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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엄이빈
성유원은 더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연지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일 월요일이잖아. 오후에 시간 있어? 우리 가정 법원에 미리 가서 처리하자. 두 달 정도 앞당겨도 상관없지?”

서명해도 한 달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아이를 낳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성유원은 그녀를 바라봤다.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 그 눈빛에는 한 겹 더 살피는 기색이 얹혔다. 그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내가 정한 시간에 가. 그게 언제든.”

연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차가 성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김미현이 그들을 부른 건 확실히 연지아 뱃속 아이 때문이었다.

성씨 가문은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었다.

김미현에게는 아들이 둘이었다. 장남 성정석, 차남 성한민.

성정석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 성주헌은 몇 년 전 결혼해 쌍둥이 아들을 낳았고, 올해 다섯 살이었다. 차남 성민우는 올해 스물넷으로, 아직 미혼이었다.

성한민에게는 성유원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연지아가 딸을 임신한 걸 두고 김미현도 성종현도 무척 기뻐했다.

“역시 경사야. 이 작은 꼬마가 들어오니까 저 사람 병도 좋아졌네.”

김미현이 아이 일에 이렇게 크게 생각하자, 이서연도 따라 맞장구를 치며 연지아에게도 몇 마디 좋게 말했다.

연지아는 옆에 앉아 얌전히 받아 대답했다.

통통한 몸에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이서연의 눈에는 어쩐지 거슬렸지만 김미현 앞이라 티를 내지 않았다.

김미현은 기분이 좋아 값비싼 옥팔찌 하나를 연지아에게 건넸다.

연지아는 놀라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으려 했다.

이서연이 말을 얹었다.

“할머니가 주는 거면 그냥 받으면 돼.”

일반 집안 특유의 소심함이란 역시 격이 안 맞았다.

연지아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옥팔찌를 받아 들었다.

“감사해요, 할머니.”

“몸 잘 챙겨. 통통한 아기 낳아야지.”

연지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미현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본가에 남아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유원이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눈가에 웃음이 맺혔고 목소리도 다정했다.

그들은 반려동물을 한 마리 키우는 모양이었다. 성유원은 그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꼬맹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됐을지도 몰랐다.

“응, 나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성유원은 발코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거기 서 있던 연지아를 봤다. 연지아는 화들짝 놀랐다. 순간 반응이 늦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가슴이 턱 막혀 연지아가 급히 말했다.

“할머니가 너 서재로 오래.”

성유원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가슴 안쪽이 찌르듯 아픈 걸 억누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성유원이 서재에 들어섰다. 김미현과 성종현이 함께 있었다.

김미현이 말했다.

“유원아, 할머니도 네가 지아를 안 좋아하는 거 알아. 그래도 애는 곧 태어나잖니. 지아도 꽤 괜찮아. 좋은 학교 나온 데다가 성격도 순하고. 네 결혼은 안정이 중요해. 가정 챙기고 아이 키우는 데는 딱 맞는 사람이야.”

성유원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미간이 굳게 찌푸려진 걸 보면 기분이 어떤지 다 드러났다.

김미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연지아의 외모가 확실히 평범한 건 맞았고, 손자 곁에 서면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성종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네 혼사에 변수가 생기면 안 된다. 정말 마음이 없으면 네가 말했듯이... 그녀가 선을 넘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일단 1에서 2년 정도는 두고 보자.”

김미현도 바로 받았다.

“그래. 지금 너를 노리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네 약점 잡아서 기사 만들려고 기다려. 지아 몸조리까지 끝내게 하고 나서 갈라서도 늦지 않아.”

“...”

성유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깊은 눈빛 속에 무슨 생각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네, 알겠어요.”

연지아가 다시 김미현을 만났을 때, 김미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유원이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 조금 있다가 운전기사 보내서 너도 데려다줄게.”

연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그날, 떠나기 전.

김미현이 연지아에게 당부했다.

“임신했어도 몸은 좀 움직여야 해. 관리도 하고. 예전에 네 시어머니들 임신했을 때는 남편 따라 행사도 다니고, 집안일도 챙겼어. 쉽게 얻은 건, 계속 지키기가 더 어려운 법이야.”

연지아는 그 말속 뜻을 바로 알아챘다.

성씨 가문 며느리 자리는 만만하지 않았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면 지금의 자신부터 바꿔야 했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은, 성유원의 체면만 망가뜨릴 뿐이었다.

