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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مؤلف: 정대천
이도현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짙고 깊은 눈동자는 먹구름에 잠긴 하늘처럼 흐릿하게 일렁여 그 안에 어떤 생각이 깃들어 있는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좋으냐?”

신수빈은 잠시 멈칫했다. 이도현이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옅게 웃으며 숨김없이 입을 열었다.

“출가하기 전에는 세상 물정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마련해 준 풍족한 울타리 안에서 자라며 그저 그 삶에 만족했지요. 그렇기에 조정의 관원들이 무엇을 맡고 어떤 일을 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했고 집안에서도 저를 정략에 쓰려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의 날개 아래에서 평온하고 무탈하게 살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한데 제가 만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꾸며 낸 사랑에 빠져 남자를 믿어서는 안 될 만큼 믿어 버렸지요. 그는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왕야께 바쳤습니다. 그날 이후, 제가 어릴 적부터 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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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7화

    만약 신수빈 곁에 서 있는 또 다른 부인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 그 자리에서 곧장 그녀를 끌어안아 버렸을 것이다.상대가 신수빈의 큰 형수인 정 씨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이도현은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던 마음을 눌렀다.“신첩, 왕야를 뵙습니다.”정 씨는 눈가가 붉어진 채 이도현에게 예를 올렸다.“예는 됐다.”이도현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신수빈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째서 정 씨가 이곳에 있는지 묻는 눈빛이었다.하지만 그 눈짓은 눈먼 사람에게 던진 추파나 다름없었다. 신수빈은 이도현 품에 안긴 아이를 보자마자 곧장 아이부터 받아 안았다.“아이고, 우리 아가. 또 이 어미가 보고 싶었느냐?”물기 어린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했다.이도현은 속으로 조용히 눈을 굴렸다.신수빈은 아이가 두툼하게 싸여 있는 걸 보고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문 앞에 아직 한 사람이 더 서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돌아보며 말했다.“왕야도 어서 들어오세요.”그래도 아직 본왕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모양이군.정 씨도 그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섭정왕이 날이 어두워진 뒤 일부러 아이까지 데리고 찾아온 것을 보니, 마음속으로는 이미 모든 사정을 짐작한 듯했다. 그녀는 눈치 있게 먼저 입을 열었다.“이야기는 내일 다시 나누자꾸나. 나는 다른 객방으로 가 보마. 오늘은 너와 연우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방해하지 않으마.”그 말을 남기고 정 씨가 몸을 돌리려 하자, 신수빈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형수님, 괜찮아요. 오늘 밤은 저랑 형수님이 같이 연우를 데리고 자면 되잖아요.”정 씨는 곁에 서 있는 섭정왕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그제야 신수빈도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이도현 곁으로 다가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왕야, 형수님께서 큰오라버니 일로 마음고생이 심하세요. 친정도 멀리 항주에 있어 장안에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고요. 그래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6화

    “제 일까지 그쪽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비단옷 차림의 공자는 이미 윤수혁의 이런 태도에 익숙한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지금은 이도현도 저 꼬마가 자기 자식인 줄 모르니까 저렇게 보물처럼 끼고 도는 거지. 그런데 만약 그 꼬마가 죽은 뒤에야 자기 친자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쯧쯧, 그때 표정이 얼마나 볼만하겠어.”윤수혁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비단옷 공자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듯 싸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놈은 내 부족 사람들과 부모,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지금 당장은 내가 그를 죽일 수 없으니, 우선 그 새끼라도 죽여 분풀이 좀 해야겠어. 나중에 그 아이가 자기 친자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하군.”그 말에 윤수혁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또 제멋대로 굴면, 당장 당신을 장안 밖으로 내쫓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하지만 비단옷 공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웃듯 말했다.“그 꼬마만 없어지면, 그것도 이도현 손안에서 죽은 거라면, 네 그 사랑스러운 제수씨께서도 아마 그를 뼛속까지 증오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아이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상, 넌 신수빈이 왕부로 시집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어. 이번 생에는 너와 아무 인연도 없게 되는 거지.”윤수혁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그를 노려보았다.“평소엔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고 넘어갔지만, 이번 일만큼은 감히 멋대로 굴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선을 넘으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비단옷 공자는 코웃음을 치며 잔 속 술을 단숨에 비워 냈다.“어디 끝까지 그렇게 태연한 척해 보시지.”*이도현이 호국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문 뒤였다.호국사는 황실 사찰인 데다, 모두 속세와 거리를 둔 승려들이 머무는 곳이었다.그때 눈치 빠른 어린 사미승 하나가 직접 나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5화

