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은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모 낭자에게 부탁한 옷이 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이전에 옷을 본 적이 있었는데 원래는 그믐날 궁전 연회 때 입을 생각이었다. 옷은 노을 색이었는데 아름다운 해당화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어 우아하고 고귀했다. 수빈은 화천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한 후, 구리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약간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피부는 희고 잔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자수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모 낭자의 솜씨가 참 좋구나, 내가 궁에서 만든 옷보다도 더 아름답다니.” 화천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글썽였다. “마마, 전 마마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안 됩니다. 마마께서 정말 목숨을 끊으신다면 모두들 죄를 범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여길 테고, 삼황자는 영원히 황형을 모해한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수빈은 오만하고 차갑게 웃었다. “누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했느냐? 빈비가 자살하는 건 가족을 멸할 죄다. 안 그래도 부모 곁에서 효도를 하지도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가문의 죄인이 될 수가 있겠어?” 그녀는 계속해서 자수를 만지며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난 죄가 없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공주와 황자를 보호할 것이다. 일단은 기다려보자, 송석석은 일처리가 빠르니까.” 수빈이 자살하지 않겠다고 하자 화천은 그제야 안심했다.수빈은 가위를 가져다가 실밥 하나를 잘라낸 다음 가위를 들고 외전으로 가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으며 물었다.“덕비 쪽은 어떤가? 듣자 하니 태의를 불렀다고 하던데.”“네. 소문에 의하면 이황자가 놀라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수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무리 철이 들었어도 아이인데, 밤낮으로 함께 있던 황형이 피범벅이 된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어찌 놀라지 않겠느냐?”그녀는 덕비를 의심했지만 이황자를
황후는 줄곧 덕비를 무시해 왔다. 그녀는 덕비가 가문도 좋지 않고 용모도 뛰어난 편이 아닌데 비위에 올라 이황자를 낳을 수 있었던 건 단지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덕비가 스스로 의지할 만한 인맥과 든든한 배후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그녀를 겸손하고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소심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계산적이진 않았으니 말이다. 예전에 덕비가 복소의를 보호했던 것도 복소의를 이용해 총애를 굳히고 후궁에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복소의는 덕비의 보살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가 항상 이황자를 이용해 황제의 사랑을 빼앗는다고 생각했다. 덕비가 항상 돌을 들어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을 해왔기에 황후는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러니 대황자에게 일이 생긴 지금, 그녀는 수빈을 의심할 뿐 덕비를 의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수빈의 친정 식구가 사여묵과 함께 일을 하고 이 씨 부인도 공방을 보살피고 있으니 송석석이 사리사욕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송석석이 수빈을 감쌀 수 있으니 물어볼 것이 있으면 자기 앞에서 물어보라고 했다. 송석석은 황후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챈 후, 자리에 앉아 란이에게 물었다. “복소의가 낙태된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으러 왔소만, 혹시 사정을 아오?” 황후는 송석석이 묻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수빈을 감싸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펄쩍 뛰었다. “복소의가 낙태된 일이 대황자가 모해를 당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 오래전의 일을 왜 묻는 것이냐? 수빈을 대신해서 변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송석석은 그녀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저는 수빈마마도 다른 사람도 감싸려는 것이 아닙니다. 궁중에 복소의의 낙태가 장춘궁, 그리고 수빈마마와 상관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누가 대황자와 장춘궁과 원한을 맺었는지 조사하려는 것이지요.”그러자 황후가 화가 나서 말했다. “물어볼 게 대체 뭐가 있느냐?! 수빈의 짓이
송석석은 복소의의 궁에도 갔었다. 복소의는 수빈이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응보가 올 테니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수빈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황후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송석석이 말을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복소의가 문득 물었다. “왕비님. 정말 대황자를 구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송석석은 그녀가 대황자를 위해 안타까워해서 묻는 말인 줄 알았지만 그녀의 눈 밑에 연민은 없었고 오히려 약간 흥분하는 것 같았다. 뭔가 복수를 해서 고소한 눈빛이었는데 그녀가 애써 감추려 했지만 감춰지지가 않았다. 송석석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송석석은 황후가 그녀 뱃속의 아이를 해쳤으니 그녀도 당연히 대황자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녀에게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계란궁에 가야 했지만 송석석은 먼저 사람들을 데리고 채릉궁에 가기로 했다. 그녀는 이황자가 놀란 데다 너무 슬퍼서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먼저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일단 덕비부터 만나보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 공개된 증거로 덕비에겐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복소의의 태아 든, 대황자의 사고 든,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후궁에서 두 번 떠돈 소문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수빈이 복소의의 아이를 모해했다는 소문이고 두 번째는 황후가 복소의의 아이를 모해했다는 소문이었다. 두 차례의 유언비어가 잇따라 퍼지면서 후궁들의 의견도 갈리기 시작했다.황후가 계란궁으로 가서 소란을 피운 것도 바로 두 번째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후궁이 모두 황후와 수빈의 사이가 틀어지고 원한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모든 일을 추측해 보면, 황후가 계란궁에서 소란을 피워 수빈이 미친 듯이 복수해서 대황자를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후궁엔 통치가 삼엄해서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 즉시 가라앉지만, 하필 그 두 번의 소문은 아무도 제때 개
