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돈 보고 결혼했다고요?”
되묻는 내 목소리조차 낯설게 들렸다. 태준은 대답 대신 내가 마시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입에 댔다가 천천히 내려놓는 동안, 나는 그가 말을 거두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건 사과가 아니었다.
“나한테 사랑하는 척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척한 적 없어요.”
“아직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네요.”
태준은 봉투 하나를 더 꺼내 식탁 위에 던졌다. 안에 들어 있던 사진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나는 발치에 뒤집혀 있던 사진 한 장을 주워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중년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내 모습이었다. 다른 사진에는 그 남자가 내 어깨를 감싸고 뺨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였다.
서림그룹 회장 한도현. 태준이 단 한 번도 장인으로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진 속 아버지의 옆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 오랜만에 딸을 만났다며 평소보다 환하게 웃으셨던 날이었다. 그날의 다정한 모습이 남편의 손에서는 불륜의 증거가 되어 있었다.
사진은 멀리서 찍은 듯 화질이 거칠었다. 유리창에 반사된 조명 때문에 아버지 얼굴의 절반은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매 끝을 한 번 접어 올리는 버릇도, 식사를 마친 뒤 늘 내게 건네던 손수건도.
태준은 그런 것들을 알 리 없었다. 그와 함께 앉아 아버지 이야기를 나눌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나는 세어 본 적조차 없었다.
“이 사진, 어디서 났어요?”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죠. 누가 무슨 의도로 보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사진 속에 당신이 있는 건 맞잖아요.”
태준은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저런 나이 많은 남자가 취향인 줄은 몰랐네요.”
뺨을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사진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분은 우리…….”
그때 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윤채린이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를 향하던 눈빛에서 날이 사라졌다. 그는 전화를 끊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지금 어디 가세요?”
“채린이한테요.”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변명은 나중에 들어도 되잖아요.”
나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에 쥔 사진이 구겨졌다.
“이분 이름은 한도현이에요. 당신도 들어 봤을 이름이잖아요. 적어도 누구인지 확인은 해 봐야죠.”
“할아버지가 맺어 준 결혼이라고 내가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어요?”
그의 시선은 사진에조차 머물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보다 이미 내려 버린 자신의 결론이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결혼 전, 아버지의 신분을 숨기겠다고 고집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런 배경 없이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감이 새삼 우스웠다.
그렇다고 이런 모욕까지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죠?”
“오늘은 그만하죠.”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사진을 던지고, 사람을 모욕하고, 이제는 그 여자한테 가겠다고요?”
태준은 내 옆을 지나가려 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소매를 붙잡지 않았다. 지난 삼 년 동안 몇 번이나 그랬던가. 붙잡을 때마다 돌아오는 건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직도 채린 씨를 사랑해요?”
그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
나는 숨을 죽였다. 아니라고만 해 준다면, 오늘 눈앞에서 본 장면조차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했을지 모른다.
“지금 그 애한테는 내가 필요해요.”
태준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자 집 안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식탁 위에 놓인 수표를 집어 봉투째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돌려주기 전까지는 다시 꺼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바닥에 흩어진 사진도 한 장씩 주워 모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마지막으로 봉투에 넣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던 아내가, 어느새 친정아버지와 바람을 피운 여자가 되어 있었다.
더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간 또 울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옷장을 열어 검은 원피스를 꺼냈다. 태준에게 예뻐 보이려고 고르던 옷이 아니었다. 적어도 거울 속의 나 자신에게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고 싶었다.
화장을 고쳐 앉은 뒤 휴대전화를 켰다. 정민주와의 대화창은 며칠 전 주고받은 평범한 안부 인사에서 멈춰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부탁을 보냈다.
[오늘은 남편 생각 좀 안 하고 싶어. 나 데리고 나가 줄래?]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도착했다.
[십 분만 기다려. 그 자식 때문에 혼자 있지 마.]
