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송하나는 설날 특집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졸음이 밀려든 뒤로는 자신이 언제 깊은 잠에 빠졌는지도 몰랐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오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통유리창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침실 가득 쏟아져 포근한 온기를 더했다.송하나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팔다리를 쭉 뻗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편안해졌다.분명 어젯밤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지금은 침실 침대 위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심성빈이 자신을 안아 옮겨 준 게 틀림없었다.간단히 씻고 몸단장을 마친 송하나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새해 세뱃돈을 꺼내 별장에 있는 가정부들과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세뱃돈을 받아 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쁜 얼굴로 공손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감사합니다, 송하나 씨.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길 바랍니다.”송하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들의 축복에 다정하게 답했다.세뱃돈을 모두 나눠 주고 나니 손에 유난히 두툼한 봉투 하나가 남았다. 심성빈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송하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고 별장 안을 둘러보았지만 심성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옆에서 정리 중이던 가정부를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성빈 씨는요? 왜 안 보여요?”가정부가 웃으며 대답했다.“하나 씨, 대표님은 오늘 아침 일찍 외출하셨어요.”‘뭐? 이렇게 빨리 외출했다고?’송하나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녀는 궁금해서 물었다.“어디 가셨는데요?”‘설마 새해 첫날부터 회사에 가서 일을 처리하는 건가?’가정부는 고개를 저으며 사실대로 답했다.“그건 모르겠어요. 대표님께서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어요.”더 이상 물을 수도 없어 송하나는 손바닥에 든 하얀색 봉투를 내려다보았다.‘정말 급한 일이 있나 보다. 돌아오면 줘야지.’막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정원 밖에서 나직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가정부가 바로 말을 이었다.“하나 씨, 대표님께서 돌아오셨나 봐요.”송하나는
“영상 틀어놓고 따라서 해봤어. 그렇게 어렵지는 않더라고. 그런데 처음 해본 거라 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이미 충분히 대단한걸요!”송하나는 눈을 빛내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그때 마침 비서실장도 주방으로 들어왔다.눈앞의 광경을 본 비서실장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뻔했다.‘내가 알고 있는 대표님이 맞나?’비서실장이 아는 심성빈은 항상 맞춤 정장을 입고 뛰어난 능력으로 거침없이 활약하는, 집안일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그런데 그런 심성빈이 지금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직접 재료를 손질하여 만두소를 만들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다정하면서도 소탈한 모습이라 비서실장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송하나가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심성빈이 평소의 날카로운 모습을 지우고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까지 한 걸까?심성빈이 자기 쪽을 바라보자 비서실장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코끝을 살짝 만지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심성빈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비서실장인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심성빈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마침 잘됐네. 와서 같이 만두 좀 빚자고.”얼마 지나지 않아 허지안도 주방으로 들어왔고, 네 사람은 함께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허지안과 비서실장까지 합류한 덕분인지 주방은 평소보다 한층 활기차졌다.게다가 다들 솜씨가 제각각이라 만두의 모양도 꽤 재미있었다.심성빈과 비서실장은 평소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만두가 전부 삐뚤빼뚤했다.어떤 것은 납작하고, 어떤 것은 옆구리가 터졌다.심성빈은 학습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금방 요령을 익히더니 금세 능숙하게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반대로 비서실장은 계속 실수를 연발하며 허지안에게 무자비하게 놀림당했다.당황한 비서실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댔다.결국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비서실장은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어차피 대표님도 처음 배우는 거잖아. 내가 조금 서툰 게
송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우리 내일 좀 일찍 가요!”다음 날 오전, 심성빈과 송하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차를 타고 별장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화인국 마트로 향했다.그곳은 현지에서 유일한 정통 화인국 마트로 다양한 물건이 구비되어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복주머니, 노리개, 병풍 등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진열대에는 화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식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견과류와 육포, 설 명절 선물 세트까지. 정겨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이국에서 느꼈던 생소함을 단숨에 씻어냈다.두 사람은 천천히 마트를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설맞이 물품을 골랐다.각종 간식과 선물 세트는 물론이고, 설 전날 저녁 식사에 필요한 식재료까지 넣으니 금세 카트 하나가 가득 찼다.계산을 하려던 순간, 송하나는 계산대 앞에 가지런히 진열된 정교한 세뱃돈 봉투를 발견했다. 깔끔한 바탕색에 금빛 무늬가 새겨진 봉투는 명절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송하나는 두 묶음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하나는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어릴 적 아빠와 엄마가 곁에 계셨을 때, 설을 앞둔 시점에 부모님은 늘 새 옷과 장난감을 한가득 사주셨다.그리고 가족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웃으며 오붓하게 설을 보냈었다.그러나 지금 송하나는 이국땅에 와 있었다. 곁에 심성빈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옛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다 문득 이곳에 홀로 남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허지안이 생각났다. 혼자라면 자신보다 훨씬 외롭지 않을까 싶었다.그 생각이 들자 송하나는 옆에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심성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성빈 씨, 성빈 씨랑 상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요.”심성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송하나를 바라보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얘기해.”“지안 씨 말이에요. 올해는 화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곁에 가족도 없어요. 섣달그믐 밤을 혼자 자취방에서 보낸다면 분명 많