덕비는 멍 해져서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그동안 후궁이 참 떠들썩했는데, 복소의가 아이를 잃은 게 수빈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황후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지요. 덕비마마께서 후궁을 다스린 지도 오래되었으니 그런 소문이 어디에서 났고, 누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렸는지 알겠지요?” 덕비는 송석석이 이런 옛일까지 물어볼 줄은 몰라서 얼굴에 스쳤던 슬픔이 순간 굳어지며 무의식적으로 청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안색을 가다듬고 말했다. “궁에서 가장 많은 것이 유언비어 아니겠습니까? 사실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왕비는 대황자를 모해한 범인부터 찾으십시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복소의의 낙태부터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대황자를 모해한 사건을 조사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것도 모두 조사해야 합니다. 마마와 수빈께서도 후궁을 다스린 지 오래되어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전 덕비마마께 직접 와서 물어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신형사로 보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송석석은 담담한 눈빛으로 청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의 떨리는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 미소를 지었다. “청이 상궁의 손이 참 아름답군요.” 그러자 청이는 순간 놀라서 얼굴이 다 창백해졌다. 그녀는 신형사가 어떤 곳이고, 고문을 얼마나 잔인하게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소문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귀를 거쳤으니 누가 먼저 소문을 퍼뜨렸는지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비와 청이는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덕비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소문은 그녀가 청이를 시켜 퍼뜨린 것이었다.비록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이 충성스럽다는 걸 알긴 했지만 신형사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덕비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비가 물었으니 나도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 소문은 내가 사람을 시켜 퍼뜨린 것입니
계란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계란궁은 아주 외진 곳에 있었는데 냉궁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었기에 찬바람이 쌩쌩 불어 마치 귀신과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을 정도였다.송석석은 태후 곁에 있는 고 공공을 데리고 가며 길가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모두 메말라 있었고 가끔 한두 가닥만 연한 푸른색을 띠었다.북방의 겨울은 조금의 푸르름도, 마치 이 냉궁 일대처럼 조금의 희망도 용납할 수 없었다.원래 각 궁에 갈 때 공 공공이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수빈의 궁에 올 때는 태후마마께서 고 공공도 따라가라고 분부했다.송석석은 태후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고 공공은 태후 곁에서 가장 오래 있었기 때문에 후궁의 계산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해도 대충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수빈은 송석석을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송석석과 고 공공이 들어올 때 급히 물었다.“두 분만 오셨습니까? 저는 왕비가 사람을 데리고 오셔서 계란궁을 봉인하려는 줄 알았습니다.”송석석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모 낭자가 만든 것임을 알아챘다. 옷의 색상과 복잡하고 정교한 자수가 그녀를 복숭아처럼 아름답게 했다.하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위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마주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조금도 위축하지 않았다.“수빈마마.”송석석이 먼저 인사를 올리자 고 공공도 뒤를 따랐다.“인사까지 하는 겁니까?”수빈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모두들 내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않나요? 난 왕비와 고 공공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네요. 일단 앉아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화천은 서둘러 의자를 준비하고 하녀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분부했다.그동안 수빈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차가 올라온 후 송석석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자 수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걸 그대로 마셨습니까? 내가 당신들을 해칠까 봐 두렵지도 않습니까?”송석석이 담담히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수빈마마, 나와 고 공공께서 명을 받들어 대황
