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민주는 정말 십 분 만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차 키를 흔들었다.
“잘 차려입었네. 오늘은 네 남편 얘기, 욕할 때만 하는 거야. 알았지?”
그 말에 겨우 웃음이 났다. 집 안에서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이 아플 정도였다.
계단을 내려가던 민주가 화단 옆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누가 떨어뜨렸나?”
검은색 보석함이었다. 뚜껑에는 태준이 루비 목걸이를 낙찰받았던 경매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나는 무심코 상자를 열었다. 안쪽 벨벳 천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 한 쌍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태준이 집을 나서다 떨어뜨린 걸까. 누구에게 주려던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채린의 목에 걸려 있던 루비 목걸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내에게는 수표를 건네고, 그 여자에게는 직접 고른 보석을 선물하는 남자.
혹시 귀걸이 뒤에 편지라도 들어 있을까. 잠깐이나마 내 이름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 기대를 애써 밀어냈다. 확인하고 나서 또다시 실망하는 게 두려웠다.
민주가 상자를 받아 들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버려.”
“뭐?”
나는 보석함을 닫아 현관 옆 쓰레기통에 넣었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민주는 잠시 나를 바라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일단 가자. 여기 공기부터 벗어나야겠어.”
차는 한강변을 따라 달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도, 이 집도 아닌 곳.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이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주가 나를 데려간 곳은 청담동의 한 명품 매장이었다. 예전부터 함께 드나들던 곳으로, 늦은 시간에도 별도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예약해 둔 모양이었다.
직원이 내 이름을 확인한 뒤 안쪽 라운지로 안내했다. 은은한 가죽 향과 잔잔한 음악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진열대에 놓인 가방들을 바라보자 결혼 전의 일상이 떠올랐다. 가격표보다 색감과 소재를 먼저 살피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던 때였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민주가 탄산수 잔을 내 앞으로 밀었다.
“아무거나 사라는 말은 안 할게. 그냥 네가 좋아하던 것부터 천천히 봐.”
나는 가방의 잠금장치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손을 거뒀다.
“오늘은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
“네가 물건이 없어서 여기 온 건 아니잖아.”
민주가 내 옆에 앉았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서윤아. 너 원래 이런 데서 남 눈치 보던 애 아니잖아. 네 이름 걸고 만든 물건 얘기할 때는 밤새도록 떠들던 애가.”
나는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삼 년 동안 태준의 취향은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잠을 설친 날에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기분이 상했을 때는 어떤 말을 피해야 하는지까지. 그러는 동안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는 점점 잊어 갔다.
민주가 내 가방에 꽂힌 사원증을 힐끗 보았다.
“회사에서는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사람 눈치 보고. 그럼 네 인생은 언제 살 건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매일 출근하면서도 내 삶은 오래전부터 멈춰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기분이었다.
“아직도 네 아버지 얘기 안 했지?”
“말하려고 했어.”
“오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더러 바람을 피웠대.”
민주의 눈이 커졌다.
“누구랑?”
“아빠랑 식사하는 사진을 봤대. 아빠가 볼에 입 맞춰 주신 것까지.”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웃어넘기려 했지만 목이 먼저 메었다.
“사진만 보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적어도 나한테 물어는 봐야 하잖아.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그 인간은 네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거야.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으니까.”
민주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넌 돈 때문에 그 사람과 결혼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잖아. 그걸 증명하겠다고 계속 상처받을 필요도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이 내 배경을 알고 나서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 역시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몰라도 나를 존중해 주기를 바랐던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채린이 돌아왔어.”
“알아. 그래서 더 네가 걱정됐어.”
“오늘 태준이 그녀한테 목걸이를 선물했어. 나는 우리 결혼기념일 선물인 줄 알았는데.”
민주가 낮게 욕을 내뱉었다. 나는 눈물이 쏟아지기 전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하지만 화면에 뜬 프로필 사진만으로도 누가 보낸 메시지인지 알 수 있었다.
윤채린이었다.
[태준 오빠 아이를 임신했어요.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나는 화면을 끄지도 못한 채 엄지손가락만 움직였다. 이미 읽은 글자가 사라질 리 없는데도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문질렀다.
