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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작가: 정대천
신수빈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런데 곧 닥칠 것이라 여겼던 통증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벽 모퉁이에 기대어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허리를 굽혀 작은 공간 하나를 떠받치고 선 이도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이도현은 고개를 숙여 창백한 얼굴로 움츠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에 맞은 줄로 여긴 것이다.

“어디 다쳤느냐?”

신수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젓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사방에는 흩어진 책들이 널려 있었고 그의 등 뒤에는 무너진 서가가 그대로 얹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단정히 묶였던 그의 머리칼을 고정하던 잠이 비뚤어져 있었다. 그제야 이 서가가 얼마나 세게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왕야, 괜찮으세요?”

“문제없다.”

그는 그녀를 안전한 자리로 옮긴 후, 한쪽 팔로 무거운 서가를 밀어 올리듯 힘껏 밀어냈다.

신수빈은 그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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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5화

    이번이 그 꼬마 녀석의 첫 마차 나들이는 아니었다.전에도 이도현이 자신의 큰 외투 안에 꽁꽁 싸 안고 다녔지만, 이제는 날이 제법 풀린 터라 두툼한 작은 이불에 감싸인 채, 신수빈이 손수 만들어 준 호랑이 머리 모양 모자를 썼다. 게다가 유모가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솜수건으로 아이의 입과 코까지 단단히 가려 두었다.이도현은 아이를 안은 채 마차 휘장을 걷어 올렸다. 아직 해가 좋을 때 장안 거리 풍경을 보여 주려는 생각이었다.이 꼬마 녀석은 하루 종일 후원 안에서만 지냈다. 눈을 뜨면 보이는 사람이라곤 유모와 청하, 그리고 어멈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밤마다 유독 이도현 곁에서 자는 걸 좋아했다.아이는 지금 장안 거리의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상인들의 고함 소리를 들어도 까르르 웃었고,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지나가는 모습을 봐도 웃었다.그러다 길가의 아이 몇 명이 엿과자를 나눠 먹는 모습을 보자, 조그만 혀를 살짝 내밀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몹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신수빈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마차를 세워라. 엿과자 하나 사 오너라.”장풍은 금세 엿과자를 사 왔다. 왕야가 창문 너머로 그것을 받아 드는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쯤 되면 친자식이랑 다를 게 대체 뭐란 말인가.마차 안에 앉아 있던 유모는 왕야가 엿과자를 아이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왕야, 도련님께서는 아직 이런 걸 드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이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전부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맛만 보게 하려는 것뿐인데 못 할 게 뭐 있단 말인가.이도현은 작은 녀석이 입을 벌리고 엿과자 겉에 입혀진 엿을 열심히 빨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계속 쪽쪽 빨아댔다.한참 그렇게 빨다 보니 단맛이 옅어졌는지, 아이는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4화

    이도현이 예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일단 맡아 보거라. 본왕이 몇 사람을 붙여 너를 보좌하게 하면 된다. 지금 조정에서는 이 주고관 자리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머리가 깨질 지경이니 말이다.”그러나 예왕은 여전히 침묵한 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이도현이 묻자, 예왕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왕숙, 제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감히 할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저는 형님들이나 아우들처럼 처가나 외가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살아왔기에,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고관이 된다면, 앞으로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겁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왜곡된다면, 저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게 되겠지요.”그는 다시 깊이 예를 올렸다.“제가 어리석긴 하나, 나무가 숲에서 홀로 높이 자라면 반드시 먼저 바람을 맞는다는 도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청운서원이 세가들에게 온갖 말에 오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이익을 건드리게 되면, 반드시 표적이 될 것입니다.”이도현은 눈앞의 신중한 예왕을 바라보며,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아차렸다.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훗날 조정 신료들의 의심과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이도현만큼은 자신을 믿어 달라는 것.이도현은 손을 뻗어 예왕을 일으켜 세우며 담담히 말했다.“진심으로 사직을 위한다면, 네가 기댈 곳은 바로 이 사직이다.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예왕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이도현은 쉽게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켰다. 그가 이렇게 말해 준 이상, 자신이 한결같이 백성과 조정을 위해 일하는 한, 그는 절대 남의 참언에 휘둘리지 않을 터였다.“그렇다면 왕숙께서 맡겨 주신 중책에 감사드리겠습니다.”이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3화

