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호송차에서 끌려 나와 형장 한가운데로 끌려가 무릎을 꿇렸다. 이때 덩치 큰 사형수가 칼을 들고 그의 곁에 서 있었는데 칼이 빛을 반사하는 것을 본 고부진은 놀라서 몸이 나른 해져 무릎도 제대로 꿇지 못하고 구조를 청하는 눈빛으로 구경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형장은 시끌벅적했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신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북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고 당장이라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뒤에 있는 참수관인 사여묵을 보지 못하고 그의 소리만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의 뒤엔 팻말이 세로로 묶여 있어 고개를 돌릴 수 없고 사형수가 질색을 하는 표정으로 코를 틀어막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대소변을 실금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독사처럼 그의 몸속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 두려웠다. 이때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고, 그는 기쁜 나머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청영아, 청영아…!” 휘왕은 고청영과 함께 줄 밖에 서 있었고, 고청영은 검은 포도알 같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고청영은 부친의 공포와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이때 휘왕이 옆에 있는 구청영에게 말했다. “먹을 것 좀 갖다 주겠느냐?”그러자 고청영이 말했다.“이미 배불리 드셨을 것입니다.”휘왕이 말했다.“그래, 대리사에서는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 배불리 음식을 먹이긴 하지. 그런데 저 자에게 따로 할 말은 없느냐?”그러자 고청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내가 올라가도 됩니까?”“그래, 마지막으로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그러자 고청영이 말했다.“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가자, 내가 널 데리고 참수관을 만나러 가마. 참수관이 내 조카라 내 부탁이라면 들어줄 것이다. 그는 나에게서 노인네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나도 당신이 늙었다고만 했지,
송석석은 고청영이 정말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에 빠져버릴 수 있었지만 잘 살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고청영은 자신의 부친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싫을 뿐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물었다. “송 대인님, 참수를 한 후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 없으면 시신은 어디에 버려집니까? 아니면 그를 매달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겁니까?”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시신을 거둬주는 가족이 없다면 대충 묻어버릴 생각입니다. 그가 역모사건의 주모나 돼야 성문에 걸어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담담히 말한 후 다시 묻지 않고 휘왕 곁으로 돌아갔다. “집에 아직 먹지 않은 대추 떡이 남았으니 얼른 돌아갑시다. 오래 두면 맛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자 휘왕이 물었다. “정말 보지 않을 것이냐?” 고청영은 여전히 거절했다. “나는 피를 보는 게 두려우니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휘왕은 그녀를 총애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이만 가자. 내일 널 데리고 호수로 유람하러 가마.” 그녀는 망토를 두르고 말했다. “추운데 무슨 호수입니까? 집에서 난로를 두르고 차를 끓여 마시고 양고기를 구워 먹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나는 널 데리고 기분전환을 하려고 한 건데, 이 계집애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휘왕은 웃으며 사여묵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난 평생 여자에게 사로잡혀 살 운명인가 보구나. 늙어서도 다름이 없는 걸 보니.” 사여묵은 형장에서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즐거워하는 숙부를 보자 그의 흥을 깨지 않고 싶어졌다. “나도 이번 생은 여자에게 잡혀 살 운명인 것 같습다.” 그러자 휘왕이 사여묵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했다. “그래, 넌 어서 가서 참수하거라. 나는 청영과 함께 돌아가겠다.” 사여묵은 마지못해 말했다. “내가 참수하는 게 아니라 저 자가 참수하는 것입니다.” “알겠다.” 휘왕은 웃으며 청영을
고청란은 수육 가게를 차리지 않고 이수암으로 들어가 매입을 맡았다. 이수암은 대부분 몸이 허약한 사람들 뿐이라 장기간 채식만 할 수 없었기에 새로 집을 한 칸 짓고 이수암과 분리해서 그곳에서 육수를 끓여 그곳의 여자들에게 몸을 보양할 수 있게 했다.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은 그곳으로 찾아가면 되었다. 이수암의 주지스님에겐 규칙이 있었는데 이수암이나 따로 지은 집에서 모두 직접 살생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청란은 매일같이 산에서 내려가 고기를 사서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삼일 동안만 팔았을 뿐인데, 이곳의 여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마도 암자가 그녀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니 신앙심이 생겨 누구의 말도 필요 없이 스스로 고기 먹는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수암에 산나물들이 많아서 보양식인 약재를 따서 국을 끓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조잡한 물건이지만 관리들도 단삼과 인삼 같은 약재를 보내와서 여자들의 몸을 조리해 줄 수 있었다. 공주부의 사람들 중 처리할 사람은 다 처리한 상태였기에 이젠 방마마만 남았다. 태후는 특별히 지시를 내려 그녀에게 매일 사온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고만 할 뿐, 시중을 들게 하지는 않았다. 종인부의 문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거기로 반찬을 들여보낼 수 있었다. 방마마는 가끔씩 엎드리고 반찬을 들여다주며 장공주를 볼 수 있었고, 방마마에겐 그것도 큰 은혜였다.하지만 서지도 못하고 기어서 올 수밖에 없는 장공주를 보고 있자니 방마마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 마음속의 부귀 롭고 오만하며 옷이 조금 더러워지기만 해도 내다 버리던 공주가 지금은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 엎드려 먹고 싸니 말이다. 공주의 얼굴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아졌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검은 머리보다 더 많아 보였다. ‘공주도 이제 늙었구나…’ 공주부의 시위장이었던 도준은 남강으로 보내져 5년 동안