접수처 앞에서 파일 모서리를 한 번 더 맞췄다.어젯밤에도 도면을 펼쳐 놓고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래도 막상 내려고 하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를 넘기며 고친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이제 더 고치려고 가져온 게 아니었다.나는 안내받은 창구로 갔다.“공모전 작품 접수하러 왔습니다.”직원이 이름을 확인하고 파일을 받았다. 도면과 설명서를 펼치더니 다른 직원에게 보여 줬다. 내 손을 떠난 그림을 보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결과가 어떻든 제출까지는 해냈다.돌아서려는데 직원이 불렀다.“한서윤 님. 잠시만요.”“네?”“작품 확인이 좀 필요해서요.”그녀가 옆 직원과 다시 눈을 맞췄다.“어떤 확인이요?”“오늘 먼저 접수된 작품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나는 파일을 봤다.“유사하다고요?”“표절 여부를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쪽으로 와 주시겠어요?”표절.그 말에 손이 멈췄다.“제 작품이에요. 제가 직접 디자인했어요.”“우선 두 작품을 보시고 얘기해 주시죠.”직원을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접수작을 확인하던 심사 관계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 파일 옆에는 다른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가까이 가기도 전에 알아봤다.보석이 놓인 간격. 가운데에서 한쪽으로 조금 벗어난 선. 수없이 지우고 다시 그린 목걸이였다.내 그림이 두 장 있었다.그런데 한 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채린.나는 테이블을 짚었다.“이걸 윤채린 씨가 냈다고요?”“오늘 앞서 접수했습니다.”남자가 두 도면을 나란히 밀었다.“보시다시피 거의 같습니다. 같은 주제에서 나온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세부 구조까지 일치하고요.”나는 두 그림을 번갈아 봤다. 틀린 곳을 찾고 싶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달라야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없었다.“제가 만든 거예요.”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 사람 작품이 아니라 제 거라고요.”한 관계자가 서류를 확인했다.“윤채린 씨는 해외에서 디자인 활동을 한 이력이 있습
퇴근하고 돌아오면 작업대부터 폈다.저녁을 먹고 잠깐 앉는다는 게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연필을 내려놓으면 손가락 옆면이 까맸다. 종이를 돌려 보고 선을 지웠다가 다시 그렸다.천체의 아름다움.별 모양을 달고 작은 보석을 흩어 놓는 것만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별자리를 이루는 점과 선이 실제로 목에 걸 수 있는 구조가 됐으면 했다.보석 사이의 간격을 좁혀 봤다. 종이에서는 괜찮았는데 목선에 대고 크기를 가늠하니 답답했다. 연결 부분을 바꾸자 이번에는 가운데가 처졌다.나는 옆에 수정할 내용을 적었다.전체를 대칭으로 맞춘 그림도 지웠다. 반듯한 것보다 조금씩 간격이 다른 쪽이 좋았다. 빈 곳을 남기자 작은 보석들이 더 잘 보였다.목걸이를 한 사람이 움직일 때 중앙 보석과 주변의 작은 보석들이 차례로 빛나도록 각도도 살폈다.태준이 좋아할 만한지 생각하지 않았다. 채린이 보면 무슨 말을 할지도.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납득할 때까지 고쳤다. 피곤했지만 작업대를 정리할 때는 내일 다시 앉고 싶었다.도면이 잡히자 재료 견본을 주문했다. 제작 가능한 공방에도 연락했다. 화면 속 그림만 보내지 않고 크기와 연결 방식까지 설명하며 가능한지 물었다.그 사이 알린의 동업자도 만났다.오랜만에 마주 앉아 재고와 거래처 목록을 펼쳤다. 내가 손을 놓은 동안에도 브랜드는 돌아가고 있었다. 잘 나가는 제품도, 정리해야 할 재고도 있었다.“다시 하려는 거지?”그녀가 물었다.“응. 이번에는 제대로.”내가 비운 시간을 서운해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앞으로 내가 맡을 수 있는 일부터 물었다.나는 시간을 두고 역할을 나누자고 했다. 처음부터 다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싶지는 않았다.결혼 전에 쓰던 작은 작업실도 함께 확인했다. 계약은 유지되고 있었고, 지금은 보관용으로 쓰는 공간이 많았다. 비워 둔 책상 한쪽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손으로 닦다가 휴지를 찾아왔다. 책상부터 닦고 재고 상자를 옮기자 바닥이 드러났다.나는 줄자로 새 작
