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시 온다면

사랑이 다시 온다면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15
By:  릴리박In-update ngayon la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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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했던 연애의 끝에 찾아온 뜻밖의 생명, 그리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치러야 했던 비극적인 선택. 이어진 연인의 배신. 남자친구의 이중 생활을 목격한 현주는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을 맛본다. "우린 서로의 상처로 서로를 찌르고 있었을 뿐이야." 모든 것을 잃은 채 무너져 내린 순간, 비집고 들어온 온기가 있었다. 철벽 같은 사장인 줄 알았던 준호. 다정과 냉정을 오가는 그의 거부할 수 없는 은근한 직진 속에, 현주의 굳어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데.... 상처 입은 영혼들의 위태롭고도 아찔한 구원 로맨스. 과연 현주는 지난날의 아픔을 지우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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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1화.

1화.

“뭐 좀 먹고 있어?”

“….”

“먹을 기분 아니겠지만, 그래도 먹어. 얼굴이 너무 안 좋아. 이러다 너까지 쓰러지겠어.”

민재가 현주의 손에 억지로 수저를 쥐여 주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텅 빈 식탁 위를 쓸쓸하게 맴돌았다. 숟가락을 든 현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사귄 지 어느덧 2년째였다.

친한 친구의 소개로 만나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도 다정한 연애를 해왔다. 평일엔 야근을 피하며 시간을 맞추었고, 주말이면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맛집을 찾았다. 세상의 모든 연인이 그렇듯, 평온한 일상이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두 사람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를 그와 손을 잡고 걸었다. 여름도 아닌데 맞잡은 땀 밴 손바닥이 축축했다.

민재의 표정은 깊은 밤거리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현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고 무거운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은 뒤로 일주일째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긴, 그녀 역시 먹지 못해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퀭한 눈빛 속에서 그날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연립주택 2층.

현주의 집에 도착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아직도 열쇠로 문을 여는 구식 건물이었다. ‘도어 록이라도 진작 달아 줄 걸 그랬다.’ 민재는 문득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열쇠를 돌렸다.

“오빠, 나 씻어도 돼?”

“어. 그래.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씻어.”

텔레비전도 없는 좁고 적막한 방. 한눈에 다 들어오는 옹색한 공간인데도, 현주는 늘 혼자 남겨진 부재의 시간이 지루할까 봐 자기의 다음 행동을 그에게 허락받듯 물었다. 민재는 혼자만의 시간을 유독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구속 같지 않은 은근한 그 구속이 가끔 현주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오늘처럼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막히는 날에는 그 무게가 배가 되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을 삼킨 채, 서둘러 씻고 욕실 문을 나섰다.

핸드폰 화면을 말없이 들여다보던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갓 씻고 나온 현주의 얼굴은 붉은 온기로 가득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갛게 상기된 뺨이 묘하게 앳돼 보여 마음이 더 아팠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같이 마주한 얼굴인데, 오늘따라 유독 새삼스럽고 애처로웠다.

그가 입술을 꾹 다물고 무거운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오빠,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어? 어. 당연히 그래야지. 너 혼자 두기 싫어.”

“그럼, 오빠도 들어가서 씻어. 퇴근하고 곧장 와서 피곤할 텐데.”

“좀 이따가 씻을게. 현주야, 이리 와 봐.”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있던 민재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현주가 그 차가운 손을 잡자, 그는 조심스럽고도 힘없는 손길로 그녀를 끌어당겨 제 옆에 앉혔다.

그리고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촉촉한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축 처진 현주의 입술이 그의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민재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는, 죄인의 것과 다름없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느릿하게 어깨를 감싸 안는 그의 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현주야…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 생각은 어때?”

두려움에 떨리던 현주의 눈시울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빠가 결정해. 난 오빠 결정 따를게.”

“현주야, 우리… 아이는… 결혼하고 낳자. 지금은… 아니야.”

“….”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현주가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서러움이 몸을 잘게 들썩이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말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는 벌써 수십 번도 더 그려본 결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현실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민재는 생각보다 큰 고민 없이 아이를 포기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뎌 치열하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현주 말고 다른 생명의 무게는 너무나 버겁고 두려운 감옥이었으므로.

어둠이 짙게 깔린, 그 어떤 날보다 서글프고 차가운 밤이 흘러갔다. 마침내 잔인한 새벽이 밝아오고, 산부인과 수술 동의서 위에 민재의 사인이 차갑게 각인됐다.

