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용화의 시선은 분명 담담했고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런 파문도 없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주변 사람들은 주용화의 눈빛에 압도당해 조금 전까지 떠들던 말들을 일제히 멈췄고 감히 눈을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다.주용화는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본 뒤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그제야 모두 숨통이 트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용화가 멀어지자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우리 얘기를 들은 거 아니겠지?”“됐어. 그만 말하자.”“주씨 가문의 소문을 못 들은 것도 아니고 저런 사람은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연정미와 심수현의 약혼식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대부분의 하객은 미리 도착해 인맥을 쌓고 사업 파트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밖은 떠들썩했지만 메이크업 룸에 앉아 있던 연정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보현 오빠.”연정미가 나직이 말했다.“제가 수현 오빠와 약혼하는 걸 원망하시나요?”단보현은 연정미를 깊고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나도 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알아. 연재영이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했고 손형원의 지분도 잠시 동결됐을 뿐이니까. 지금 미리 손을 쓰지 않으면 연경 그룹은 완전히 하지율의 손에 넘어갈 거야.”연정미는 눈물 어린 눈으로 단보현을 바라봤다.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흔들렸지만 애써 참아냈다.연정미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지금의 저는 이미 보현 오빠한테 어울리지 못해요. 단씨 가문도 절대 저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요. 그래도 제가 오빠와 결혼하든 못 하든 제 마음속에서 오빠를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단보현은 사랑보다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연정미를 좋아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이익을 더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연정미를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었다.그래서였을까.이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연정미를 보자 단보현의 눈에도 연민이 스며들었다.“정미야...”단보현의 목소리가 잠겼다.“미안해.”연정미가 심
하지율과 주용화는 하룻밤 내내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두 사람은 모두 이성을 잃을 만큼 감정이 격해졌다.하지율은 주용화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완전히 무너졌다.원칙도 선도 모두 잊어버린 채 두 사람은 서로 엉켜져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연정미의 약혼식 날이 다가왔다.준비 기간은 촉박했지만 최상위 명문 가문의 행사답게 심씨 가문은 연정미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 주려는 듯 성대한 규모로 약혼식을 준비했다.행사장에는 손님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입구에 늘어선 한정판 슈퍼카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마치 슈퍼카 박람회장을 방불케 할 만큼 화려했다.이번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들도 역시 각국의 정재계 인사들로 부유하거나 권력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연정미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최고의 명문 가문의 아가씨였다.그러니 연정미의 약혼식은 당연히 큰 화제를 모았다.원래부터 유명 인사였던 연정미의 약혼식은 전 세계로 동시 생중계되고 있었다.인터넷 실시간 채팅창은 쉴 새 없이 올라갔고 댓글은 놀라움과 찬사로 가득했다.이 정도 규모의 명문 가문의 약혼식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연정미는 오랫동안 사교계의 여신이자 최고의 화제 인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그때 누군가 말했다.“다른 사람이 낳은 여자라면 어때? 연정미는 여전히 인생의 승자잖아. 정실부인이 낳은 아가씨들 중에도 연정미만큼 잘 시집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난 예전에 연정미가 손형원이랑 결혼하거나 단보현이랑 결혼할 줄 알았어. 설마 심수현일 줄은 몰랐네.”“심수현은 평판도 좋고 성격도 단보현보다 낫잖아. 게다가 둘 다 가주니까 연정미가 심수현을 선택한 게 이해는 돼.”“연정미의 매력은 진짜 인정해야지. 유명 가문 가주들이 거의 다 연정미한테 빠져 있었잖아.”“결혼하는데도 그 남자들이 아직도 연정미를 못 잊고 있다더라.”“들었어? 손형원이 연정미의 약혼 선물로 주식까지 줬대.”“대박! 손형원이 그 정도로 순정남이었어?”“그래도 심수현이나 단보현보다는 한 수 아래지. 둘
하지율이 설명했다.“처음 안 어르신께 진료받으러 갔을 때 이미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제가 화야 씨한테 말하지 않은 건...”하지만 주용화가 하지율의 말을 막았다.“제가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그런 거예요?”하지율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화야 씨가 마음 아플까 봐 그랬어요.”주용화는 잠시 멈칫했고 하지율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화야 씨가 손형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알아요. 당장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요. 그리고 제 손 때문이라면 손형원을 살려 둘 수도 있고 한 번쯤 눈감아 줄 수도 있고 제가 치료받는 것도 허락해 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저는 화야 씨를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화야 씨가 괴로워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요.”