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서하는 아직 이한이 은혁과 어떻게 지낼지 예상하지 못했다.솔직히 말하면, 은혁은 아이를 잘 다룰 타입은 아니었다.채팅을 마친 뒤, 은혁은 재도에게서 전화가 와서 몇 가지 상황을 확인했고, 아이와 함께 가기 괜찮은 놀이공원 하나를 정했다.전화를 끊은 뒤, 은혁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예전에는 은혁의 옷차림 대부분을 서하가 챙겨주곤 했다.하지만 어느새 3년이 흘렀고, 그의 옷장에는 3년 동안 안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한때 은혁이 서하를 위해 사 두었던 옷들도 그대로 걸려 있었지만, 3년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이미 유행이 지나 있었다.아직 언제쯤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은혁의 머릿속에 분명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서하 옷도 새로 챙겨줘야겠어.’내일은 놀이공원이고, 아이와 함께하는 일정이다.정장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다.‘검은색은 너무 딱딱해 보이려나.’‘아이를 무서워하게 만들까?’‘흰색... 전부 흰색 운동복?’‘뭔가 좀 어색한데.’‘...’한참을 고민한 끝에 은혁은 회색 계열의 편안한 옷을 골랐다.옷을 정리한 뒤, 은혁은 혼자 피식 웃었다.이런 사소한 일로 이렇게 고민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은혁은 늘 선택받는 쪽이었지, 애써 맞추는 쪽은 아니었다.하지만 서하는 달랐다.그녀는 은혁이 마음에 담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는 서하에게 뭐든 최선을 다하고 싶어졌다.이번에 서하가 한 발 물러난 것...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한 진전이었다.그날 밤, 은혁은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낮에 사 온 책들을 펼쳤다.그러다 연인 사이의 친밀함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은혁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서하가 떠올랐다.한번 생각이 시작되자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서하를 떠올릴 때마다 몸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결국 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물로 샤워해야 했다.그 뒤에도 한참을 뒤척인 끝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소진이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슨 오해야. 이런 건 있는 쪽으로 생각해야지. 없는 쪽으로 생각하면 안 돼. 괜히 속으면 안 된다고.]서하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절대 안 속아. 너희 둘 다 걱정하지 마.]소진이 물었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아정도 바로 거들었다.[언니, 배은혁한테 기회 줄 생각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조건만 보면 배은혁도 꽤 괜찮은데요.]서하는 키보드 위에 올려둔 손을 잠시 멈췄다.지금 그녀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건, 역시 아이 문제였다.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은혁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재결합을 원할 게 분명했다.하지만 서하는 아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왜곡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잠시 후, 서하는 다시 타이핑했다.[나 지금 많이 복잡해. 아이 얘기를 배은혁한테 할지 말지.]소진이 바로 답했다.[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돼.]아정도 덧붙였다.[맞아요.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서하가 다시 물었다.[너희는... 내가 말하는 거, 다 찬성이야?]두 사람의 답장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찬성.][당연히.]아정은 한 마디를 더 보탰다.[혹시 배은혁이 언니랑 아이 두고 다투자고 나오면요, 제가 언니 편에서 들어서 소송도 같이 갈게요. 우리 고모가 진짜 잘하는 대형 로펌 변호사 알아요!]소진도 말했다.[나도 아는 사람 있어. 정 안 되면, 그땐 내가 하선우한테 한 번 부탁해 보지 뭐.]소진의 메시지를 본 순간, 서하는 잠깐 멈칫했다.‘부탁’이라는 단어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아정이 곧바로 물었다.[소진 언니, 하 변호사님이랑 아직도 연락해요?]소진의 답장은 단호했다.[없어. 이미 헤어진 남자인데, 왜 연락해.]서하는 단체 채팅방의 대화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서하는 늘 생각했다.소진 같은 성격이면, 지나간 일은 훌훌 털어버릴 줄 알았다.그런데 선우에게만큼은 끝내 기회를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선우는
은혁은 고개를 숙여 서하를 내려다봤다.“그럼... 안 보내.”서하가 예전부터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었다.은혁은 늘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번만큼 은혁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서하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마다 은혁은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뭘 해야, 어디까지 다가가야... 이 사람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여자의 마음을 얻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은혁이 꽃을 ‘안 보내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서하의 심장이 작게 뛰었다.과거에 서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은혁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믿었던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컸던 건... 은혁이 단 한 번도 그녀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지금의 은혁은 달랐다.어렴풋이 넘겨짚지 않고, 혼자 결정하지 않고, 직접 묻고, 선택권을 서하에게 넘기고 있었다.그건 은혁이 서툴기 때문이기도 했다.여자의 마음을 짐작하는 법을 몰랐고, 그래서 그는 늘 질문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로맨틱하진 않았다.하지만 은혁에게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나 연애해 본 적 없어.”은혁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좌절이 묻어 있었다.“여자 마음 잘 모르고, 달콤한 말도 못 해.”“솔직히 말해서... 나 좀 많이 재미없지?”사실, 배은혁 같은 남자는 그런 걸 굳이 배울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그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여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그런데 그 말이 서하의 마음에 작은 물음표를 남겼다.‘배은혁이 연애를 안 해봤다고?’‘그럼 구예랑은 뭐였지?’소진도, 아정도 이미 서하에게 다 이야기해 준 상태였다.서하는 가볍게 웃었다.“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당신이 그런 거 못 하는 거, 나랑은 상관없어.”그 말만 남기고, 서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갔다.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서하는 은혁을 남자로 여기지 않았다.그러니 연애를 할 줄 알든 말든, 달콤한 말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
