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정미는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기분이 나쁜 게 아니에요.”그러자 주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 저도 조금 있다가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때 연정미가 갑자기 주용화를 불러 세웠다.“용화 씨.”주용화가 돌아보며 물었다.“또 무슨 일이 있나요?”연정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혹시... 지율이가 갑자기 용화 씨를 찾아온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아직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주용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도 연정미 씨는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드릴게요.”그러자 연정미가 다시 물었다.“용화 씨는 지율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하지율 씨가 진소현 씨 친구잖아요? 진소현 씨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연정미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율이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주용화의 첫사랑인 척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연정미는 하지율과 주용화가 만나는 걸 계속 막을 수도 없었다.괜히 계속 방해했다가는 오히려 주용화의 의심만 살 것이다.하지율이 주용화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할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자신이 빈틈없이 대비만 해 둔다면 하지율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주용화가 믿을 리가 없었다.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 하지율이 일부러 이간질하는 거라고 몰아가면 그만이었다.무엇보다 연정미에게는 진짜 증거가 있었지만 하지율한테는 없었다.그렇게 생각하자 연정미의 마음도 조금씩 놓였다.“알겠어요. 바쁜 일이 있으면 먼저 가 봐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요.”주용화는 가볍게 웃은 뒤 돌아서서 떠났다....하지율은 이번 경기 한 번으로 단숨에 이름을 알렸다.차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팬들이 몰려들어 하지율을 에워쌌다.사인을 해 달라는가 하면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며 쉴 새 없이 부탁하는 통에 거절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마침내 사람들이 전부 흩어졌을 때쯤에는 하지율의 손이 저릴 정도로 피곤해
성휘재는 자신의 애차를 박살 낸 주용화가 몹시 미웠다.하지만 지금 연정미가 보이는 태도는 그것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정미야,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 오늘 내가 널 돕지 않았으면 내 차가 망가질 일이 있었겠어?”“호영이랑 진호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갈 일도 없었겠지. 그런데 넌 이제 와서 오래 알고 지낸 나보다 고작 며칠 전에 알게 된 사람을 믿겠다는 거야?”성휘재는 연정미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다만 성휘재는 정이 많고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오히려 사랑보다 친구 사이의 의리를 더 중하게 여길 정도였다.그런 성휘재에게 연정미의 선택은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연정미는 안색이 살짝 변했다.“휘재 오빠, 이건 나중에 따로 설명할게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주용화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연정미 씨, 제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따로 있어요? 왜 굳이 나중에 설명하시려는 거죠?”주용화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연정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설마 제 앞에서는 이렇게 말해 놓고 뒤에서는 전혀 다른 말을 하실 생각입니까?”그때 성휘재도 바로 거들었다.“맞아. 할 말 있으면 여기서 나랑 주용화 앞에서 다 말해.”평소였다면 성휘재도 연정미의 사정을 봐주며 적당히 맞춰 줬을지 몰랐다.하지만 오늘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차가 망가졌고 친구들까지 전부 다쳤다.