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좁은 공간에는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도는 가운데 연정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주변에서는 찰랑찰랑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희미하게 바다 냄새도 풍겨왔다.연정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살펴보니 자기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여기... 어디야?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문 열어. 당장 열어.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나를 납치해? 죽고 싶어!”외모가 뛰어나고 옷차림도 고급스러운 금발 여성이 문을 세게 두드리며 고함쳤다.“난 H시 시장의 딸이야. 우리 아버지가 알면 너희 전부 끝장이야. 빨리 풀어줘! 들었어?”누군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동요하며 소란을 피웠다.그들의 말 속에서 연정미는 여러 정보를 빠르게 파악했다.여기 있는 여자들은 모두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귀한 집안의 아가씨도 있었고 평범한 학생도 있었다.출신도 제각각이었고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그때, 배 밖에서 남자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하, 더 소리를 지르면서 울어봐. 육지에 도착하면 제대로 맛을 보여줄 테니까. 그때도 너희들이 지금처럼 기세등등할 수 있는지 보자고.”배는 대략 사흘을 항해했고 마침내 육지에 도착했다.선실 문이 열리자 눈부신 햇빛이 쏟아졌다.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연정미는 강한 빛에 눈물이 맺혀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그때 해안에 있던 남자들이 그녀들을 보며 음흉한 눈빛을 드러냈다.그들의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본 짐승처럼 집요하고 끈적했다.“오, 이번에 온 년들은 상태가 꽤 괜찮은데? 허리 잘록하고 다리 길고 다들 얼굴도 예쁘네. 며칠 뒤면 우리도 제대로 즐기겠는데?”“이번에는 지난번보다 훨씬 낫네. 지난번에 그 여자 기억나냐? 가슴이 남자 같아서 아무 느낌도 없더라.”“야, 그러면서 넌 세 번이나 했잖아.”“이번에는 다 괜찮아 보여. 다섯 번은 할 수 있겠는데?”연정미는 남자들의 더럽고 추잡한 모습에 속이
손씨 가문.윤기 나는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손형원의 무릎 위에 엎드려 느긋하게 잠들고 있었다.손형원은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음성 통화를 거절한 뒤로, 하지율은 더 이상 아무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손형원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설마 하지율이 정말 위험한 일을 당해서 더 이상 도움 요청을 보낼 시간조차 없었던 걸까.’그런 생각이 들자 손형원의 마음속에는 후회스러운 감정이 서서히 번졌다.하지율은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없었고 만나자고 한 적도 없었다.늘 적당히 담담한 거리감을 유지했다.손형원은 하지율이 자기와 깊이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게 손형원에게는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다.하지율이 언젠가 손형원의 정체를 알게 되면 더는 상대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그런데 하지율이 갑자기 평소답지 않게 전화를 걸었다.그렇다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여기까지 생각한 손형원은 더 이상 들킬 걱정 따위를 할 수 없었다.손형원은 곧바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하지만 전화는 걸리자마자 자동으로 끊겼다.손형원은 순간 표정이 굳었다.다시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역시 전송되지 않았다.손형원은 곧바로 하지율이 자신을 차단했다는 걸 깨달았다.손형원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하지율이 날 차단한 거야?’하지만 손형원의 직감은 절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하지만 손형원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손형원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고 호흡까지 점점 거칠어졌다.손형원은 곧바로 부하에게 하지율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먼저 전화가 울렸고 보니 연재영이었다.연재영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손형원, 고양이도 찾았으니 이제 정미를 찾는 일에 시간 좀 낼 수 있겠지?”연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며칠째 D국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입국이 가능한 모든 통로에 사람을 배치해 감시했다.그사이 연정
하지율은 고개를 내려 맞잡은 두 손을 한 번 바라봤다.잠시 망설이는 기색이 스쳤지만 결국 손을 빼지 않았다....하지율은 주용화의 집이 어디쯤인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가 머무는 곳은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의 별장이었다.인적은 드물었지만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하고 숨을 고르기에도 더없이 편안한 곳이었다.그동안 주용화는 그녀와 함께 지냈고 머물던 집도 기본 옵션 그대로였다.그러니 주용화의 ‘집다운 집’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하지율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그때 주용화의 목소리가 뒤따랐다.“여긴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인테리어도 대충 꾸민 정도고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 안 곳곳에는 그의 취향이 분명하게 묻어 있었다. 