운동도 하고 요가도 하며 살을 빼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기운이 달려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체중은 더 늘었다.

그래도 김미현 말이 틀리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가라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이유가 ‘자리’ 때문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알겠어요.”

밤.

연지아는 뜻밖이었다. 아침에 이혼을 꺼냈던 남자가 집에 돌아왔다.

“너...”

“해장국 하나 만들어서 서재로 가져와.”

말을 끝낸 성유원은 바로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연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부엌으로 가서 국을 끓였다. 그릇에 담아 서재로 가져다줬다.

남자는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눈매는 날카롭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기운이 몸에 맴돌았다.

연지아는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재를 나왔다.

그가 집에 와도 둘은 따로 잤다.

남자는 2층 안방에서 자고, 그녀는 1층 손님방에서 잤다.

다음 날.

성유원이 집에 있으니 도우미들이 아침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그는 상석에 앉았는데, 연지아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그가 집에 있을 때면, 연지아는 다음 날 입을 옷까지 다려놓고 아침도 직접 준비했다. 그야말로 ‘얌전하고 성실한 아내’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다린 옷도 보이지 않았고, 밥도 도우미들이 차려놓은 것이었다.

“아주머니, 연지아는 어디 있어요?”

성유원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유미연이 곧바로 불평을 쏟아냈다.

“도련님, 아침부터 사람 보내서 깨웠는데요, 계속 안 일어나시더라고요. 맨날 밥도 방까지 갖다드려야 하고, 저희가 뭐 물어봐도 퉁명하시고요. 뭘 드실지 여쭤봐도 답이 없으시니 저희가 속을 어떻게 알아요. 임신했다고는 해도 그냥 임신이잖아요. 예전에 서연 사모님께서 도련님 임신하셨을 때는 성 회장님도 얼마나 정성껏 챙기셨는데요. 여기서는 오히려 진짜로 편하게 지내시려고 하시네요.”

성유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서 깨워요.”

“네, 도련님.”

연지아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다만 성유원이 먼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유미연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연지아를 보더니 역겨운 듯 말끝을 비틀었다.

“정말 대단하신 사모님이네요. 저희가 모셔 오길 기다리셨어요?”

연지아가 눈을 들어 차갑게 말했다.

“제가 사모가 아니면 당신이겠어요?”

몇 달 내내 고개 숙이고 말도 없던 연지아였다. 유미연은 연지아가 맞받아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연지아가 이어 말했다.

“앞으로 선을 넘으면, 그동안 뭐 하고 있었는지 할머니께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이혼할 거였다. 남은 두 달, 굳이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유미연의 눈이 커졌다.

“당신...”

어제 이서연이 전화를 걸어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한 게 떠올랐다. 딸이라 해도, 이 아이는 성씨 가문 삼대에서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김미현이 이렇게 크게 챙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미연은 이를 악물고 말을 삼켰다.

“도련님께서 다이닝룸에서 기다리세요.”

연지아는 의외였다.

식당으로 내려갔다.

성유원은 식사 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연지아를 한 번 봤다. 흰 니트 롱셔츠는 그녀의 부은 몸에 당겨져 형태가 흐트러졌고, 걸음도 힘이 없어 비틀거렸다. 커다란 배는 마치 여러 번 임신한 것처럼 과장돼 보였다.

연지아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스스로 그와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때 성유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본가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야. 너 때문에 뭐든 맞추게 하지 마. 임신한 거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임신한 거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래. 그에게 이 아이는 어쩌면 별것 아닐지도 몰랐다.

이 뜬금없는 핀잔은 분명 유미연이 옆에서 혀를 놀린 탓이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분들이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본가로 돌아가면 돼. 나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연지아는 그릇 속 죽을 천천히 저으며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밥도 자기가 차리고, 옷도 자기가 빨고, 방도 자기가 치웠다. 성유원이 있을 때만 그들은 돌보는 척했을 뿐이었다.

성유원이 미간을 더 깊게 접었다.

연지아는 그게 불쾌하다는 표시라는 걸 알았다.

일이든 생활이든, 성유원은 늘 강했고, 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난 알려준 거지, 의견 받자고 한 말 아니야.”

연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성유원은 그녀의 죽은 듯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도우미들에게 앞으로 연지아의 일은 연지아가 알아서 하게 하고 굳이 챙기지 말라고 했다.

연지아는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침 식사 끝나고, 성유원은 집을 나갔다.

연지아는 아현대학교로 향했다.