사실 이 일을 주용화가 알든 모르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명의를 찾아준 사람이 손형원이든 함우민이든 주용화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하지율의 치료를 막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누구에게나 싫어하는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일은 불편한 법이었다.하지율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화야 씨는 너무 똑똑해요. 무슨 일이든 다 알아맞히잖아요. 결국 화야 씨를 힘들게 한 사람도 손형원이 아니라 제가 돼 버렸네요.”말이 끝나자마자 주용화가 하지율을 힘껏 끌어안았다.마치 품 안에 가둬 버리려는 것처럼 단단한 포옹이었다.주용화의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지율 씨는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줘요?”이토록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을 어떻게 놓을 수 있겠는가.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하지율은 고개를 갸웃했다.“이게 그렇게까지 잘해 주는 건가요?”주용화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율 씨처럼 제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준 사람은 한 번도 없었어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저는 미리 프로그램된 기계 같은 존재였어요. 굳이 걱정하거나 배려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죠.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처리하고 절대 실수하지 않는 사람 말이죠. 게다가 완벽한 기계는 감정을 가
“어떤 불치병 환자들은 스스로 약을 시험해 보겠다고 나서기도 해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살아날 기회니까요. 제가 억지로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제가 완성한 처방은 전부 무상으로 기부해 왔어요. 그쪽 단씨 가문처럼 기술을 독점해서 돈벌이로 삼지는 않았다고요.”단종건도 그 말에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모두 비슷한 부류였고 누가 누구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잠시 후, 단종건이 말했다.“사람마다 전문 분야가 있는 법이야. 해독제 연구에 약하면 괜히 손대지 마. 손형원 그 녀석은 체질이 특이해서 네가 몸 안의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대로 독이 퍼져 죽을 수도 있어.”그러다 단종건은 묘한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그런데 말이야...”단종건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손형원 그 녀석이 지율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만약 그 일이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면 내가 절대 내 곁에 두고 치료하게 두지는 않았을 거야.”안병철은 단종건을 흘끗 보더니 딱딱하게 말했다.“가능하다면 그 녀석 몸속의 독도 풀어 줘요. 그 대가로 제가 단 어르신에게 빚 하나 진 걸로 하죠.”하지만 단종건은 입으로는 여전히 안병철을 가만두지 않았다.“보아하니 넌 손씨 가문 그 녀석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하긴 너희는 둘 다 좋은 사람은 아니니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겠지.”단종건은 독과 해독제 연구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안병철은 손형원의 해독을 단종건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였다.그래서 단종건이 이렇게 비꼬아도 드물게 반박하지 않았다.단종건 역시 하지율의 후속 치료를 안병철에게 맡겨야 했다.그래서 몇 마디 더 비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안병철과 단종건의 연구소를 나온 뒤, 하지율의 손은 여전히 각별한 관리가 필요했다.두 사람은 밖을 더 돌아다니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하지율은 혹시 모를 일을 우려해 아직 연경 그룹으로 복귀하지 않았다.실밥을 푼 지금도 반 달 정도
하지율의 실밥을 제거한 뒤, 안병철은 다시 한번 그녀의 손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그러다가 안병철은 고개를 끄덕였다.“회복 상태는 좋아요. 하지만 앞으로 3개월 동안은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마시고 1년 동안은 손을 과하게 사용하지 마세요.”잠시 말을 멈춘 안병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1년 동안은 제가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회복 경과를 수시로 확인하기 위해서요. 수술한 손에 문제가 생기거나 다치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시면 됩니다.”안병철이 M국에 남아 하지율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한 것은 엄청난 호의였다.그러자 하지율이 대답했다.“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 어르신,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반드시...”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병철이 무뚝뚝하게 하지율의 말을 끊었다.“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미 충분한 치료비를 받았는데 또 받을 이유가 없지요.”그러더니 안병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용화를 바라봤다.“더구나 제가 원하는 보상은 아무나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 젊은이도 마찬가지고요.”주용화의 눈빛이 깊어졌다.“실례가 안 된다면 무엇을 원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그때 옆에 있던 단종건이 헛기침을 했다.“별거 아니야. 약 처방일 뿐인데 저 자식이 괜히 허세 부리는 거지.”단종건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됐어. 둘 다 볼일 없으면 가 봐. 나도 이 늙은이랑 처방을 연구해야 하니까.”그러자 안병철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늘 무표정하던 얼굴에도 드물게 분노가 드러났다.“단 어르신이 오히려 저보다 두 살이나 더 많으면서 누굴 늙은이라 그래요? 이 늙은 거북이 같은 인간 말이죠!”두 사람을 합치면 백오십 살 가까이 되는 나이였지만 이어진 말다툼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단종건이 버럭했다.“네가 더 거북이 같은 인간이지!”그러자 안병철도 지지 않았다.“단 어르신은 곧 무덤 들어갈 늙은이잖아요!”“꺼져!”“꺼져야 할 쪽은 그쪽이라고요!”걷잡을 수 없이 싸우는 두