가구 배치부터 색감, 소품 하나까지도 일관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유민재가 손을 댄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주용화는 하지율을 데리고 별장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하지율이 은근히 관심을 보이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여기 일 정리되면... 나중에 L국에도 같이 가보시죠.”잠시 시선을 맞춘 채 덧붙였다.“지율 씨가 편한 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하지율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나중에’라는 말은 지금의 그녀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M국에 온 뒤로 하지율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지금도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으로 버티고 있었으니까.주용화가 말한 ‘나중’이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주용화의 말은 마음 한구석에 미묘하게 남았다. 짧게 스쳤다가 사라지는 온기처럼.별장을 둘러보고 난 뒤 하지율은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먼저 입을 열었다.“확인되었어요? 린이... 진짜 손형원 씨 맞습니까?”손형원의 이름이 나오자, 주용화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확인했어요.”오는 내내 이미 마음의 준비는
이어지는 주용화의 질문에도 손형서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오히려 주용화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에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조금이라도 더 통화를 이어가려는 듯, 아는 대로 술술 털어놓았다.주용화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손형서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그 과정에서 손형원을 팔아넘기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손형서에게는 주용화가 친오빠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통화는 어느새 삼십 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주용화는 말을 아끼며 짧게 대답하거나 듣고 있다는 추임새만 할 뿐이었다.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하지율과 유소린은 알 수 없었다.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용화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만은 분명했다.입가에 걸려 있던 옅은 미소도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처음 만났을 때의 주용화는 그저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다.이십 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처럼 밝은 분위기에 늘 눈빛도 초롱초롱 맑았다.가볍게 웃는 얼굴에서는 위험한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그래서 유소린은 그가 주씨 가문의 가주라는 사실을 알고도 크게 위협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들도 쉽게 와닿지 않았다.하지만 레일 왕자를 상대하던 그날은 달랐다.그제야 알게 됐다. 지금까지 본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밝고 무해해 보이던 얼굴은 철저히 계산된 가면이었다.필요할 때 드러나는 그의 본모습은 손형원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냉정하고 과감했다.어쩌면 노골적으로 힘을 드러내는 손형원보다 더 위험한 유형일지도 몰랐다.유소린은 가끔 생각했다.‘만약 지율이가 화야 씨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혹은 화야 씨의 편이 아니었다면... 화야 씨는 과연 지율이를 어떻게 대했을까?’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주용화 같은 사람을 상대로 주도권을 쥔 채 관계를 이어가는 건 쉽지 않다는 것.결국 하지율이 그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 같았다.그때, 주용화의 입가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분위기가 눈에
유소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지율아, 화야 씨... 무슨 얘기예요? 설마 린이 누군지 아시는 거예요?”하지율은 한순간 말이 막혔다.린이 손형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그녀는 시선을 떨군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냥 우연일 수도 있어요.”주용화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우연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죠.”그는 하지율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전화를 걸어보시죠. 아니면 영상통화도 좋고요. 상대가 누구인지 미리 확인해 두는 게 지율 씨에게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하지율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직은 린과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꼈었다.그동안 나눈 대화도 대부분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화풍, 기법, 거장들의 스타일, 린은 고리타분하다고 느끼기는커녕 매번 진심으로 즐겼다.그래서 더더욱 그 사람이 손형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하지만 주용화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린의 정체를 확인하는 일은 결국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잠시 후 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어 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적어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조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던 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결음만 길게 이어지다 결국 시간초과로 끊어졌다.잠시 뒤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지금 통화가 어려워요. 혹시 해결하기 힘든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말씀해 주세요.]하지율은 무의식적으로 주용화를 바라봤다.주용화는 가볍게 웃고 있었다.놀란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이 상황에서 영상통화를 기대하기는 더 어려워 보였다.옆에 있던 유소린이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잠깐만요...”시선을 번갈아 옮기며 말을 이었다.“손형원이 고
