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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엄이빈
강현수는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올려다보자 잠깐 멈칫했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다가, 연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

강현수는 티 나지 않게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왔네.”

연지아는 마스크를 벗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교수님, 오랜만이에요.”

강현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연지아가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제 모습이 이래서... 교수님 뵙기가 좀 민망했어요.”

강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돌아 나왔다.

“임신하면 몸이 달라지는 게 정상이야. 애 낳고 나면 괜찮아져. 앉아.”

연지아는 소파에 앉았다.

강현수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몸 좀 녹여.”

연지아가 받았다.

“감사합니다.”

강현수는 그녀의 불룩한 배를 한 번 훑어보고 물었다.

“몇 개월이야?”

연지아가 답했다.

“25주예요.”

강현수가 말했다.

“그럼 내년 1월 말에 개강이면 딱 예정일쯤이네.”

연지아가 간절하게 말했다.

“교수님,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입학을 미뤄도 될까요?”

아이를 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현수가 표정을 바로 했다.

“왜 가고 싶어?”

연지아는 시선을 떨궜다.

“아이 낳고 나면 남편이 저랑 이혼하자고 했어요. 이 악연도 더 이어가고 싶지 않고요. 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여섯 달이 길지 않은 시간이라 해도 그녀에게는 한평생처럼 느껴졌다.

강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때 햇살처럼 밝고 사랑스러웠던 애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완전히 달라진 걸 보면 그동안 몸과 마음이 얼마나 닳아버렸는지 뻔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거, 난 그게 기쁘다. 너랑 성유원은 원래 잘 맞는 사이가 아니었어. 앞으로는 너 진짜로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될 거야.”

연지아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처음에 강현수는 그녀가 성유원 곁에 비서로 가는 걸 반대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피투성이가 되도록 부딪혀버렸다.

연지아가 문득 물었다.

“교수님 눈에는 성유원이 어떤 사람이에요?”

강현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말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익이 먼저인 사람. 아마 사랑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렇군요.”

하지만 그가 그 소녀에게 보이던 다정함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마도 너무 사랑해야 고개를 숙이는 법이겠지.

그에게 어울리는 건 결국 예쁘고 빛나는 여자뿐이었다.

연지아는 더 묻지 않았다.

강현수가 말했다.

“네가 이미 결정했으면, 그때 내가 입학 연기 신청은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강현수는 신청서 한 장을 꺼내 연지아에게 작성하라고 했다.

연지아는 신청서를 다 썼다.

강현수가 불쑥 물었다.

“아이 낳으면 애는 성씨 가문에 두고?”

연지아는 난감하게 웃었다. 그녀가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아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성씨 가문에서 잘 키우겠죠.”

강현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마침 내가 조교 한 명이 필요해. 한 달만 하면 돼. 해볼래?”

연지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임신한 뒤, 성유원 쪽에서 그녀를 비서실에서 있으나 마나 한 자리로 옮겨버렸다. 대표 비서 자리에서 한순간에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됐고, 그녀가 쌓아온 노력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지금 그녀에겐 새 일이 필요했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고, 삶을 다시 굴려야 했다.

게다가 이후 연수 준비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어차피 오늘은 휴가를 내두었다.

연지아는 그대로 남아 조교 일을 시작했다. 원래 강현수의 학생이기도 했고, 성유원 곁에서 고강도로 일하던 시간도 있었으니, 몇 달 무너져 있었어도 손은 빠르게 돌아갔다. 업무를 잡는 것도 능숙했고, 처리도 막힘이 없었다.

그 순간, 연지아는 문득 예전의 자신을 되찾은 듯했다. ‘나’라는 사람이 제대로 존재하는 자리를 다시 만진 느낌이었다.

강현수 말처럼 그녀는 원래 일터에서 빛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성유원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는 그저 가끔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연지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날.

연지아는 미리 사직서를 준비해 두었다.

성유원은 해성 그룹 산하 금융 사업, 은행과 투자펀드 회사를 맡아 쥐고 있었다.

온통 이해관계가 얽혀 피 냄새가 배어 있는 명예와 돈의 판에서, 그는 오롯이 자기 힘으로 해성의 핵심 산업을 이어받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삼키고 넓혀갔다.

그게 가능하다는 건, 머리와 수완만이 아니라 차갑게 식은 심장까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연지아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차에서 내리는 성유원과 마주쳤다.

반듯한 체격, 말끔한 정장, 준수하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 돈과 지위가 얹힌 남자는 그 자체로 성숙한 매력을 풍겼다.

“성 대표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연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시선을 내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그녀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대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연지아는 사직서를 주이빈에게 건넸다.

주이빈은 성유원의 비서였다.

예전에는 그녀의 부하였다.

돌고 돌아, 지금은 연지아가 주이빈 밑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연지아가 갑자기 강등됐을 때, 부서 사람들은 다들 놀랐다. 연지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표 비서가 됐다.

그 자리는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외형 조건도 중요했다. 그런데 연지아는 얼굴도, 체형도 평범했는데도 뽑혔다. 그만큼 능력 하나로 외적인 조건을 덮을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늘 엄격하던 대표도 한때는 그녀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이빈은 속을 알고 있었다.

연지아는 백조를 탐내는 두꺼비 같은 사람이었다. 침대로 기어올라 출세하려는 부류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그래서였을까. 성유원은 그녀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주이빈은 사직서를 한 번 훑고, 그녀의 배로 시선을 옮겼다. 입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연지아 씨,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제일이에요. 거울이나 좀 더 보세요. 애가 생겼다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씨 가문이 어떤 데인지, 본인이 어떤 처지인지도 생각해 보셔야죠.”

연지아와 성유원이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다는 건, 회사 사람들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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