안병철은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덧붙였다.“보름 뒤에 다시 오세요. 그때 실밥을 제거하겠습니다.”주용화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그러자 안병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저한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부탁을 받았을 뿐이니까요.”주용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더 묻기도 전에 침대 위의 하지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주용화의 시선은 순식간에 하지율에게 향했다. 그리고 곧장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지율 씨, 괜찮아요?”하지율은 몽롱한 눈으로 몇 번 눈을 깜빡였다.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은 탓에 머릿속이 잠시 텅 빈 듯했다.꿈을 꾼 것 같았다.‘분명 손형원이 나오는 꿈이었는데...’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며칠 전 안병철을 만나고 돌아갈 때, 하지율은 손형원이 아직 살아 있는지 묻지 않았다.이제 손형원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하지율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손형원과의 인연도 악연도 이미 끝났고,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 역시 오래전에 정리됐다고 생각했다.하지율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초점을 맞췄다.이내 정신을 차린 하지율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수려하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들어오자, 하지율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화야 씨...”주용화는 하지율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하지만 수술한 손을 건드릴까 봐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드물게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하지율은 그런 주용화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다치지 않은 손을 들어 주용화의 손을 가볍게 감쌌다.주용화의 손끝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하지율은 그 손끝에 밴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수술실 밖에서 기다린 몇 시간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지금 이 순간의 주용화는 평소와 달랐다.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하지율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화야 씨, 그렇게 긴장 안 하셔도 돼요.”하지율은 살며시 손에 힘을 주었다.“보세
“소린아, 그냥 그렇게 해 줘. 나도 다 계획이 있어.”유소린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음악회가 코앞이니까 화제성 올리는 건 나쁘지 않지. 다만 온라인에는 걸핏하면 유언비어를 퍼 나르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리고 바이올린 대회, 내일부터 본선이야. 결승 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애들도 많다던데... 지율아, 난 사실 네가 좀 걱정돼.”하지율이 대답하려는 찰나, 주용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 기간에 제가 하지율 씨 곁을 지키겠습니다. 경호까지 제가 맡을게요.”유소린이 하지율을 쳐다보았다. “지율아, 어때?
하지율 손목이 부어서, 당분간 바이올린은 어렵겠다.며칠 연습을 비워도 큰 타격은 없으니, 그 사이 유소린과 음악회 준비를 맞춰 보기로 했다.주용화는 하지율이 이틀쯤 연습을 못 한다는 말을 듣고, 눈에 띄게 속상해했다.유소린이 그걸 보고 웃었다.“지율이 바이올린 연주가 그렇게나 잠이 잘 와요? 하루만 못 들어도 밤새 뒤척이게?”농담이었는데, 주용화가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율 씨 연주는 몸과 마음을 풀어 주는 힘이 있어요. 하루만 못 들어도 밤새 잠이 오지 않아요.”유소린이 잠깐 멍해졌다가 감탄했다.“화야
“윤택아, 이모가 이따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 만들어 줄까?”임채아를 보자, 고윤택은 얌전히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채아 이모.” 그리고 옆에 서 있던 하지율을 흘깃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채아 이모, 저는 이따가 엄마랑 돌아가야 해요.”임채아는 그제야 하지율을 본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지율 씨도 계시네요? 윤택아,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니?”고윤택이 대답했다.“외할아버지 보러 왔어요.”“외할아버지?” 임채아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놀란 듯 하지율을 바라봤다.“하지율 씨 아버지
이런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집은 재벌 집 아니면 그만큼 지위가 높은 가문들이었다.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채 좋은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이라 도련님, 아가씨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는 안하무인인 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고윤택과 정시온은 그나마 예의가 바른 애들이었다.가끔가다 도도하게 구는 고윤택과 달리 정시온은 정말 밝고 착해서 유치원 선생님들도 모두 아이를 좋아했다.그래서 시온이에게 엄마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더 안타까워하며 아이를 챙겨주었었다.그렇게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었기에 상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