송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최우진에게는 더더욱 그랬다.갚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그렇다고 갚자니 괜히 얽히게 될 것 같아 싫었다.그럴 바에는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나았다.깔끔하게 일을 처리한 송하나는 그제야 자리로 돌아가 다시 허지안과 식사를 함께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최우진과 일행의 식사도 끝났고, 그들은 웃고 떠들며 레스토랑을 나섰다.카운터로 걸어가던 최우진은 무의식적으로 창가 쪽 자리를 힐끗 바라봤다.그러고는 곧 시선을 거두고 카운터 직원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안녕하세요. 창가 쪽에 있는 두 여성분의 비용까지 같이 계산할게요.”직원은 재빨리 결제 내역을 확인한 뒤 정중하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창가 쪽 테이블의 손님들은 이미 미리 계산을 마치셨습니다.”“이미 계산했다고요?”최우진은 순간 흠칫했고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역시나 송하나는 자신의 행동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자신과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아 계산까지 미리 해두었다.송하나는 최우진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송하나와 절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오후.송하나와 허지안이 쇼핑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송하나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심성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송하나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휴대폰 너머에서 심성빈의 낮으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나야, 쇼핑 끝났어? 나도 하던 일이 다 끝났거든.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송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주었다.“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10분 안에 도착할게.”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스럽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심성빈은 차에서 내린 뒤 조수석 문을 열고 송하나가 차에 타는 것을 살뜰히 챙겼다.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성빈은 운전하면서 아
옆에 있던 허지안은 최우진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같은 학교에 선후배 사이인 데다 함께 조별 과제를 한 적도 있는 사이였으니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허지안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좋아요. 그러면 우리...”그 순간 송하나가 허지안의 손목을 잡았다.힘은 아주 약했지만, 그 손짓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허지안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서둘러 뒷말을 삼켰다.송하나는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최우진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정말 죄송해요. 제 남자 친구가 이따가 올 거라서요.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좀 곤란할 것 같아요.”그 말이 떨어지자 최우진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고,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조금 전 최우진은 송하나와 허지안 둘만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다가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을 계기로 송하나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송하나의 남자 친구가 이곳으로 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최우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송하나의 남자 친구는 경계심이 워낙 강해서 다른 남자가 송하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이 일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게 뻔했다.결국 최우진은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 그러면 좀 불편하겠네. 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 그럼 점심 맛있게 먹어.”짧은 말이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그때 옆에 있던 직원이 마침 다가와 말을 건넸다.“두 분,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송하나는 허지안의 손목을 잡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창가에 있는 빈자리로 향했다.자리에 앉은 뒤에야 허지안은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하나 씨, 하나 씨 남자 친구 정말 여기로 오는 거예요?”아까 이곳으로 오면서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송하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심성빈의 다정함과 배려를 받아들이는 것이 심성빈을 받아들이는 첫걸음이었다.그렇게 생각한 송하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블랙 카드를 살며시 집어 들면서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그럼 일단 챙길게요.”그 순간 심성빈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번졌고,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그래.”다음 날 오전, 송하나는 간단히 외출 준비를 한 뒤 약속 장소에 시간 맞춰 도착했다.멀리서 허지안이 길가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지안 씨!”송하나가 가까이 다가가자 허지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벌리고 송하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무척 반가운 목소리로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하나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요!”“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에요.”송하나는 허지안의 활기찬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눈이 휘어질 정도로 즐겁게 웃으며 허지안을 마주 안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천천히 쇼핑을 즐기는 한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허지안은 참지 못하고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나 진짜 우리 집 친척들 때문에 미치겠어요. 매년 연말만 되면 연애하라느니 결혼하라느니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몰라요. 올해는 더 심해요. 해외에 있는데도 직접 전화까지 해서 얼른 외국인 사위를 데리고 돌아오래요. 정말 어이가 없다니까요!”송하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뒤 허지안을 위로했다.“어른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요. 남의 결혼에 정말 관심이 많다니까요.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영화관 앞을 지나던 중 밖에 걸린 신작 영화 포스터를 본 허지안이 흥미를 보였다.“하나 씨, 요즘 새로 개봉한 이 영화 평이 엄청 좋던데, 마침 시간도 괜찮은데 같이 영화 한 편 볼래요?”“좋아요.”송하나는 흔쾌히 동의했다.두 사람은 매표소에 가서 줄을 섰고, 송하나가 한발 먼저 카드를 내밀며 영화 티켓을 계산했다.영화가 끝난 뒤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