강현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는 정장을 말끔히 갖춰 입고 있었다. 오똑한 콧대 위엔 무테안경이 걸려 있었고, 분위기는 성숙하고 안정적이었다.

강현수는 올해 겨우 스물아홉, 아현대학교 경제학과 최연소 정교수였다. 경제학계에서도 이름이 쩌렁쩌렁한 천재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연지아는 손을 들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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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제10화

    연지아는 침대에서 옆으로 누워 쉬고 있었다. 손바닥을 아랫배 위에 얹고 아이가 톡톡 차는 움직임을 느끼다 보니 흔들리던 감정도 조금씩 가라앉았다.그런데 머릿속에서는 아까 서안성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성유원은 정말로 그녀 뱃속 아이까지 싫어하는 것 같았다.김미현이 지금은 이 아이를 챙긴다 해도, 언젠가 안연청이 성씨 가문 아이를 낳게 되면 그녀의 아이가 얼마나 대접받을까.그 생각은 더는 못 하겠다 싶을 만큼 두려웠다.연지아는 결심 했다.이 아이를 자신을 원하지 않는 집안에 남겨두고 혼자 버티게 할 수는 없었다.아이를 데리고 떠나야 했다.그때.똑똑똑.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연지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온 뒤, 문으로 가서 열었다. 문 앞에는 유미연이 서 있었다. 얼굴에는 날이 서 있었다.“도련님이 부르세요.”연지아가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성유원이 보였다.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분위기는 숨이 막힐 만큼 냉정했다.연지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남자의 표정 하나만으로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걸음이 굳어졌고, 눈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그녀가 남자 앞에 멈춰 섰을 때, 예상하던 꾸중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더 차갑고 잔인한 말이 떨어졌다.“이 서류, 다 끝내고 자.”말을 마친 성유원은 길게 뻗었던 다리를 거두고 다이닝룸 쪽으로 걸어갔다.연지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자료 뭉치를 바라봤다. 이건 오늘 밤 잠은 포기하라는 뜻이었다.그에게 연지아는 임산부도 아니었다.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는 정말로 그녀를 이렇게까지 미워했다.연지아는 손끝을 꽉 쥐었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돌려 남자의 등을 향해 말했다.“나 사직서 냈어. 이제 안 해.”성유원이 발걸음을 멈췄다.몸을 반쯤 돌린 채, 차가운 시선이 연지아 위로 떨어졌다.연지아는 온 힘을 모아 그 눈빛을 받아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성유원이 유미연

  • 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제9화

    성유원은 작게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안연청을 바라봤다.“연청이 너한테 친여동생이 있다는 걸 알면 큰일 나지. 네가 아직도 그렇게 그리워하는데 분명 질투할 거야.”송나겸이 말했다.“네가 연청이랑 만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아. 하지만 네 일 정리되기 전에는, 나는 연청이랑 네가 같이 사는 건 절대 못 봐.”성유원은 입꼬리를 옅게 올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송나겸이 웃었다.“별 얘기 아니야.”...“연지아 씨, 무슨 뜻이에요? 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알아요?!”주이빈이 자료 뭉치를 연지아 앞에 탁 소리 나게 내던졌다.조금 전에도 주이빈은 늘 그랬듯 연지아의 일이 아닌 업무를 연지아에게 처리하라고 넘겼고, 연지아는 대놓고 거절했다.연지아는 화가 난 주이빈을 보며 비웃듯 웃었다.“주이빈 비서님, 그 일도 못 하셔서 남한테 떠넘기실 거면... 그만두시는 게 낫겠어요.”“...”사무실 다른 직원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며 상황을 지켜봤다. 연지아의 말이 너무 직설이라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로 더는 참을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주이빈은 분이 치밀어 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연지아의 뺨을 때리려 했다.연지아는 책상 위 물컵을 집어 먼저 주이빈에게 확 끼얹었다.얼굴에 물을 뒤집어쓴 주이빈은 그대로 굳어 있다가 이내 비명을 질렀다.“연지아, 이 뻔뻔한... 이 더러운 뚱보!”“뭐가 이렇게 시끄러워요?”주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주이빈은 달려들려던 걸 멈췄고, 주민우는 기세 좋게 걸어와 주이빈의 젖은 몰골을 훑어봤다.“무슨 일이에요?”주이빈이 숨을 고르고 말했다.“제가 연지아 씨한테 일을 맡겼는데 안 하겠대요.”주민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에 불쾌함이 짙게 올라왔다. 그는 연지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여기서 왜 혼자 예외를 만들려고 하죠? 여기는 회사예요. 연지아 씨 집이 아니라고요.”연지아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뗐다. 그리고 탁 하고 책상 위로 던졌다. 그녀는 주민우를 노려보며 차갑