    이번이 그 꼬마 녀석의 첫 마차 나들이는 아니었다.전에도 이도현이 자신의 큰 외투 안에 꽁꽁 싸 안고 다녔지만, 이제는 날이 제법 풀린 터라 두툼한 작은 이불에 감싸인 채, 신수빈이 손수 만들어 준 호랑이 머리 모양 모자를 썼다. 게다가 유모가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솜수건으로 아이의 입과 코까지 단단히 가려 두었다.이도현은 아이를 안은 채 마차 휘장을 걷어 올렸다. 아직 해가 좋을 때 장안 거리 풍경을 보여 주려는 생각이었다.이 꼬마 녀석은 하루 종일 후원 안에서만 지냈다. 눈을 뜨면 보이는 사람이라곤 유모와 청하, 그리고 어멈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밤마다 유독 이도현 곁에서 자는 걸 좋아했다.아이는 지금 장안 거리의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상인들의 고함 소리를 들어도 까르르 웃었고,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지나가는 모습을 봐도 웃었다.그러다 길가의 아이 몇 명이 엿과자를 나눠 먹는 모습을 보자, 조그만 혀를 살짝 내밀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몹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신수빈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마차를 세워라. 엿과자 하나 사 오너라.”장풍은 금세 엿과자를 사 왔다. 왕야가 창문 너머로 그것을 받아 드는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쯤 되면 친자식이랑 다를 게 대체 뭐란 말인가.마차 안에 앉아 있던 유모는 왕야가 엿과자를 아이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왕야, 도련님께서는 아직 이런 걸 드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이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전부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맛만 보게 하려는 것뿐인데 못 할 게 뭐 있단 말인가.이도현은 작은 녀석이 입을 벌리고 엿과자 겉에 입혀진 엿을 열심히 빨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계속 쪽쪽 빨아댔다.한참 그렇게 빨다 보니 단맛이 옅어졌는지, 아이는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4화

    이도현이 예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일단 맡아 보거라. 본왕이 몇 사람을 붙여 너를 보좌하게 하면 된다. 지금 조정에서는 이 주고관 자리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머리가 깨질 지경이니 말이다.”그러나 예왕은 여전히 침묵한 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이도현이 묻자, 예왕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왕숙, 제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감히 할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저는 형님들이나 아우들처럼 처가나 외가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살아왔기에,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고관이 된다면, 앞으로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겁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왜곡된다면, 저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게 되겠지요.”그는 다시 깊이 예를 올렸다.“제가 어리석긴 하나, 나무가 숲에서 홀로 높이 자라면 반드시 먼저 바람을 맞는다는 도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청운서원이 세가들에게 온갖 말에 오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이익을 건드리게 되면, 반드시 표적이 될 것입니다.”이도현은 눈앞의 신중한 예왕을 바라보며,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아차렸다.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훗날 조정 신료들의 의심과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이도현만큼은 자신을 믿어 달라는 것.이도현은 손을 뻗어 예왕을 일으켜 세우며 담담히 말했다.“진심으로 사직을 위한다면, 네가 기댈 곳은 바로 이 사직이다.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예왕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이도현은 쉽게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켰다. 그가 이렇게 말해 준 이상, 자신이 한결같이 백성과 조정을 위해 일하는 한, 그는 절대 남의 참언에 휘둘리지 않을 터였다.“그렇다면 왕숙께서 맡겨 주신 중책에 감사드리겠습니다.”이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3화

    사람들이 자세히 알아보니, 그 서원은 신 가에서 세운 곳이고, 청운서원의 현판마저 섭정왕이 직접 써 내린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래는 권세를 앞세워 한 번 눌러 보려던 세가들조차 그때부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신 가는 본래 상인 집안이었다. 처음에는 섭정왕을 도와 남방의 혼란을 평정했고, 이후 셋째 도련님 신도연은 강회 일대의 하도와 관료 사회를 정비했다. 넷째 도련님 신태안은 포위전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활약하며 돌파전 속에서 눈부신 공을 세웠다.게다가 신 가의 여식인 신수빈은 성이 포위되었을 당시, 여자의 몸으로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섰고, 그 공으로 결국 호국부인에 봉해졌다.그러니 지금 조정에서는 감히 누구도 대놓고 신 가를 건드리지 못했다.물론 마음속으로는, 이제 막 생겨난 서원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기세를 이루겠느냐며 비웃고 있었다. 결국 신 가가 명성을 얻기 위해 꾸민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겉으로 억누를 수 없다면 뒤에서 은근히 짓누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게다가 신수빈은 애초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서원을 세운다는 건 곧 세가 문벌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도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이었다.다만 그녀는 이도현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청운서원이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 세가 문벌의 손에 싹도 틔우기 전에 짓밟히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올해 춘시는 예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삼 년에 한 번 열리는 춘시이자, 남북 통일 이후 처음으로 열린 특별 은과였다. 그러니 주고관을 정하는 일 역시 어느 때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매번 주고관과 해당 기수 급제자들 사이에는 관직 생활 내내 이어질 사제의 연이 생기고, 함께 급제한 유생들끼리는 동년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사실을.결국 주고관을 정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조정 안의 인맥을 쌓아 주는 일이기도 했다.각 세력이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2화

