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연지아는 오래전부터 그 점이 궁금했지만 한 번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괜히 손재인에게 지난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손재인은 세면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안연청이 없었더라도 저희는 결국 끝까지 가지 못했을 것 같아요.”“왜요?”“그 사람 마음속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거든요. 아주 중요한 사람.”연지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에요?”손재인은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아마도요. 늘 그 사람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어요. 그 정도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잖아요. 다만 사진 속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까지 마음에 품고 사는 건지.”그 말을 들은 연지아는 문득 해성시에서 주웠던 송나겸의 회중시계를 떠올렸다. 안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났다.그렇게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면 분명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일 터였다.“안연청은 그 사실 알아요?”손재인이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 비밀이었어요. 저도 우연히 알게 된 거고요. 안연청은 아마 모를 거예요.”그러더니 비웃듯 웃었다.“만약 안연청이 알면 난리 나겠죠. 울고불고 난동을 부리면서요. 그 사람은 송나겸이 자기만 특별하게 아껴 준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가끔은 저도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싶어요. 무너지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을 정도로.”연지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도 혼자인 이유가 있나 보네요.”“그건 저도 모르겠어요.”손재인은 어깨를 으쓱했다.연지아도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그럼 선배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임성준준 씨랑 계속 만나 보실 거예요?”손재인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일단은 만나 봐야죠.”그녀가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하고 있다는 걸 연지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무슨 말을 더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제삼자의 시선
조경주는 그렇다 쳐도 성유원은 그보다 훨씬 심했다.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완전히 굴복해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은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말했지만 연지아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물러설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난 5년 동안 자신이 견뎌 온 고통은 대체 무엇이 된단 말인가.강현수는 연지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지아야, 왜 그래?”연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화제를 돌렸다.“강진연이 아연이를 데리고 해성시로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언제 내려가요?”강현수가 답했다.“오늘 이미 학교에 조퇴 신청을 해놨어. 내일 바로 내려갈 거야.”연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연이랑 조경주가 연락하는 시간도 좀 엄격하게 제한해야겠네요.”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연지아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식당 입구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성유원과 송나겸이었다.성유원은 들어서자마자 연지아를 발견했고 곧장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한편 송나겸 역시 손재인을 발견했다.성유원이 다가오는 순간 손재인은 무의식적으로 송나겸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송나겸은 손재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지만 손재인은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그 모습을 본 임성준은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요?”손재인은 감정을 정리한 뒤 태연하게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한데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네, 다녀오세요.”손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은 뒤 걸어갔다. 송나겸 옆을 지나칠 때도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 사이 성유원은 연지아 앞에 도착했고 강현수를 본 그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연지아는 방금 손재인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먼저 재인
연지아는 차 안에 앉아 손에 들린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서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점점 짙게 가라앉았다.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성유원, 당신이 정말 끝까지 지금처럼 연기할 수 있기를 바라.’연지아는 계약서를 가방 안에 넣어 두고 회사로 돌아갔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손재인이 그녀를 찾아왔고 함께 맞선 자리에 나가 달라는 부탁이었다.손재인은 이제 완전히 체념한 상태였다. 집안에서 정해 준 상대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돌이켜 보면 그동안의 고집도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 때로는 자신조차 무엇을 위해 버티고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그래서 이번에 집안에서 주선한 맞선 상대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상대는 해성시에 살고 있었기에 그동안은 온라인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서로 사진도 이미 본 상태였다.연지아 역시 상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송나겸 같은 최상급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남성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훈훈하고 괜찮은 조건의 남자였다.상대는 손재인에게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이미 여러 선물을 보내왔고 늘 세심하게 안부를 챙기며 관심을 표현했다. 손재인은 처음에는 거부감이 컸지만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었다.오늘은 그 남자가 경원시로 올라와 저녁 식사를 하며 정식으로 만나는 날이었다. 상대는 손재인보다 두 살 어렸고 현재 가업을 이어받는 중이었다.“내가 같이 가 줄게요. 셋이면 덜 어색할 거예요.”연지아의 말에 손재인이 웃으며 말했다.“뭐가 어색해요. 지아 씨는 가서 사람 보는 눈이나 좀 보태줘요.”그날 저녁, 연지아와 손재인은 약속한 식당으로 향했다.물론 두 사람 외에 강현수도 함께였다. 딸이 좀처럼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자 손재인의 부모는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고 결국 손재인의 아버지는 강현수에게 부탁해 손재인을 좀 설득해 달라고까지 한 상태였다.이번 맞선 역시 손재인의 아버지가 미리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한 일이었다. 혹시라도 손재인이 또 일을 망치지