하지율이 담담하게 답했다.“예전에 제 그림 사셨던 분께 보냈어요.”“그림 사셨던 분이요?”주용화가 하지율을 그윽하게 바라봤다.“그때, 따로 그림 보내셨던 분이요?”하지율은 그의 기억력에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주용화가 이어서 물었다.“그분이 여자라고는 어떻게 판단하신 거죠? 직접 만난 적 있어요? 아니면 통화라도 해봤어요?”그 질문에 하지율과 유소린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그제야 하지율은 문득 떠올랐다. 린은 스스로를 여자라고 밝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그저 어린 여성분일 것 같다는 말에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을 뿐...’하지율은 상대를 자연스럽게 여자로 받아들였다.‘아니라고 하지 않았다고 해서... 맞다는 건 아니잖아.’하지율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려졌다.“통화한 적도 없고 직접 만난 적도 없어요. 이름도 몰라요.”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렇게 중요한가요?”주용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지율 씨, 손형원 씨가 어떻게 지율 씨를 찾아냈는지, 기억하시죠.”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졌다.“심다희 씨까지 찾아낸 사람입니다. 지율 씨 신상을 파악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유소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끼어들었다.“지율이 신상은 전에 한 번 털린 적 있잖아요. 린 씨도 계속 지율이한테서 그림을 샀었으니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주용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다면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유소린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알고 있었으면 뭐 해요. 어차피 얼굴 본 적도 없고 가끔 문자로만 연락하는 사이인걸요.”주용화의 시선이 유소린에게로 옮겨갔다.“그래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유소린이 어깨를 으쓱했다.“저는 좀 궁금하긴 한데... 지율이는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서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화야 씨, 혹시 그 사람... 남자일 것 같아요?”하지
이튿날 아침, 주용화의 살인 소식은 마치 누군가 미리 판을 짜놓은 것처럼 일제히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하지율은 이미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그녀와 얽힌 뉴스는 언제나처럼 폭발적인 화제성을 몰고 왔다.연씨 가문의 잃어버린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부터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파란만장한 성장 과정까지, 그녀가 걸어온 삶의 궤적 자체가 이미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없었다.데뷔와 동시에 전 세계를 매료시킨 천재적인 바이올린 실력은 물론 가업을 이어받아 경영 일선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완벽한
3일 뒤, 주용화는 회사의 인터넷이 복구되어 더 문제없을 거라고 알려주었다.앞으로의 침입은 방지할 수 있었으나 이미 잃어버린 데이터는 어쩔 수 없었다.계획은 고친다고 해도 많은 계약은 더 이상 고치기 어려웠다.연상진은 이제 하지율이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계약하려는지 알았기에 먼저 나서서 계약하지 못하게 훼방 놓을 것이다.연상진을 피하려면 계약을 포기해야 한다.하지만 그것 또한 연상진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이때 주용화가 갑자기 얘기했다.“가짜 문서를 만들어서 연상진에게 뿌려버리는 건 어때요? 연상진이 가짜 문서에 속아
“솔직히 그쪽과 합의하기는 어려워요. 그 사람들에게 내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요.”주용화는 하지율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율 씨 생각이 맞아요. 연씨 가문이든 다른 사람이든 굳이 타인에게 빚을 질 이유는 없죠.”하지율이 하이현파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전화를 들고 표서준에게 연락하려던 찰나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표서준이 다급한 얼굴로 들어서며 말했다.“대표님, 누군가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하지율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나를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지?’“누군데
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역시 연정미네. 뭐든지 다 잘한다니까. 지난번 계약식 현장에서도 상대가 온갖 트집을 잡았는데 연정미는 끝까지 여유롭고 침착했잖아. 결국 그 짠돌이로 유명한 요한슨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요한슨? 협상 능력이 대단하기로 유명한 요한슨 말이야? 다들 요한슨한테서 손해만 보고 나온다던데, 그런 사람이 연정미한테 진 거야?”“그러니까 연정미가 대단한 거지.”“근데 너희 들었어? 하지율 있잖아, 연정미처럼 똑같이 새 회사를 맡았는데 성과는커녕 박씨 가문까지 건드렸다더라.”“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