    사람들이 자세히 알아보니, 그 서원은 신 가에서 세운 곳이고, 청운서원의 현판마저 섭정왕이 직접 써 내린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래는 권세를 앞세워 한 번 눌러 보려던 세가들조차 그때부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신 가는 본래 상인 집안이었다. 처음에는 섭정왕을 도와 남방의 혼란을 평정했고, 이후 셋째 도련님 신도연은 강회 일대의 하도와 관료 사회를 정비했다. 넷째 도련님 신태안은 포위전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활약하며 돌파전 속에서 눈부신 공을 세웠다.게다가 신 가의 여식인 신수빈은 성이 포위되었을 당시, 여자의 몸으로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섰고, 그 공으로 결국 호국부인에 봉해졌다.그러니 지금 조정에서는 감히 누구도 대놓고 신 가를 건드리지 못했다.물론 마음속으로는, 이제 막 생겨난 서원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기세를 이루겠느냐며 비웃고 있었다. 결국 신 가가 명성을 얻기 위해 꾸민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겉으로 억누를 수 없다면 뒤에서 은근히 짓누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게다가 신수빈은 애초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서원을 세운다는 건 곧 세가 문벌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도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이었다.다만 그녀는 이도현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청운서원이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 세가 문벌의 손에 싹도 틔우기 전에 짓밟히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올해 춘시는 예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삼 년에 한 번 열리는 춘시이자, 남북 통일 이후 처음으로 열린 특별 은과였다. 그러니 주고관을 정하는 일 역시 어느 때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매번 주고관과 해당 기수 급제자들 사이에는 관직 생활 내내 이어질 사제의 연이 생기고, 함께 급제한 유생들끼리는 동년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사실을.결국 주고관을 정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조정 안의 인맥을 쌓아 주는 일이기도 했다.각 세력이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2화

    그녀는 궁 안에 갇혀 지낸 지 오래되어, 바깥 사정은 거의 알지 못했다.신수빈이 무사히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는 왕부에 들어가 섭정왕의 장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머지않아 신수빈 역시 왕부로 시집가게 될 터였다.장안성을 지켜 낸 그 전투 이후, 누구도 섭정왕의 마음속에서 신수빈의 자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신수빈이 왕부에 들어가고 나면, 이름만 남은 측비에 불과한 자신을, 그것도 친여동생인 자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 사람이 말했듯,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신수빈은 호국사로 향하기 전, 먼저 입궁해 봉작을 받아야 했다. 하늘의 이름으로 나라의 복을 비는 의식이었다.금관을 쓰고 현조복을 입은 채 단봉문을 나서자, 조정 대신들이 예를 올리며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원래도 눈부실 만큼 화려한 미인이었지만, 더욱 기품과 위엄까지 더해져 온몸에 봉황 같은 위의가 감돌았다. 찬란한 광채가 사람의 시선을 압도해, 감히 오래 바라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이도현은 긴 계단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그녀가 한 걸음씩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이번 길을 다녀오고 나면, 그녀는 백성과 대신들의 마음속에 절대적인 자리를 얻게 될 터였다. 천자를 대신해 나라의 복을 비는 존재가 되는 이상, 더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침내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질 것이고, 다시는 그녀가 재가한 여자라는 이유로 입에 올리는 자도 없게 될 터였다.이도현은 저도 모르게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봉관을 쓰고 혼례복을 입은 신수빈이 천천히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습.그와 나란히 서서 천하의 풍운이 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다시 강산의 아름다움을 함께 바라보는 모습.그녀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고한 영광 속에서 모든 이의 우러름을 받으며, 더는 누구에게도 억지로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삶을.그렇다면 자신은 그녀에게 가장 높은 영광을 안겨 줄 것이었다.그리고 기꺼이 그녀 앞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1화

    진하빈은 편지를 다 읽자마자 바로 촛대 위로 가져갔다. 불길이 천천히 종이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호위가 몰래 쥐여 준 작은 병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손안에서 굴리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품에 넣고 침전으로 돌아갔다.요 며칠 태후의 기면 증세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장 가가 죄를 입은 일로 마음고생이 깊어져 기력이 쇠한 것이라 여겼지만, 어느덧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태후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뿐이었다.태의가 다녀가도 뚜렷한 병증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저 궁녀들에게 태후를 자주 뜰로 모시고 나가 바람을 쐬게 하라는 말만 남겼지만, 태후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금세 피로에 지쳐 버리곤 했다.진하빈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태후는 병든 것이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당장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지만, 사람의 정신과 기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쇠약하게 만들어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무너뜨리는 독이었다.그것이 이도현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진하빈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태후는 한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신수빈과 얽힌 일 속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려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남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박정하고 변덕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신 씨는 자신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으며, 남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도 능숙했다. 게다가 수완까지 뛰어났다. 반면 자신은 측비라는 신분을 얻었지만, 결국 깊은 궁 안에 갇혀 점점 버려져 가는 태후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진하빈은 그 사람이 해 두었던 안배를 떠올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제는 그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그때 황 상궁이 다시 약을 들고 와 태후에게 올리려 했다. 진하빈은 곧장 다가가 약그릇을 빼앗아 들었다.“황 상궁, 이 약은 더 이상 태후 마마께 드리면 안 되네.”황 상궁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80화