연지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어둑한 조명 아래 남자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한 우물 같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속내를 읽어낼 수 없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연지아가 문득 물었다.“내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지금도 똑같은 말을 했을까?”성유원은 담담하게 답했다.“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의미 없는 가정을 하지 않아.”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손을 뻗어 연지아의 손을 잡았다. 연지아가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성유원은 손가락 사이를 벌려 그녀의 손과 깍지를 꼈고 연지아는 끝내 빠져나올 수 없었다.“중요한 건 지금이야.”성유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 난 그 대가를 치를 생각이 있고, 연지아 너도 마찬가지야. 나와 결혼했고, 시하를 낳았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연지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성유원, 당신은 늘 그렇게 오만하게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어.”성유원은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 깊고 짙었다.“어쨌든 우리와 시하는 한 가족이잖아. 그렇지 않아?”연지아는 시선을 돌렸다.“시하 말고는 우리 사이에 다시 아이가 생길 일은 없어.”성유원은 깊게 숨을 내쉬고 그녀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그래도 괜찮아. 시하는 충분히 똑똑하잖아. 우리가 잘 키우면 나중에 내 모든 걸 물려받을 수 있어.”최상위 재벌가에서 여성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일은 사실상 전례를 찾기 어려웠다. 성유원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연지아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더구나 성민우에게 이미 들은 적도 있었다. 성유원이 자신의 재산 절반을 성시하 앞으로 증여해 두었다는 사실을.그건 어느 재벌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연지아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유원이 다시 말했다.“원하는 조항이 더 있으면 추가해. 내일 바로 변호사를 불러 공증받도록 하지. 오늘은 그만
성유원은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연지아가 눈에 들어왔다.연지아는 샴페인색 잠옷 바지를 갖춰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고 촉촉한 눈매는 한층 맑아 보였으며 하얀 뺨에는 옅은 홍조까지 번져 있었다.연지아는 곧장 성시하의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성유원이 물었다.“언제 왔어?”“한 시간쯤 됐어.”성유원은 여자가 화장대 위에 놓인 에센셜 오일을 집어 피부 관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오일을 바른 뒤에는 크림을 바르고 다시 뷰티 마사지 기기로 얼굴선을 정리했다.연지아는 처음엔 무시하려 했지만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가 점점 거슬렸다.결국 손을 멈춘 그녀가 성유원을 바라봤다.남자의 시선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노골적이었다. 연지아가 쳐다보자 성유원은 입가를 올리며 물었다.“왜?”연지아가 비꼬듯 말했다.“그렇게 쳐다보는 거 보니까 나 좋아해?”성유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자리에서 일어나 연지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선 채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화장대를 짚었다.순식간에 연지아는 그의 품 안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성유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널 좋아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연지아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그래? 역시 남자들은 참 피상적인 생물이네.”성유원이 되물었다.“그럼 너는 왜 예전에 날 좋아했는데? 내 내면이라도 보고 반한 거야?”그 말에 연지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더니 손에 들고 있던 뷰티 기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성유원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땐 눈이 멀었었으니까.”연지아는 그의 팔을 밀어내고 소파로 걸어갔다.가방에서 오늘 가져온 적색광 뷰티 기기를 꺼내 얼굴에 착용한 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잠시 후, 옆자리가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곧 성유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시하는 널 닮았네.”연
송나겸이 말했다.“내가 보기엔 네 아내는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좋겠어.”성유원은 담담하게 답했다.“앞일이야 누가 알겠어.”원래는 오늘 점심에 얘기하기로 했던 일이었지만 결국 이제야 그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그날 연지아는 오션빌리지로 돌아왔으나 성유원은 집에 없었다.“시하는 자요?”연지아가 가사도우미에게 묻자 가사도우미가 답했다.“아직 안 잤어요. 사모님께서 시하랑 방에 계세요.”그 말을 듣고 연지아는 잠시 멈칫했다.이서연이 온 것이었다.연지아는 계단을 올라가 방문 앞에 서자 방 안에서는 성시하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함께 있어 성시하도 무척 즐거워 보였다.연지아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약 30분쯤 지났을까, 위층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연지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이서연은 연지아를 보는 순간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그녀는 연지아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치켜올렸고 상류층 사모님의 위세가 그대로 드러났다.연지아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바라봤다.먼저 입을 연 것은 이서연이었다.“5년 사이에 정말 많이도 발전했구나. 얼굴까지 뜯어고친 게 결국 오늘 다시 이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였던 거니?”연지아는 비웃듯 웃었다.“그래요.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사모님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네요.”이서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이제는 말대꾸도 제법 잘하는구나.”“칭찬 감사합니다.”“스스로를 꽤 대단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연지아. 앞으로 살아갈 날은 길어. 너무 우쭐대지는 마.”연지아는 태연하게 답했다.“충고 감사해요, 사모님.”말을 마친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더는 이서연과 말 섞을 생각조차 없었다.연지아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서연은 속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그때 성유원이 집으로 돌아왔다.“어머니, 언제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