전북망은 부상이 완쾌되고 나서야 정식으로 부임하게 됐다. 그는 우선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뒤이어 숙청제는 그를 불러다가 한동안 훈계와 조언을 해주면서 그에 대한 충분한 신임을 표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격에 겨운 전북망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서방을 나섰다. 한편 궁 중에는 영시위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재 영시위부의 지휘를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송석석이었다. 그리하여 전북망은 이 틈을 타 대부분의 시간을 영시위부에서 보내고 있는 송석석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한때는 부부사이였지만, 이젠 전북망이 직접 한쪽 무릎을 꿇고 송석석을 맞이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경위 부사 필명, 순방영 오진, 금군 부 사령관 왕정 그리고 어전 시위 사령관 전북망은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 전북망은 내심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송석석이 자신을 괴롭힐 거라 예상한 것과 반대로, 뜻밖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한마디만 하였다. "그만 일어나게." 이내 전북망은 눈을 깔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송 대감님." 그러자 필명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전 대감의 부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술판이라도 열어서 축하 의식을 갖는 건 어떨까요?" 필명은 어찌 됐든 한때는 전북망의 상사였기에, 전북망은 시종 그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필 대감 시간이 날 때 한번 안배해 보지." "저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경위에도 또 다른 형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필명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그렇네." 전북망은 어색하게 웃더니 이내 송석석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저희 집에서 연회석을 차리지요. 여러분들을 초대하겠습니다." "좋소." 왕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전 대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가야 되지 않겠소? 그나저나 송 대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줄곧 송석석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갖고 있던 왕정은 일부러 이 틈을 타 송석석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고 했다.
필명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송 대감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소. 그 누구든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면 조금도 불복할 생각이 없소. 게다가 그녀는 무려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람이오. 그런데 자네가 그녀를 거역하려는 건, 곧 성지를 거역하려는 게 아니오? 어떻게 금군을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맡아오면서도 여전히 오기를 부리고 여자를 업신여길 수가 있소? 사내로 태어났으면, 만일 정말 그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제대로 승부를 보는 게 좋지 않겠소?" "이제 와서 보니 그동안 정말 나한테 화가 많이 났나 보오." "자네만 성질이 있는 게 아니란 걸 명심하시오." 이내 필명은 그를 뿌리치고 돌아서 버렸다. 결국 왕정은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영시위부 내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는 여전히 앉아있는 오진과 전북망을 발견하고는 의자에 털썩 앉아 두 사람에게 물었다. "자네들도 모두 저 여자한테 복종하고 있는 건가? 오진 자네는 오래전부터 복종하고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소. 저 여자의 말이라면 뭐든지 다 잘 따르더군... 그나저나 전북망 자네 또한 순순히 복종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두 사람은 헤어진 사이잖소. 그 여자는 다시는 자네를 원하지도 않을 텐데." 그러자 오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왕정, 자네는 그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내 성격이 원래 이렇게 강직하오. 어떤 상황이든지 솔직히 말하려는 걸 좋아하오. 빙빙 돌려서 말했다가는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말이오." "대체 누가 자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높여 평가하지 마오. 강직함은 무슨, 그저 입이 독할 뿐이지." 오진은 한마디 저격을 한 후 곧장 자리를 떠났다. 요 며칠 순방영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 탓에, 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결국 전북망과 왕정만 남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매부, 신경 쓰지 말게." 뒤이어 왕정이 먼
