현우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는 걸 느낀 오지은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갔다.그렇다고 주현우한테 말대꾸를 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한발 물러나 사과했다."방금 말이 심했으면 사과할게."그리고 다시 앞으로 다가와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사인 받으러 왔어, 지난번 협력 프로젝트 추가 계약서야."계약서를 건네던 오지은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그동안 사업들 신경 써줘서 고마워."오지은이 감정이나 허아연과 오예은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자 주현우의 표정도 조금 전만큼 어둡지는 않았다.오지은이 건넨 계약서를 받아든 주현우는 대충 훑어보고 갑 측 자리에 서명한 뒤 계약서를 던지
주현우의 물음에 허아연이 여유롭게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당신이 잘 지내든 못 지내든 그건 당신 탓이지 나랑은 상관없어요.""주현우 씨, 이제 와서 나한테 정이 남아 있다는 그런 말하지 마요. 그건 당신 자신이나 속일 핑계니까요." "그렇게까지 애써서 내 정체를 증명한 것도 결국 당신 마음 편하자고 한 거잖아요. 좋아요, 이제 뜻대로 됐네요. 나 안 죽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이제 마음 편하겠네요.""하지만 주현우 씨,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당신을 내려놨어요. 당신도 이만 나를 내려놓고 우리 각자 잘 지냈으면 해요."허아연 눈에 주현우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죄책감을 덜려는 것에 불과했다.허아연의 죽음과 깔끔하게 선을 긋고 싶을 뿐이었다.혹시 다른 감정이 남아 있다 해도 허아연은 믿지 않았다. 3년의 결혼 생활을 겪으며 이미 모든 걸 다 꿰뚫어 봤으니까.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주현우를 보며 허아연이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주현우 씨, 원래는 정체를 인정하거나 당신이랑 다투거나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할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그런데 당신이 적당히 할 줄 몰라서 나를 이렇게까지 난처하게 만든 거예요."허아연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큰 감정 변화는 없었다.사실 주현우 혼자 마음속으로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일들도 있었다. 굳이 허아연에게 다 밝히려 하거나 확인받을 필요는 없었다.허아연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금 삶을 존중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런데도 주현우는 여전히 예전처럼 자기감정만 신경 쓸 뿐 다른 사람 마음은 헤아릴 줄 몰랐다.난처하게 만들었다는 말에 주현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전에 허아연의 DNA 검사 결과를 들고 유건희를 찾아갔을 때도 허아연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라고 한 적 있었다. 주현우가 아무 대꾸도 못 하자 허아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말했다."앞으로는 마주치는 일이 적었으면 좋겠네요.""먼저 갈게요."멀어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현우는 얼굴이
그때는 허아연도 자주 꾸벅꾸벅 졸곤 했었다.그러다 침대에 가서 자라고 하면 순순히 주현우의 침대로 가서 잠들곤 했다.그때는 두 사람 사이가 더없이 좋았었다.허아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새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미동도 없는 속눈썹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후회가 밀려왔다.그때는 왜 그렇게 눈치도 없이 허아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을까?사실 눈치는 챘었다. 다만 일기장을 본 순간, 질투심에 미쳐버렸을 뿐이었다. 지난 기억들이 밀려오자 주현우는 오른손을 들어 허아연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다만 너무 늦게 찾아온 다정함이었다. 아주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허아연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고 말았다. 두 손으로 좌석을 짚고 몸을 일으킨 허아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을 비비며 나긋하게 말했다."호텔 도착했네요."허아연이 깨어나자 주현우는 천천히 손을 거두며 부드럽게 답했다."응, 호텔 도착했어."주현우의 말에 잠에서 깬 허아연도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며 말했다."고마워요, 주 대표님."허아연이 또 주 대표님이라고 부르자 주현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특히 정체가 밝혀지고 서로 속마음을 다 터놓은 뒤로도 허아연이 주 대표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주현우는 너무 어색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잠시 허아연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주현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꼭 이렇게 선을 그어야 해? 꼭 이렇게 남처럼 굴어야겠어?"허아연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현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잠시 바라보기만 하던 허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려버렸다.허아연이 말없이 차에서 내리자 주현우도 차 문을 열고 곧장 뒤따라 내렸다.허아연을 따라잡은 주현우가 손을 뻗어 팔을 잡으며 불렀다."허아연."주현우가 팔을 잡아당긴 탓에 흘러내린 가방끈을 다시 어깨에 걸친 허아연이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아연이 차분하게 말했다."주현우 씨, 당신이 오해하는 것도 싫고 당신한테 어떤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