  • 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제8화

    송나겸은 서안성 쪽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줄로만 생각해서 굳이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송나겸이 큰 걸음으로 다가가 연지아를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서안성은 그를 막아섰다.“형, 신경 쓰지 마. 저 사람은 그럴 만해서 그런 거야.”송나겸은 결국 연지아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괜찮아요?”연지아는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에 선 남자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튕겨 나가 버린 도시락 쪽으로 걸어갔다.송나겸은 서안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산부인 거 안 보여? 여긴 유원이 회사야. 여기서 사고 나면 어떡하려고 그래?”서안성은 연지아의 둔중한 뒷모습을 보며 냉소했다.“멀쩡하잖아. 진짜로 문제 생기면... 애가 유산돼도 차라리 좋지.”그 말을 들은 연지아는 몸이 굳었다. 심장이 쿵 하고 조여 오듯 아팠다.서안성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성유원 역시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몰랐다.송나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오빠.”송나겸은 생각에서 돌아와 고개를 들었다. 안연청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베레모를 쓰고, 질 좋은 울 니트를 입은 채 주름치마를 매치했으며, 가느다란 다리에는 흰 부츠를 신었다. 청춘의 빛이 튀는 듯 당당하고 예뻤다.그 뒤에는 잘생긴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남자는 팔에 안연청의 겉옷을 걸쳐 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송나겸이 말했다.“그렇게 뛰어오면 어떡해. 넘어지면 어쩌려고.”안연청은 송나겸의 팔을 붙잡고 투정하듯 말했다.“나 애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넘어지지 않아.”서안성이 다가와 한마디 얹었다.“연청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우리 성 대표님이 회사 통째로 부숴서 다시 지을지도 모르겠네.”안연청은 얼굴이 붉어져 흥 하고 말했다.“무슨 말을 그렇게 해.”그때 성유원이 다가왔다.“가자. 밥부터 먹자.”서안성과 송나겸은 원래 여기서 성유원과 안연청을 기다리고 있었다

  • 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제7화

    연지아는 그날 밤 연씨 가문에 머물렀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깊고 편안하게 잠든 밤이었다.아침에 일어나니, 배난화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지아를 위해 닭곰탕도 따로 끓였고, 회사에 가져갈 영양 도시락도 담아두었다.연지아는 어젯밤 사직서를 내고 강현수 곁에서 한 달 동안 교수로 일하겠다고 말했다.처음에는 다들 반대했다. 몸부터 챙기며 태교에 집중하라고 했다.하지만 연지아는 끝까지 고집했다. 몸이 좀 무거워진 것 말고는 크게 불편한 데가 없었고, 간단한 일 정도는 무리 없었다. 무엇보다 환경을 바꿔서 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날 것 같았다.결국 연무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연지아는 부엌에 가서 돕고 싶었지만 배난화가 못 하게 했다.연지아도 더 고집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고, 임산부에게 맞는 필라테스 수업을 검색했다.마음에 드는 곳 하나를 골라두고 시간 잡아서 상담을 가볼 생각이었다.계속 화면을 넘기다가 연지아의 얼굴빛이 순간 굳었다.SNS에 올라온 글 하나가 보였다.누군가가 9장짜리 모임 사진을 올렸는데, 배경은 어느 고급 프라이빗 클럽이었다.글을 올린 사람은 서안성. 성유원 주변 사람 중 하나였다. 예전에 연지아가 성유원 비서로 있을 때 연락처를 추가했던 인물이었다.사진 제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모임의 밤. 또 염장 구경한 하루, 대체 언제 결혼식 올리냐.]사진 속에는 성유원과 안연청의 투 샷이 세 장이나 있었다.가운데 사진에서는 안연청이 볼을 가리고 부끄러운 듯 성유원 품에 기대 있었고, 잘생긴 남자는 큰 손으로 그녀 어깨를 감싸며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여자를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달콤한 기운이 화면 밖으로 넘칠 것만 같았다.성유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 눈에는 연지아가 어울릴 자격이 없었을 뿐이다.서안성이 이 글을 올린 건 어쩌면 일부러 연지아에게 보이게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연지아