그 모든 일이 연정미를 도와주다가 벌어진 일이었다.이미 선을 넘은 이상, 성휘재도 더는 무조건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연정미는 주용화가 몇 마디로 자신의 퇴로까지 완전히 막아 버리자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연정미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휘재의 눈빛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지금 이 순간만큼, 성휘재는 주용화보다 연정미가 더 싫었다.성휘재는 연정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래. 네가 저 사람을 선택한 거라면... 오늘부로 우리 우정도 끝이야.”말을
성휘재의 도움까지 잃는다면 연정미는 앞으로 이 레이싱계에서 버티기 훨씬 어려워질 것이다.연정미는 성휘재라는 인맥을 이렇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주용화까지 찾아왔다.“연정미 씨, 브레이크가 고장 난 일은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인지 정하셨어요?”성휘재는 주용화를 보자 눈에 증오를 가득 드러냈다.“주용화 씨가 감히 제 앞에 또 나타나요?”하지만 주용화는 미소를 지었다.“성휘재 씨 같은 살인미수범도 오는데... 제가 왜 못 오죠?”성휘재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살인미수범이라고요? 주용화 씨는 지금 자기소개라도 하는 건가요?”두 사람이 또 싸우기라도 할까 봐 연정미가 황급히 중재에 나섰다.“용화 씨, 휘재 오빠, 이건 뭔가 오해가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그러나 연정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용화가 담담하게 말을 끊었다.“그렇다면 연정미 씨가 설명해 보시죠. 제 브레이크는 왜 고장 난 겁니까?”성휘재가 비웃으며 대답했다.“브레이크 고장 났다고요? 제 차 들이받을 때는 브레이크가 안 듣는 사람처럼 전혀 안 보이던데요?”주용화가 성휘재를 힐끗 바라봤다.“그러면 저도 하나 묻죠. 브레이크가 멀쩡했다면 제가 대체 왜 성휘재 씨의 차를 들이받았겠어요?”그러자 성휘재가 차갑게 대답했다.“하지율 씨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아요.”주용화가 웃었다.“저랑 하지율 씨는 별로 친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한가해서 굳이 하지율 씨를 왜 돕습니까? 굳이 돕는다면 연정미 씨를 도와야겠죠.”“연정미 씨는 예전에 제게 큰 도움을 준 적이 있고 저도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성휘재는 주용화를 노려봤다.“제가 바보로 보여요? 아까 당신 입으로 일부러 그랬다고 인정했잖아요! 그리고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고 하면 다예요?”“진짜 고장이었는지는 검사해 보면 바로 나와요. 당신 말만 믿을 수는 없어요!”주용화는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으로 성휘재를 바라보며 말했다.“차는 전부 이
몇 분이 더 지나서야 연정미의 차가 초라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레이싱 같은 경기에서는 1초 차이만 나도 거리가 크게 벌어진다.그런데 몇 분 차이라니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그때 누군가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야, 그나마 외부 트랙이라 다행이지. 경기장 안에서 도는 코스였으면 연정미는 한 바퀴 따라잡히는 거 아니었어?”“성휘재가 그렇게까지 판을 깔아 줬는데도 연정미가 졌네. 차도 잃고 체면도 잃고 말이야.”“이번 일로 성휘재의 명예도 제대로 망가지겠네.”“연정미는 사생아라며? 역시 가짜는 진짜를 못 이기네.”“하지율의 경기 보고 나니까 예전의 내가 얼마나 보는 눈이 없었는지 알겠네.”“연정미를 천재라고 생각했다니... 하지율이랑 비교하면 그냥 평범한 인간 수준이잖아.”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실력으로 말하는 세계는 원래 이렇게 냉정한 법이었다.그때 한 프로 선수가 막 차에서 내린 하지율을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끼나? 아까 하지율이 코너에서 연정미 추월한 방식은 예전에 그 전설적인 레이서 X랑 너무 비슷한데?”그러자 옆에 있던 프로 선수가 놀라 물었다.“X? 예전에 성휘재가 사람까지 풀어서 찾았다는 그 레이서 말이야?”“맞아.”먼저 말한 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X가 나타났던 날, 나도 현장에 있었어. 직접 봤는데 진짜 대단했지. 특히 코너 도는 방식이 굉장히 특이했어. 겉보기에는 단순하고 깔끔한데 실제로 따라 하기는 엄청 어려워.”“몇 년이 지나도록 비슷하게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어. 성휘재조차 제대로 재현하기 힘들어했으니 거의 유일한 스타일이라고 봐야지.”그때 다른 프로 선수가 눈을 크게 떴다.“설마... 하지율이 성휘재가 그렇게 찾아다니던 X인 거야? 만약 진짜라면 웃기겠는데?”“성휘재가 연정미를 도와주겠다고 저렇게 비열하게 하지율을 괴롭혔으니 하지율은 이제 성휘재 꼴도 보기 싫겠네.”먼저 말한 선수가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난 오히려 성휘재의 표정이 궁금