고 공공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빈마마, 아무리 그래도 삼황자의 말을 듣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직접 그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그러자 수빈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말한 게 사실입니다.”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보았다.“나도 왕비가 황제폐하께 보고를 해서 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전에 왕비에게 잘 대해준 적이 없으니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왕비는 나와 삼황자가 한 것이라고 확신하겠지요. 왕비, 나는 당신이 내 아들을 다치게 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삼황자를 지킬 것입니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한 손으로 책상 위의 가위를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누고 빠르게 찔렀다.송석석은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때 위험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찌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송석석이 서둘러 달려갔을 때, 수빈은 이미 스스로 가위를 뽑아내 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마마!”화천이 슬피 울며 달려들었다.계란궁은 너무 외져서 송석석이 직접 달려가 태의를 불러온다 해도 수빈이 숨을 거둔 후일 것이었다.수빈은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거두었는데 눈 밑에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목의 피가 옷깃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서 그녀의 새 옷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송석석이 이런 변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고 공공이 슬퍼하고 있던 화천에게 물었다.“삼황자와 공주는 어디 있느냐?”그러자 화천이 대답했다.“마마께서 그들을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송석석은 그제야 수빈이 진작부터 죽을 각오를 했고, 삼황자와 공주를 가두어 이 장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는 곧이어 무의식적으로 고 공공을 바라보았는데, 고 공공은 차분하게 사람들에게 분부하고 있었. 그녀는 그제야 태후께서 왜 고 공공을 보냈는지 알았다. 수빈이 자살했지만 삼황자를 보호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의미가 달라졌
대황자는 놀랍게도 3일이나 버텨냈다. 이건 단신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그의 부상 상황에 따르면, 이틀도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는 결국 버텨내는 것에 성공했다. 계획했던 대로 그는 3일을 견뎌냈고, 그건 내장 출혈이 이미 멈췄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먼 길을 떠나는 게 좋지는 않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들은 떠날 수 밖에 없었다.지난 3일 동안, 태후와 숙청제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줄곧 대황자의 곁에 있었다.대황자는 깨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깨어나도 아파서 얼굴이 창백하여 아무 답도 할 수 없었지만 눈을 뜨고 황조모와 부황을 보니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의지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는 지난 3일 동안 깨어나자마자 고통을 느꼈고 침을 놓아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그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수십 번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매번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한 번만 더 버텨보라며 견뎌냈다.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사여묵과 송석석이 찾아왔다.그는 모든 사람들을 보며 허약하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고, 한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감히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그는 여전히 허약해서 곧 부서질 인형 같았고, 머리는 싸매어 있었고 얼굴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송석석은 차가운 그의 손을 잡고 촉촉해진 눈가로 말했다.“꼭 버텨야 한다. 나중에 우리가 꼭 보러 가마.”대황자는 열심히 눈을 뜨고 숙모를 바라보았다. 그는 숙모에게 미소를 지으며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뼈에 사무쳐 말을 할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숙청제가 눈물을 머금고 단신의에게 말했다.“정이는 단신의에게 맡기겠소. 단신의가 최선을 다해서 그를 구해줄 것이라 믿소. 이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부탁이 있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만족해 드리겠소.”그러자 숙청제가 이내 자세를 낮추었다. 이 순간 그는 단지 아들이
태후는 그의 말을 듣고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황자는 효자인데 황후는 알아주지 않았지.’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그들은 출발했다. 심청하와 왕이장은 단신의의 제자들과 함께 호송 되었다. 사여묵이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마차의 바퀴는 개조를 했고, 마차 안에도 여러 겹의 쿠션이 깔려 있었다. 단신의는 그의 몸을 고정시켜 온몸을 여러 겹으로 묶고 겹겹이 솜을 깔았다. 첫째는 추위를 견딜 수 있고, 둘째는 마차의 흔들림이 그녀의 몸에 미치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때문에 거리에는 이미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었다. 밖엔 눈이 흩날렸고, 길에도 흰 서리로 쌓였다. 마차는 흰 서리 위를 달리는 탓에 미세한 소리를 냈다. 숙청제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차의 행렬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그는 추웠지만, 아쉬운 마으메 조금 더 서 있다가 궁으로 돌아갔다.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가 떨어지자 사여묵은 그에게 털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황형, 날씨가 추우니 궁으로 돌아갑시다.” “태후마마는 어디 계시느냐?” 숙청제는 눈길을 거두고 물었다. 태후마마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 이런 이별을 견디기 힘들었다. “아직도 황형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여묵이 말했다. 숙청제는 초조한 눈빛으로 사여묵을 보며 물었다. “정이가 살 수 있을 것 같느냐?”사여묵도 알 수 없었다. 아마 반달은 지나야 신약산장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만약 마차에 지쳐 내장출혈이 온다면 아마 살 가능성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여묵은 황형도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위로해주었다.“반드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단신의가 있으니 꼭 나을 것입니다.”숙청제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궁으로 갈 때 그는 비로소 수빈의 죽음에 대해 물었다.송석석은 그들과 동석하지 않았지만, 사여묵도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의 전말을 모두 이야기했다.그러자 숙청제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수빈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