  • 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제6화

    똑똑똑.“지아야, 다들 돌아왔어.”배난화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연지아는 별생각 없이 앨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자, 그녀는 환하게 불렀다.“아빠, 오빠.”배우진과 연무현이 연지아를 바라봤다.“지아야, 선물 가져왔어. 와서 보고 마음에 드는지 봐.”배우진이 손짓했다.연지아가 들뜬 얼굴로 다가갔다.“무슨 선물이에요?”배우진은 한가득 들고 온 봉투들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브랜드 로고가 찍힌 장신구 상자를 하나 꺼내 연지아에게 건넸다.“열어봐.”연지아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 열었다. 정교하게 만든 금팔찌였다.“고마워요, 오빠. 진짜 마음에 들어요.”“마음에 들면 됐어.”배우진은 손을 뻗어 연지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배우진은 배난화에게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금팔찌를 따로 사 왔고, 두 사람에게 각각 스킨케어 세트도 챙겨왔다. 연무현에게는 차와 술을 준비했고, 현지 특산품까지 잔뜩 들고 돌아왔다.집안 분위기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연지아는 집에 돌아와서야 숨이 놓였다.“지아야, 예정일이 언제야?”배우진이 걱정스레 물었다.그녀의 배는 누가 봐도 임신 말기처럼 커 보이긴 했다.연지아가 답했다.“예정일까지는 두 달 남았어요.”배난화가 웃으며 말했다.“지아 너, 이거 딸이다.”연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딸이에요.”“성별 확인했어?”연무현이 물었다.배난화도 뭔가 떠올랐는지 표정이 괜히 굳었다.“응. 그런데 할머니가 이 아이를 많이 챙기세요.”연무현은 그제야 한숨을 놓았다.“그럼 됐다. 아이만 있으면 나중에 너랑 유원이는 천천히라도 좋아질 거야.”연지아는 시선을 떨궜다. 마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순간 망설였다. 성유원은 이미 이혼 얘기를 꺼냈는데.그래도 이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그녀는 오션 빌리지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와 살기로 결정했다.‘일단은 저녁 먹고 나서 말하자.’배난화는 저녁상을 푸짐하게 차렸다.배우

  • 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제5화

    주이빈의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책상을 세게 치고 벌떡 일어섰다.“연지아 씨!”연지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자리로 돌아온 연지아는 작은 거울을 꺼냈다. 뺨 한쪽에 아주 가느다란 핏자국이 보였다. 자국은 깊지 않았다. 젖은 티슈로 한 번 슥 닦고 나니 더 손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런 얼굴에 흉터 하나 더 생긴다고 뭐가 달라지겠나.그러다 문득 그 소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어쩐지 낯익었다.퇴근이 가까워질 즈음.연지아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우진이 돌아왔으니 집에 와서 같이 밥 먹으라는 말이었다.연지아는 반가움에 목소리가 높아졌다.“우진 오빠가 돌아왔어요? 15일에 온다더니.”아버지가 말했다.“일 정리하고 일찍 들어왔어.”“알겠어요. 퇴근하자마자 갈게요.”연지아는 차를 몰아 연씨 가문으로 돌아갔다.연씨 가문은 서정구의 중간급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올해 새로 산 넓은 평수의 주택이었다.아버지는 중형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다. 대단한 재벌은 아니어도 살림은 넉넉해서 연지아는 어릴 때부터 비교적 풍족하게 자랐다.하지만 요즘 부동산 경기가 꺾이면서 반년쯤 전 회사가 투자에 실패해 재정 문제가 심각해졌다.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녀가 성유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고도 억지로 성씨 가문에 찾아가 따지고 요구하라고 몰아붙이지 않았다.연지아는 하루가 다르게 늙고 초췌해지는 아버지 얼굴을 보며 결국 집안 재산까지 정리해 빚을 갚아야 할 지경이 된 걸 보고 결심했다. 그래서 성씨 가문으로 갔다. 그때 그녀는 사실 속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그녀는 원하는 걸 얻었다. 성씨 가문이 건넨 큰 예물 덕에 연씨 가문의 빚은 정리됐다. 하지만 그만큼 값을 치렀다.그러니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도 결국은 자업자득이었다. 남 탓할 일이 아니었다.집에 들어서자 배난화가 부엌에서 나왔다.“지아야, 왔네.”연지아가 아홉 살이던 해, 어머니는 아버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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