그의 간결한 사인이 끝난 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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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뭐 좀 먹고 있어?”“….”“먹을 기분 아니겠지만, 그래도 먹어. 얼굴이 너무 안 좋아. 이러다 너까지 쓰러지겠어.”민재가 현주의 손에 억지로 수저를 쥐여 주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텅 빈 식탁 위를 쓸쓸하게 맴돌았다. 숟가락을 든 현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사귄 지 어느덧 2년째였다.친한 친구의 소개로 만나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도 다정한 연애를 해왔다. 평일엔 야근을 피하며 시간을 맞추었고, 주말이면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맛집을 찾았다. 세상의 모든 연인이 그렇듯, 평온한 일상이 당연한 줄 알았다.하지만 일주일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두 사람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를 그와 손을 잡고 걸었다. 여름도 아닌데 맞잡은 땀 밴 손바닥이 축축했다.민재의 표정은 깊은 밤거리처럼 가라앉아 있었다.현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고 무거운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은 뒤로 일주일째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하긴, 그녀 역시 먹지 못해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퀭한 눈빛 속에서 그날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햇볕이 잘 들지 않아 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연립주택 2층.현주의 집에 도착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아직도 열쇠로 문을 여는 구식 건물이었다. ‘도어 록이라도 진작 달아 줄 걸 그랬다.’ 민재는 문득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열쇠를 돌렸다.“오빠, 나 씻어도 돼?”“어. 그래.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씻어.”텔레비전도 없는 좁고 적막한 방. 한눈에 다 들어오는 옹색한 공간인데도, 현주는 늘 혼자 남겨진 부재의 시간이 지루할까 봐 자기의 다음 행동을 그에게 허락받듯 물었다. 민재는 혼자만의 시간을 유독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구속 같지 않은 은근한 그 구속이 가끔 현주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오늘처럼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막히는 날에는 그 무게가 배가 되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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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화.다음날, 아침 8시.오픈 시간에 맞춰 현주가 카페 문을 열었다.의과대 건물 안에 있는 카페였고, 현주는 오픈 조를 도맡았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줄을 선 의대생들을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맞았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웃어야 했다.환기를 시킬 틈도 없이 주문이 밀려들었다.블렌더 안에서 얼음이 갈렸다. 투명한 정사각형이 칼날에 사정없이 조각나 형체를 잃어 갔다.한 시간 뒤, 굵직한 목소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안녕, 현주 씨!”“안녕하세요, 캡틴.”캡틴. 유치한 호칭이지만 준호의 주문이었다. 사장님 말고 캡틴으로 불러 달라는 서른 살 훈남. 대학교 관계자와 연이 있는지, 이 좋은 자리에 카페를 차릴 만한 인맥을 가진 사람이었다.경력 하나 없이 지원했을 때 그는 금방 배운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만 믿고 쉬운 줄 알았다.서서 하는 일이 이렇게 고된 일인 줄 알았을까. 어제처럼 몸도 마음도 깡그리 무너진 다음 날은 더했다.준호가 성큼성큼 바 안으로 들어왔다.“살아는 있네. 어제 문자 딱 한 줄 보냈길래 긴장했잖아.”“…죄송해요. 갑자기 연락드려서.”“죄송까지야. 아픈 게 죄는 아니니까. 그래서,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은 거야.”“괜찮아요.”“그 얼굴로?”현주가 대답 대신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준호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한 번 더 훑었다. 괜찮다고는 하는데, 핏기 하나 없었다.“흠.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말해. 조퇴시켜 줄 테니까.”“진짜 괜찮아요. 약도 먹었어요.”거짓말이었다.어제 약국에서 받은 약봉지는 그대로 가방에 있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아파야 한다면 아프고 싶었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좋아. 그렇다면,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주 찐하게 한잔!”“아주 진하게요?”“응. 오늘 좀 살벌하게 가 보려고.”현주가 옅게 웃고는 그라인더를 돌렸다. 진갈색 원두가 갈리며 고소한 향이 매장을 채웠다.포스 앞에서 매출을 확인하던 준호 앞에 잔이 놓였다. 센스가 좋은 건지 가르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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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화.어제 일이 마음에 걸린 민재가 퇴근길에 현주의 집을 찾았다.“현주야, 저녁 뭐 먹을래?”“…아무거나.”“그래. 일단 나가 보자.”