전북망은 갓 임관하여 매일처럼 늦게까지 일에 매진하였다. 가끔은 친히 각 처의 궁궐을 순찰하러 나서곤 했지만, 후궁은 제외하였다. 순찰하지 않을 때면 어서방 앞이나 영시위부로 돌아가 교대를 기다렸다가 그날의 일지를 받았다. 교대하는 자들은 반드시 순찰 결과를 기록해야 했으며, 이변이 있으면 기록하고 별다른 일이 없어도 무사하다고 남겨야 했다.그는 유시가 되어야 궁을 떠날 수 있었지만, 항상 유시 말미에 이르러서야 궁을 나섰다. 그날도 마침 궁을 나서다 연왕을 마주쳤던 것이다. 전북망은 연왕이 새벽에 입궐해 밤에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궁문이 닫히기 전에 나갈거라 생각했기에 오늘은 어찌 이리 일찍 출궁하는지 의아했다. 전북망은 다가가 절하며 인사했다."전북망, 황상을 뵈옵니다."연왕은 미소를 띠며 그를 보았다. "아직 장군이 된 것을 축하해주지 못했구나. 나는 늘 자네를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해 왔노라. 이제야 빛을 발하게 된 것 같아 기쁘구나. 자네가 앞으로 더욱 번창하길 바라겠노라."전북망은 뜻밖의 칭찬에 약간 놀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과찬이십니다."연왕은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전 장군, 시간이 되면 부인과 함께 연황실에 들르시게. 황후가 이 도성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걱정이 많네. 시간을 내어 함께 나가본다면 매우 기뻐할 것일세." 전북망이 대답하였다."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만, 아내가 몸에 아이를 품고 있어 외출하기엔 불편할 듯하옵니다.""그렇다면 연황실에 들러 차라도 한잔 나누며 이야기하세. 참으로 경사가 많군. 승진하신 데 이어 곧 아버지가 되실 소식이라니, 또다시 축하의 뜻을 전하네."전북망은 연왕이 온화하다고 느끼면서도, 어쩐지 지나치게 다정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간단히 감사만 표한 후 화제를 돌렸다."폐하께서는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출궁하셨습니까?"연왕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모친께서 일찍이 약을 드시고 잠드셨기에 나도 물
시험 당일, 송석석은 명을 내려 현갑군에 속한 수장들, 심지어 작은 호위장이라 할지라도 당직이 아닌 자들은 모두 출석하라고 명했다. 왕정은 처음에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생각하고, 집에서 아내에게 송석석을 두고 한참을 험담하다가 출발하였다. 그는 ‘여자가 참으로 속이 좁구나, 현갑군이 이처럼 속좁은 여인의 손에 맡겨졌으니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경위부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날이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닌, 모든 수장들을 위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시험이 직접 이부의 평가와 연결된다는 사실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오늘 시험에서 참패한다면 이부의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고, 그로 인해 녹봉 삭감이나 강등의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 한 번 더 향을 올려 조상님의 가호를 빌어야 했음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전북망 역시 그곳에 있었으나, 그는 이번 시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갓 부임한 터라 아직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북망은 남강 전장에서 송석석의 무공을 직접 본 적이 있어 왕정이 절대로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다만 왕정이 그녀의 손에서 몇 수나 버틸 수 있을지는 궁금할 따름이었다.이날 송석석은 관복 대신 청색 비단 옷을 입고 머리를 청옥관으로 틀어 묶어 관료의 위엄은 덜했지만 어딘가 유연한 학자의 풍모를 풍겼다. 그녀는 돌계단에 올라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오늘은 내가 직접 시험을 보겠소. 그대들은 모든 기량을 다해 대결하시오. 각 수장들은 오십 수를 넘기지 못하면 모두 특훈을 받을 것이고, 호위장들은 이십 수를 버티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특훈을 받을 것이오.”그녀의 목소리는 안정적으로 모든 이의 귀에 와닿았고, 현장에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얼굴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다. 웃음소리를 내는 자들은 송석석의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었고, 왕정과 전북망 같은 몇몇 부령들은 이십 수는 고사하고 오십 수를 버틴
그 후로 각자 차례대로 나서기 시작했고, 열두 명의 호위들은 모두 송석석의 손을 거쳐 스무 수를 채우지 못한 채, 대개 십오 수 남짓에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오진이 나서서 사십 수를 버텨냈지만 결국 패했다. 하지만 일어나며 공손히 절을 했는데 자신의 성과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왕정의 차례가 되었다. 왕정은 그동안 송석석의 수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녀의 기술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 있게 생각하기를, 오십 수를 버티는 데 문제없으리라 여겼다. 왕정은 다리 기술이 가장 뛰어났기에, 송석석의 다리 기술이 상대적으로 약함을 깨닫고 내심 기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하반신을 집중적으로 노린다면 승산이 있으리라 다짐하였다. 왕정은 몸을 약간 숙이고 주먹을 쥐며 가볍게 발을 굴리며 다리 근육을 풀고는 말하였다. “제 차례군요.” 그러자 송석석은 살짝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그래, 너의 차례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미소를 보자마자 왕정은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녀가 무언가 대단한 기술을 숨기고 자신을 상대로 펼칠 듯한 불안감이 드는 것이었다. “첫 수는 역시 내주도록 하마” 송석석이 말하였다. 그녀는 많은 이들과 싸운 후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여전히 기운이 넘쳐 보였다. 왕정은 그녀가 준비 태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며 첫 수를 허투루 내지르며 발로 찼다. 이 발차기는 본래 정통으로 차는 동작이었으나, 도중에 하단을 노리다 갑작스레 턱을 향하도록 변했다. 대개 상대는 복부나 가슴 부위를 방어할 터이지만, 송석석은 한눈에 이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양 팔꿈치를 앞으로 모아 강하게 충격을 가하여 왕정을 튕겨 내었다. 왕정은 다급히 물러나며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비로소 자세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송석석의 연속적인 발차기가 쏟아져 내린 뒤였다. 왕정은 허둥지둥 피하고 막기 위해 되려 불안하게 자세를 잡아 버렸다. 그에 반면 송석석은 안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