“방금 계산해 봤는데 하지율이 코너를 통과할 때마다 연정미보다 2초 정도 빨라!”“2초라고, 무려 2초!”“저렇게 빨리 따라잡네. 이건 그냥 압도적인 차이잖아!”“확신하는데 오늘부터 하지율이 내 여신이야!”“너무 일찍 좋아하지 마. 아직 결승선도 안 지났어. 누가 이길지는 모르는 거잖아.”“그렇게 네 연정미 여신이 이길 거라고 믿으면... 우리 내기할래?”“네가 이기면 내가 얼마 전에 튜닝한 새 차를 줄게.”“내가 이기면 네가 얼마 전에 산 새 차 나 줘. 어때?”승부는 아직 모른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후반부 코스는 구불구불한 데다 난도가 매우 높았다.연정미가 연달아 3개의 코너를 지난 뒤 룸미러를 확인하자 어느새 하지율의 차가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너무 가까웠다.이러다가는 다음 코너에서 분명 추월당할 것이다.이제 연정미도 더 이상 침착한 척할 수 없었고 얼굴에 짙은 불안과 억울함이 번졌다.기술만 놓고 보면 하지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연정미도 알고 있었다.하지율은 코너를 통과할 때 시간을 낭비하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 그만큼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기술로 하지율을 이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연정미는 이를 악물었고 지금으로서는 하지율의 앞을 막아 추월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가능하다면 하지율의 차가 통제력을 잃고 사고까지 나서 다시는 자신을 추월하지 못하게 만들면 더 좋았다.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연정미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연정미는 갑자기 차를 틀어 하지율의 앞을 막았다.하지율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자신도 왼쪽으로 갔고 하지율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갔다.몇 번이나 같은 식으로 움직이자 실제로 하지율의 차를 뒤에 묶어 둘 수 있었다.‘10분만 더 버티면 내가 이겨!’점차 하지율을 응원하기 시작한 관중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설마 하지율... 저대로 뒤에 갇히는 거 아니야?”“연정미... 저건 고의로 길을 막는 거잖
하지율의 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장은 순식간에 술렁였다.사람들은 더 이상 뒤쪽 충돌 사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일제히 하지율과 연정미의 승부에 시선을 돌렸다.여러 차가 뒤엉키고 충돌하는 장면도 자극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레이싱 경기장이었다.결국 중요한 건 실력이었다.그런데 처음부터 얕잡아봤던 하지율이 그렇게 큰 격차를 뒤집고 따라붙는 모습을 보자 모두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미쳤어. 이게 무슨 일이야? 하지율이 어떻게 따라온 거야? 연정미가 봐준 거 아니야?”“아니면 뒤에 있는 애들이 못 따라올 거라 생각해서 연정미가 대충 달린 건가?”“됐어. 그만 쉴드 쳐. 화면에 속도가 계속 뜨고 있었잖아.”“연정미는 봐준 적도 없고 대충 달린 것도 아니야. 오히려 방해하는 차가 없어서 평소보다 더 빠르게 달렸어.”“그냥 인정해. 하지율이 연정미보다 잘하는 거야.”“운빨이었다고 해도 오히려 운이 좋은 쪽은 연정미잖아?”“맞아. 아까 그 난장판에도 연정미는 전혀 휘말리지 않았잖아. 하지율은 차 여러 대에 한참이나 포위당했어.”연정미의 팬들과 지지자들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누군가 핵심을 짚었다.“잠깐, 그럼 아까 성휘재랑 다른 선수들이 체면까지 버려 가면서 하지율을 막은 게 혹시 연정미한테 우승을 안겨 주려고 그런 거 아니야?”“그럴 수도 있겠는데?”“하지율이 진짜 그렇게 못했다면 굳이 떼로 막을 이유가 없잖아.”“10분 먼저 출발하게 해 줘도 못 이길 정도였다면 말이야.”“그런데 지금은 반대네. 연정미가 한참 먼저 달렸는데도 거의 따라잡히고 있잖아.”차 안의 연정미에게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한 코너를 돌던 순간, 연정미는 무심코 룸미러를 확인했다.그 순간, 연정미는 숨이 턱 막혔고 눈동자에 믿기지 않는 기색이 떠올랐다.헬멧만 아니었다면 눈을 비벼 보고 싶었다.뒤에서 따라오는 차는 분명 하지율이 선택한 추풍이었다.‘분명 이렇게까지 큰 차이로 따돌렸는데 대체 하지율은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