사원증을 찍자 출입문이 열렸다.나는 파일을 고쳐 쥐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월요일 아침이라 안은 붐볐다.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층수가 올라가는 것을 봤다.“서윤 씨, 주말 잘 보냈어요?”“네. 수진 씨는요?”평소처럼 대답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집을 나온 사람도 출근하면 이런 인사를 했다.내 자리에는 처리할 서류가 쌓여 있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대표실로 갔다.이 회사에서 우리 결혼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태준이 먼저 비밀로 하자고 했다. 불필요한 말이 나오면 일하기 힘들어진다고.그렇다고 숨겨진 아내로 사는 것까지 좋았던 건 아니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펜을 내려놓았다.“이혼 얘기 하러 왔어?”나는 책상 위에 파일을 펼쳤다.“퇴사하려고.”태준의 시선이 사직서에 멎었다.“회사까지 그만둘 필요는 없어.”“인수인계할 거 정리했어. 일정은 팀장님하고 얘기할게.”그는 서류를 집어 들지 않았다.“감정적으로 결정하지 마.”“생각하고 왔어.”“당장 수입 끊기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나는 그를 봤다. 내게 왜 나가고 싶은지 묻지도 않고 생활비부터 걱정했다. 내가 이 월급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아버지 얘기를 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돈이 많다는 걸 증명해야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내 생활은 내가 책임져. 당신한테 돈 달라고 할 일 없어.”“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그럼 사직서 받아.”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쪽으로 걸어와 책상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네 팀은 생각 안 해?”“인수인계한다고 했어.”“그걸로 끝날 문제는 아니지.”나는 파일에서 손을 뗐다.“무슨 뜻이야.”“이번에 조직 개편하는 거 알잖아. 네가 갑자기 나가면 팀 구성도 다시 봐야 해.”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인원 조정 안 할 이유도 없고.”나는 한동안 태준의 얼굴만 봤다.“내가 나가면 팀 사람들 자르겠
일요일 아침, 거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정확히는 텔레비전만 켜 놓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고 사람들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무슨 내용인지 들어오지 않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태준이었다.이름을 한참 보고 나서 받았다. 예전처럼 반갑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다고 할지 먼저 생각했다.“메모 봤어.”그가 말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태준은 모를 것이다.“어제는 미안해. 채린이가 유산하는 줄 알았대.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지금은?”“일단 안정됐어. 나도 그렇게까지 급한 일인 줄은…….”그가 말을 멈췄다.나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조용해지자 태준의 숨소리가 들렸다.“태준 씨.”“응.”“내가 어제 아빠한테 못 가서 이혼하자는 줄 알아?”“화난 건 알아. 내가 약속 못 지킨 것도.”“화난 게 전부가 아니야.”어제 하루를 설명하다 끝내면 안 됐다. 병원이 얼마나 급했는지, 왜 그 시간에 가야 했는지를 따지다 보면 또 내가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만 남을 것이다.나는 그 얘기를 하려고 전화를 받은 게 아니었다.“당신은 내가 기다릴 줄 알았지.”“그런 뜻 아니었어.”“늦어져도 집에 있을 줄 알았잖아. 사과하면 듣고, 다음에는 다르겠지 생각하고.”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동안 늘 그랬으니까.”창밖으로 마당이 보였다. 햇빛이 밝았다. 나는 어제 그 집을 나올 때부터 같은 생각만 하고 있는데, 밖은 평범한 일요일이었다.“당신이 일찍 들어오면 좋아했어. 같이 밥 한 끼 먹으면 고마워했고.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셔도 참으면 당신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어.”말을 할수록 목이 아팠다.“내 일을 미루는 것도 괜찮다고 했어. 내가 잘하면 언젠가는 당신도 나를 봐 줄 줄 알았으니까.”“서윤아.”“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어.”나는 무릎 위의 손을 꽉 쥐었다.“당신이 채린 씨 걱정하는 건 알겠어. 그 사람이 힘든 것도 알아. 그런데