    그녀는 궁 안에 갇혀 지낸 지 오래되어, 바깥 사정은 거의 알지 못했다.신수빈이 무사히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는 왕부에 들어가 섭정왕의 장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머지않아 신수빈 역시 왕부로 시집가게 될 터였다.장안성을 지켜 낸 그 전투 이후, 누구도 섭정왕의 마음속에서 신수빈의 자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신수빈이 왕부에 들어가고 나면, 이름만 남은 측비에 불과한 자신을, 그것도 친여동생인 자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 사람이 말했듯,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신수빈은 호국사로 향하기 전, 먼저 입궁해 봉작을 받아야 했다. 하늘의 이름으로 나라의 복을 비는 의식이었다.금관을 쓰고 현조복을 입은 채 단봉문을 나서자, 조정 대신들이 예를 올리며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원래도 눈부실 만큼 화려한 미인이었지만, 더욱 기품과 위엄까지 더해져 온몸에 봉황 같은 위의가 감돌았다. 찬란한 광채가 사람의 시선을 압도해, 감히 오래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이도현은 긴 계단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그녀가 한 걸음씩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이번 길을 다녀오고 나면, 그녀는 백성과 대신들의 마음속에 절대적인 자리를 얻게 될 터였다. 천자를 대신해 나라의 복을 비는 존재가 되는 이상, 더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침내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질 것이고, 다시는 그녀가 재가한 여자라는 이유로 입에 올리는 자도 없게 될 터였다.이도현은 저도 모르게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봉관을 쓰고 혼례복을 입은 신수빈이 천천히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습.그와 나란히 서서 천하의 풍운이 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다시 강산의 아름다움을 함께 바라보는 모습.그녀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고한 영광 속에서 모든 이의 우러름을 받으며, 더는 누구에게도 억지로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삶을.그렇다면 자신은 그녀에게 가장 높은 영광을 안겨 줄 것이었다.그리고 기꺼이 그녀 앞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25화

    신수빈은 이도현이 지금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만 이 사람은 성정이 높고 자존심이 강하긴 해도 달래기 어려운 유형은 아니었다. 잠시 후에만 잘 달래 주면 풀릴 성미였다.그가 아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상, 음험한 수단까지 쓰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을 쥔 사내가 설령 나쁘다고 해도 대놓고 수완을 드러내는 법은 없으니까. 그 점만큼은 신수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이도현은 내내 얼굴을 굳힌 채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작은 행동들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신수빈은 그가 속으로 자신을 분명히 못마땅해하고 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36화

    이도현이 더는 윤서원 저택으로 드나들지 않도록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설령 그녀를 찾고자 하더라도 가급적이면 밖에서 만나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들킬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다 방법이 있다.”신수빈은 그렇게 말하며 청하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 개자식은 귀가 유난히 밝았기에 혹시라도 들었다가는 또다시 기를 살려주기 위해 애를 먹어야 할 터였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도현은 그녀가 나오자 책에서 시선을 떼고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올렸다.“지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28화

    잠시 후, 서가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다.”소리를 따라가자 이도현은 한 줄로 늘어선 서가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볼 때는, 늘 오만했던 얼굴에 희미한 부드러움이 덧입혀져 있었다.“이곳은 역대 왕조의 사관들이 기록한 문헌과 사료다. 민간 학자들이 모은 전기들도 있고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고본도 적지 않다. 와서 보거라.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본왕이 사람을 시켜 보내 주겠다.”신수빈은 잠시 멈칫했다.“왕야께서 저를 데리고 오신 이유가 책을 고르기 위함이었습니까?”“그럼 무엇이겠느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37화

    이도현은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더니 가볍게 웃으며 읊조렸다.“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걷고 있는데, 얼굴이 무궁화처럼 곱도다. 훨훨 날 듯 걷는 자태에 옥패 소리가 고요히 울리네. 아름다운 맹강이여 그 고운 수빈이 잊히지 않도다. 네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냐.”신수빈은 줄곧 그를 무인이라고 여겼다. 글 몇 편쯤 읽었을지는 몰라도 문인들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진 시경의 구절까지 줄줄이 읊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그를 얕잡아보았다는 걸 깨달았다.“맞아요. 저와 오라버니의 이름은 모두 조부께서 지어주셨습니다.”“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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