그제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접수처 앞에서 파일 모서리를 한 번 더 맞췄다.어젯밤에도 도면을 펼쳐 놓고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래도 막상 내려고 하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를 넘기며 고친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이제 더 고치려고 가져온 게 아니었다.나는 안내받은 창구로 갔다.“공모전 작품 접수하러 왔습니다.”직원이 이름을 확인하고 파일을 받았다. 도면과 설명서를 펼치더니 다른 직원에게 보여 줬다. 내 손을 떠난 그림을 보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결과가 어떻든 제출까지는 해냈다.돌아서려는데 직원이 불렀다.“한서윤 님. 잠시만요.”“네?”“작품 확인이 좀 필요해서요.”그녀가 옆 직원과 다시 눈을 맞췄다.“어떤 확인이요?”“오늘 먼저 접수된 작품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나는 파일을 봤다.“유사하다고요?”“표절 여부를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쪽으로 와 주시겠어요?”표절.그 말에 손이 멈췄다.“제 작품이에요. 제가 직접 디자인했어요.”“우선 두 작품을 보시고 얘기해 주시죠.”직원을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접수작을 확인하던 심사 관계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 파일 옆에는 다른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가까이 가기도 전에 알아봤다.보석이 놓인 간격. 가운데에서 한쪽으로 조금 벗어난 선. 수없이 지우고 다시 그린 목걸이였다.내 그림이 두 장 있었다.그런데 한 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채린.나는 테이블을 짚었다.“이걸 윤채린 씨가 냈다고요?”“오늘 앞서 접수했습니다.”남자가 두 도면을 나란히 밀었다.“보시다시피 거의 같습니다. 같은 주제에서 나온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세부 구조까지 일치하고요.”나는 두 그림을 번갈아 봤다. 틀린 곳을 찾고 싶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달라야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없었다.“제가 만든 거예요.”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 사람 작품이 아니라 제 거라고요.”한 관계자가 서류를 확인했다.“윤채린 씨는 해외에서 디자인 활동을 한 이력이 있습
퇴근하고 돌아오면 작업대부터 폈다.저녁을 먹고 잠깐 앉는다는 게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연필을 내려놓으면 손가락 옆면이 까맸다. 종이를 돌려 보고 선을 지웠다가 다시 그렸다.천체의 아름다움.별 모양을 달고 작은 보석을 흩어 놓는 것만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별자리를 이루는 점과 선이 실제로 목에 걸 수 있는 구조가 됐으면 했다.보석 사이의 간격을 좁혀 봤다. 종이에서는 괜찮았는데 목선에 대고 크기를 가늠하니 답답했다. 연결 부분을 바꾸자 이번에는 가운데가 처졌다.나는 옆에 수정할 내용을 적었다.전체를 대칭으로 맞춘 그림도 지웠다. 반듯한 것보다 조금씩 간격이 다른 쪽이 좋았다. 빈 곳을 남기자 작은 보석들이 더 잘 보였다.목걸이를 한 사람이 움직일 때 중앙 보석과 주변의 작은 보석들이 차례로 빛나도록 각도도 살폈다.태준이 좋아할 만한지 생각하지 않았다. 채린이 보면 무슨 말을 할지도.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납득할 때까지 고쳤다. 피곤했지만 작업대를 정리할 때는 내일 다시 앉고 싶었다.도면이 잡히자 재료 견본을 주문했다. 제작 가능한 공방에도 연락했다. 화면 속 그림만 보내지 않고 크기와 연결 방식까지 설명하며 가능한지 물었다.그 사이 알린의 동업자도 만났다.오랜만에 마주 앉아 재고와 거래처 목록을 펼쳤다. 내가 손을 놓은 동안에도 브랜드는 돌아가고 있었다. 잘 나가는 제품도, 정리해야 할 재고도 있었다.“다시 하려는 거지?”그녀가 물었다.“응. 이번에는 제대로.”내가 비운 시간을 서운해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앞으로 내가 맡을 수 있는 일부터 물었다.나는 시간을 두고 역할을 나누자고 했다. 처음부터 다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싶지는 않았다.결혼 전에 쓰던 작은 작업실도 함께 확인했다. 계약은 유지되고 있었고, 지금은 보관용으로 쓰는 공간이 많았다. 비워 둔 책상 한쪽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손으로 닦다가 휴지를 찾아왔다. 책상부터 닦고 재고 상자를 옮기자 바닥이 드러났다.나는 줄자로 새 작