은혁이 아이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서하가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내내 피했다.서하는 은혁의 입에서 ‘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조금 놀랐다.은혁은 이안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정상적으로 생각하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서하는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아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은혁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잠깐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당신 아이잖아. 내 아이처럼 생각할 거야.”쉽지 않다는 건 은혁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노력할 생각이었다.무엇보다도... 그 아이는 서하의 아이였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은혁은 충분히 마음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궁금하긴 하지.”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근데 알고 싶지는 않아.”서하는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솔직히 말하면, 질투 날 것 같거든. 아이는 괜찮아. 근데... 당신이 그 아이 아버지랑 같이 있다면... 그럼 나한테 기회가 남아 있을까?”서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었다.사실 돌아오기 전, 소진이 한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귀국한 첫날, 서하와 이안이 재도를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소진은 말했다.언젠가는 은혁과 마주칠 수도 있는데, 차라리 남자 하나 만들어 두라고.형식적인 남자친구라도.그렇게 하면 은혁이 서하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더는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최소한의 도덕선은 지킬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서하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누구를 데려다 가짜 연인을 만들든, 그 자체가 불편했고, 무엇보다 오래 갈 수 있는 방법도 아니었다.서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자신은 이제 은혁과 다시 엮일 일이 없을 거라고.과거의 오해가 풀렸다 해도 지금의 서하에게는 아이가 있었다.그리고 은혁은 그 아이가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믿고 있었다.그런 상황
“예?”동료는 짧게 되물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덧붙였다.“우리 연구 과제 후원자야. 엄청 부자래.”그 말을 들은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서하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멀리서 은혁이 그 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런데 차 옆, 정확히는 운전석 창가에 한 여대생이 서서 은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서하는 그쪽으로 다가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여대생이 핸드폰을 꺼내는 걸 보니 생각이 들었다.‘연락처를 물어보는 건가?’서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이 각도에서는 은혁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여대생은 젊고 예뻤다.서하는 그 얼굴을 알아봤다.며칠 전, 행사에서 꽃을 들고나왔던 그 여대생이었다.그때 은혁이 꽃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난처해하다가 꽃을 서하에게 건넸던 기억이 났다.잠시 후, 여대생은 한 발짝 물러서서 차 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그 순간, 시야가 트이면서 은혁의 모습이 보였다.은혁은 운전석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고, 긴 손가락과 손목뼈가 도드라져 보였다.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고개를 들었고, 곧 서하와 눈이 마주쳤다.은혁은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려 서하 쪽으로 걸어왔다.“퇴근했어? 피곤하지 않아?”서하는 고개를 저었다.은혁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서하는 반사적으로 피했다.은혁은 서하를 한 번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서하가 차에 타자 은혁은 습관처럼 안전벨트를 당겨 주려 했다.“내가 할게.”두 사람의 손끝이 잠깐 스쳤다.은혁은 순간 멈칫했고, 곧바로 손을 거뒀다.은혁은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문을 열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 급하게 외쳤다.“잠깐만요!”은혁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아까 그 여대생이었다.여대생은 달려오더니, 은혁의 손에 빨간 사과 하나를 쥐여 주고 나서 그가 반응할 틈도 없
처음부터 서하는 은혁이 자신을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걸 당연히 반대했다.하지만 이 남자는 늘 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어느 날은... “가는 길이야.”어느 날은...“차가 거기 있어서.”또 어느 날은...“잠깐만 타자.”“...”이런 식으로 서하의 차를 자연스럽게 타고 집 앞에 도착하면 아무렇지 않게 차를 몰고 떠났다.그러면 다음 날 아침.“내가 차 가져왔어.”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나타났다.서하가 더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려 하면, 은혁은 그저 서하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나 말 잘 들었잖아.”“생활 패턴도 정상으로 돌려놨고.”“이 정도면... 나한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돼?”“...”그 눈빛에는 서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조심스럽고, 간절하고, 어딘가 억울해 보이기까지 한 순진무구한 표정.그렇게 바라보면 서하는 이상하게도 말을 잇지 못했다.나중에 혼자 생각해 보면, 자신이 ‘진짜 별수 없다’ 싶을 때가 많았다.은혁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서하는 그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서하는 문득 천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한 번쯤은 기회를 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솔직히 말하면, 서하는 아직도 확신이 없었다.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아이의 존재.그래서 은혁의 동행을 허락한 것도, 사실은 언젠가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이 문제는 이미 소진과도 충분히 이야기했다.아이에 대한 진실은 어차피 끝까지 숨길 수는 없을 거라는 결론이었다.소진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그냥 배은혁한테 말해. 애는 이미 태어났잖아. 지금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데, 네 감정 무시하고 양육권 달라고 하진 못할 거야. 만약 그러면, 그때야말로 제대로 한 번 정리하면 되지.”서하는 웃으며 되물었다.“뭘 그렇게까지 정리해.”소진은 한숨을 쉬었다.“네가 혼자 애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 다 갈아 넣었잖아.”서하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