    “이 작은 녀석, 네 어미랑 똑같구나. 어리광 부리고 애교 떠는 데에 아주 능숙해. 이 집에서 본왕이 제일 높은 사람인 걸 벌써 알아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냐?”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다만 누군가 말을 걸어주는 게 좋은지 입을 벌린 채 방긋방긋 웃을 뿐이었다.이도현은 아이를 감싸고 있던 작은 이불을 풀어 침상 안쪽에 눕히고, 겉포를 벗은 뒤 다시 침상에 몸을 기댔다.“네 어미가 없으니 본왕은 또 죽도록 보고 싶구나. 오늘은 특별히 네 작은 녀석에게 양보해 주마.”팔다리가 자유로워진 아이는 신이 난 듯 팔과 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그러다 이따금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터뜨렸다.이도현은 몸을 옆으로 돌린 채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서원 같은 인간이 대체 무슨 복이 있어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얻었단 말인가.괜히 심술이 난 이도현은 아이의 통통한 턱을 손으로 받쳐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아버지라 불러 보거라.”물론 두 달 남짓 된 아기가 아버지라고 부를 리는 없었다.아이는 그저 까르르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고 놀았다. 마치 그가 장난을 걸어온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이도현은 코웃음을 두어 번 흘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 나중엔 어차피 본왕의 자식이 될 텐데, 윤 씨 성을 가진 그놈과 무슨 상관이라고.”그 말을 하고 나자, 이도현은 문득 낮에 신수빈을 두 번이나 품었던 일이 떠올랐다.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던 순간들,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아 있었다.혹시 그녀가 아이를 갖게 되지는 않을까.이도현은 물론 신수빈이 자신의 아이를 가져주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을 일으켜 밖을 향해 불렀다.“장풍.”장풍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침상 안쪽에 누운 어린 공자를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낮에는 아이 어미를 끌어안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밤에는 아이까지 품고 자려는 모양이었다.“왕야,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49화

    마님이 걱정할까 두려웠던 금자는 섭정왕의 좌시위에게 부탁해 많은 상처약을 보내오게 했다. 신수빈은 이도현의 겉옷을 벗기고 조심스레 피 묻은 속옷을 벗겼다. 검은 겉옷에서는 피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한 속옷은 그의 상처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오른팔의 속옷은 거의 붉게 젖어 있었고 찰나의 그 한 번 움켜쥔 것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신수빈은 이전에 감싸 두었던 붕대를 한 겹씩 벗겼다. 비록 눈앞의 이 남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디찬 뼈가 드러난 상처는 그녀조차도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50화

    “본왕이 너를 대하는 것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억지로 화를 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본래의 위협이라곤 전혀 없었다. 귓가에 스치듯 낮고 허스키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신수빈은 자연스레 그의 진짜 감정을 분간할 수 있었다.“족합니다. 한데 남녀의 일에서 좋고 나쁘다는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신만큼은 그 속에 담긴 차가움과 따뜻함을 아는 법이지요. 저도 한때는 꿈꾸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을요. 한데 저는 결국 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닿으려 하면 멀어지는 것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34화

    윤서원은 신수빈이 윤 가의 정실부인 신분을 이고 적장자를 낳겠다고 하는 것에 분을 삼키지 못했다. 그는 뒤어금니를 꽉 물고 소매를 휘날리며 떠났다.돌아가는 길에도 윤서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와 뱃속의 그 잡종을 건드릴 수 없다면 이도현과 따로 조건을 논할 수밖에.그의 아이를 키워준다면 그 역시 무엇인가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저녁 식사 후, 금자가 부엌에서 달인 약을 가져왔다.이것은 신 가의 큰 오라버니가 의원을 불러 지은 처방으로 전조 궁중에 사는 어의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여인의 출산에 도움 되는 약을 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43화

    이도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넓은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자,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부드러운 기색이 떠올랐다.“무슨 수고를 그리 할 필요가 있느냐? 그를 처리하고 싶다면 본왕에게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살릴지 죽일지는 내게 말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굳이 네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신수빈은 잠시 멍해졌다. 바로 그때 이도현은 몸을 곧게 세우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본왕은 원래 네가 왕부에 들어오길 원치 않는 것은 윤서원과의 부부정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데 지금 보니 두 사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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