아버지 서재에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한 잔에서는 아직 김이 났다. 나는 책상 앞의 빈 의자를 봤다. 태준이 앉았어야 할 자리였다.함께 오겠다고 한 건 나였다. 아버지가 그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해한 것도 나였다.결국 혼자 와서 그 의자 앞에 섰다.아버지가 펜을 내려놓으셨다.“귀한 사위는 바쁘시고?”차 안에서 참았던 말이 목에 걸렸다. 병원에 일이 생겼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면 됐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다.오늘은 하지 않았다.“졌어요.”아버지의 손이 멈췄다.“이혼할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로.”“내가 이겼다고 해 주면 되니?”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런 말 듣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에요.”“그럼 뭘 듣고 싶은데.”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잘 돌아왔다고 해 주셨으면 했을까.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누군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을까.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말씀드리러 왔어요. 끝내겠다고.”아버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그 앞에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던 날을 떠올렸다.배경을 알리지 않아도 태준이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만 걱정하지만, 그 사람은 다를 거라고.왜 그렇게까지 믿느냐는 질문에는 한 가지 기억부터 꺼냈다.오래전 겨울이었다.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리조트에 갔다. 함께 왔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거나 사람을 만났고,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돌아다녔다.그날도 리조트 뒤편 호숫가로 갔다.접근하지 말라는 팻말이 있었다. 가장자리만 잠깐 걸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쩡해 보이는 얼음 위에서 몇 걸음 더 나갔다.눈발이 굵어지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미끄러진 건 그때였다.발이 헛돌았다. 몸을 가누기도 전에 머리가 얼음에 부딪혔다. 귀 안에서 소리가 울렸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팔이 자꾸 꺾였다.일어나야 했다. 여기 누워 있으면 안 됐다.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눈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
토요일 아침, 나는 거울 앞에서 옷깃을 다시 폈다. 친정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현관에는 태준이 직접 골랐다는 차 선물도 놓여 있었다.아버지에게 메시지가 왔다.[귀한 사위 모시려면 찻잔부터 바꿔 놔야 하니?]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평소 쓰시던 걸로 해 주세요. 곧 출발해요.]오늘만 무사히 다녀오면 됐다. 지난 일들이 없어지지는 않아도, 태준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보고 다시 생각하고 싶었다.넥타이를 맨 태준이 방에서 나왔다.“준비 다 했어?”“응. 아빠 기다리셔.”그가 웃으며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란히 나서는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그때 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태준의 표정이 달라졌다. 허리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졌다.“채린 씨야?”“잠깐만.”그가 전화를 받으며 돌아섰다.“병원? 무슨 일인데.”나는 선물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태준은 창가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가까이 서 있던 사람이 통화 몇 마디 사이에 멀어졌다.“알았어.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태준이 나를 봤다.“채린이가 입원했대.”“다른 사람은 없어?”“지금 많이 불안한가 봐.”“그래서 당신이 가야 해?”그가 차 키를 찾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해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혼자 둘 수가 없어. 상황 보고 연락할게.”나는 그의 손을 봤다. 붙잡으면 잠깐은 멈출 것이다. 아버지가 기다리신다고, 오늘만큼은 나를 먼저 생각해 달라고 하면 미안한 얼굴도 할 것이다.그다음에는 결국 갈 것이다.나는 떠나는 사람을 붙잡아 몇 분을 더 얻고, 그 몇 분 때문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오늘은 당신이 먼저 약속했잖아.”“알아. 그런데 지금은 급하잖아.”“아버지께는 뭐라고 해?”태준이 숨을 내쉬었다.“아버님은 기다려 주실 수 있잖아. 채린이는 병원에 있어.”나는 입을 다물었다.기다릴 수 있으니까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내가 늘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