사원증을 찍자 출입문이 열렸다.나는 파일을 고쳐 쥐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월요일 아침이라 안은 붐볐다.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층수가 올라가는 것을 봤다.“서윤 씨, 주말 잘 보냈어요?”“네. 수진 씨는요?”평소처럼 대답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집을 나온 사람도 출근하면 이런 인사를 했다.내 자리에는 처리할 서류가 쌓여 있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대표실로 갔다.이 회사에서 우리 결혼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태준이 먼저 비밀로 하자고 했다. 불필요한 말이 나오면 일하기 힘들어진다고.그렇다고 숨겨진 아내로 사는 것까지 좋았던 건 아니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펜을 내려놓았다.“이혼 얘기 하러 왔어?”나는 책상 위에 파일을 펼쳤다.“퇴사하려고.”태준의 시선이 사직서에 멎었다.“회사까지 그만둘 필요는 없어.”“인수인계할 거 정리했어. 일정은 팀장님하고 얘기할게.”그는 서류를 집어 들지 않았다.“감정적으로 결정하지 마.”“생각하고 왔어.”“당장 수입 끊기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나는 그를 봤다. 내게 왜 나가고 싶은지 묻지도 않고 생활비부터 걱정했다. 내가 이 월급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아버지 얘기를 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돈이 많다는 걸 증명해야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내 생활은 내가 책임져. 당신한테 돈 달라고 할 일 없어.”“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그럼 사직서 받아.”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쪽으로 걸어와 책상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네 팀은 생각 안 해?”“인수인계한다고 했어.”“그걸로 끝날 문제는 아니지.”나는 파일에서 손을 뗐다.“무슨 뜻이야.”“이번에 조직 개편하는 거 알잖아. 네가 갑자기 나가면 팀 구성도 다시 봐야 해.”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인원 조정 안 할 이유도 없고.”나는 한동안 태준의 얼굴만 봤다.“내가 나가면 팀 사람들 자르겠
일요일 아침, 거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정확히는 텔레비전만 켜 놓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고 사람들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무슨 내용인지 들어오지 않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태준이었다.이름을 한참 보고 나서 받았다. 예전처럼 반갑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다고 할지 먼저 생각했다.“메모 봤어.”그가 말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태준은 모를 것이다.“어제는 미안해. 채린이가 유산하는 줄 알았대.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지금은?”“일단 안정됐어. 나도 그렇게까지 급한 일인 줄은…….”그가 말을 멈췄다.나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조용해지자 태준의 숨소리가 들렸다.“태준 씨.”“응.”“내가 어제 아빠한테 못 가서 이혼하자는 줄 알아?”“화난 건 알아. 내가 약속 못 지킨 것도.”“화난 게 전부가 아니야.”어제 하루를 설명하다 끝내면 안 됐다. 병원이 얼마나 급했는지, 왜 그 시간에 가야 했는지를 따지다 보면 또 내가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만 남을 것이다.나는 그 얘기를 하려고 전화를 받은 게 아니었다.“당신은 내가 기다릴 줄 알았지.”“그런 뜻 아니었어.”“늦어져도 집에 있을 줄 알았잖아. 사과하면 듣고, 다음에는 다르겠지 생각하고.”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동안 늘 그랬으니까.”창밖으로 마당이 보였다. 햇빛이 밝았다. 나는 어제 그 집을 나올 때부터 같은 생각만 하고 있는데, 밖은 평범한 일요일이었다.“당신이 일찍 들어오면 좋아했어. 같이 밥 한 끼 먹으면 고마워했고.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셔도 참으면 당신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어.”말을 할수록 목이 아팠다.“내 일을 미루는 것도 괜찮다고 했어. 내가 잘하면 언젠가는 당신도 나를 봐 줄 줄 알았으니까.”“서윤아.”“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어.”나는 무릎 위의 손을 꽉 쥐었다.“당신이 채린 씨 걱정하는 건 알겠어. 그 사람이 힘든 것도 알아. 그런데
아버지 서재에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한 잔에서는 아직 김이 났다. 나는 책상 앞의 빈 의자를 봤다. 태준이 앉았어야 할 자리였다.함께 오겠다고 한 건 나였다. 아버지가 그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해한 것도 나였다.결국 혼자 와서 그 의자 앞에 섰다.아버지가 펜을 내려놓으셨다.“귀한 사위는 바쁘시고?”차 안에서 참았던 말이 목에 걸렸다. 병원에 일이 생겼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면 됐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다.오늘은 하지 않았다.“졌어요.”아버지의 손이 멈췄다.“이혼할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로.”“내가 이겼다고 해 주면 되니?”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런 말 듣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에요.”“그럼 뭘 듣고 싶은데.”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잘 돌아왔다고 해 주셨으면 했을까.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누군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을까.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말씀드리러 왔어요. 끝내겠다고.”아버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그 앞에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던 날을 떠올렸다.배경을 알리지 않아도 태준이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만 걱정하지만, 그 사람은 다를 거라고.왜 그렇게까지 믿느냐는 질문에는 한 가지 기억부터 꺼냈다.오래전 겨울이었다.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리조트에 갔다. 함께 왔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거나 사람을 만났고,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돌아다녔다.그날도 리조트 뒤편 호숫가로 갔다.접근하지 말라는 팻말이 있었다. 가장자리만 잠깐 걸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쩡해 보이는 얼음 위에서 몇 걸음 더 나갔다.눈발이 굵어지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미끄러진 건 그때였다.발이 헛돌았다. 몸을 가누기도 전에 머리가 얼음에 부딪혔다. 귀 안에서 소리가 울렸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팔이 자꾸 꺾였다.일어나야 했다. 여기 누워 있으면 안 됐다.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눈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
토요일 아침, 나는 거울 앞에서 옷깃을 다시 폈다. 친정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현관에는 태준이 직접 골랐다는 차 선물도 놓여 있었다.아버지에게 메시지가 왔다.[귀한 사위 모시려면 찻잔부터 바꿔 놔야 하니?]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평소 쓰시던 걸로 해 주세요. 곧 출발해요.]오늘만 무사히 다녀오면 됐다. 지난 일들이 없어지지는 않아도, 태준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보고 다시 생각하고 싶었다.넥타이를 맨 태준이 방에서 나왔다.“준비 다 했어?”“응. 아빠 기다리셔.”그가 웃으며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란히 나서는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그때 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태준의 표정이 달라졌다. 허리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졌다.“채린 씨야?”“잠깐만.”그가 전화를 받으며 돌아섰다.“병원? 무슨 일인데.”나는 선물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태준은 창가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가까이 서 있던 사람이 통화 몇 마디 사이에 멀어졌다.“알았어.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태준이 나를 봤다.“채린이가 입원했대.”“다른 사람은 없어?”“지금 많이 불안한가 봐.”“그래서 당신이 가야 해?”그가 차 키를 찾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해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혼자 둘 수가 없어. 상황 보고 연락할게.”나는 그의 손을 봤다. 붙잡으면 잠깐은 멈출 것이다. 아버지가 기다리신다고, 오늘만큼은 나를 먼저 생각해 달라고 하면 미안한 얼굴도 할 것이다.그다음에는 결국 갈 것이다.나는 떠나는 사람을 붙잡아 몇 분을 더 얻고, 그 몇 분 때문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오늘은 당신이 먼저 약속했잖아.”“알아. 그런데 지금은 급하잖아.”“아버지께는 뭐라고 해?”태준이 숨을 내쉬었다.“아버님은 기다려 주실 수 있잖아. 채린이는 병원에 있어.”나는 입을 다물었다.기다릴 수 있으니까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내가 늘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