메뉴를 정하지 못한 두 사람은 집 근처 한적한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된 자리 한편에 나란히 앉자마자, 민재가 현주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나도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데 그녀는 오죽할까.상실감보다, 그보다 더 거대한 아픔을 견뎌내는 현주를 향한 미안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따뜻한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다른 것도 시킬까?”“괜찮아. 그냥 아무거나 먹을래.”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원래가 말이 많은 여자는 아니었지만, 제 앞에서 저토록 생기 없는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괜한 조바심이 민재의 숨통을 조여왔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응.”“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회사는?”“새벽에 일어나서 가면 돼. 걱정 마.”민재의 회사는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였다.평일엔 피곤하다는 핑계로 거의 자고 가지 않았던 그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혼자 남겨진 그녀를 방치할 수가 없었다.가볍게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 거리에는 완연한 봄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현주의 코끝으로 향긋한 꽃내음이 아찔하게 밀려들었다.하아, 내가 지금 이런 걸 느껴도 되나.별것 아닌 일상적인 감각조차 사치처럼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걷던 민재는 흔들리는 현주의 옆모습을 보고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현주야… 내가,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그러니까… 그렇게 힘들어하지 마.”맞잡은 손에 절박한 힘이 실렸다.“…아니야. 오빠만의 잘못이 아니잖아. 나 피곤해. 빨리 들어가자.”현주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앞서 걸어갔다. 가늘게 떨리는 그 가냘픈 어깨가 민재의 시야를 아리게 채웠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말로 다 담지 못할 애잔함과 씁쓸함이 짙게 서렸다.새까만 어둠이 짙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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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화.사람이 동물로 보인다는 게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오늘따라 길게 늘어선 의대생들이 목마름에 허덕이는 짐승 떼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한 쌍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의과대 대표 커플이었다.훈남에 훈녀. 공부 잘하는 애들이 잘나기까지 한 건 무슨 조화인가. 괜한 자격지심이 현주를 쓸데없이 할퀴고 지나갔다.대학을 졸업했지만, 전공은 이력서 한 줄을 채우는 용도였다. 졸업 후엔 작은 회사만 전전하다 정착하지 못했다.그러다 친구와 간 해외여행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이 그녀를 이 세계로 끌어들였다. 뜬금없는 선택이었지만 바쁜 시간만 아니면 꽤 즐거운 일이었다.물론 지금은 토가 나올 지경이다.“우웩. 쟤네들 진짜 재수 없어. 부둥켜안을 거면 집에 가서 붕가붕가를 하든가. 여기가 지들 안방이야?”에스프레소를 연신 뽑아대던 윤아가 스팀 피처를 든 현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노골적인 말에 현주가 눈을 크게 뜨자 윤아는 이 정도는 약과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삐죽였다. 현주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바쁘다, 윤아 씨. 잔말 말고 손 좀 움직이지?”“넵! 캡틴!”가늘어진 준호의 눈초리를 피하며 윤아가 잽싸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맞춰 현주의 손도 빨라졌다.점심 생각이 없어 현주는 학생 식당 대신 카페 앞 쉼터로 나왔다. 음료 한 잔을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았다.6월로 접어든 오후의 볕은 생각보다 따가웠다. 그래도 현주는 두 눈을 감고 그 볕을 고스란히 얼굴에 담았다.아이를 의식적으로 잊으려 한 지 한 달. 이렇게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다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억지로라도 기분을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그때 차가운 물기가 뺨에 닿았다. 깜짝 놀란 현주가 눈을 떴다.준호가 볕을 통째로 막아선 채 앞에 서 있었다. 다부진 몸에 완전히 가려진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안전한 그늘을 만들었다.“이현주, 얼굴 다 탄다. 청승이냐?”“바람 쐬는 거예요. 근데 카페에 윤아 혼자 있어도 돼요?”“바쁜데 내가 너랑 노닥거리려고 나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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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화.일주일 만에 만난 민재와 단골 맥줏집으로 향했다.어쩐 일인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기분을 살피며 그가 좋아하는 병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민재가 답답한 듯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고 셔츠 단추 하나를 열었다.“오빠, 무슨 일 있어?”“어? 그냥 회사에 골치 아픈 일이 좀….”“무슨 일인데?”“거래처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왔거든. 접대를 안 해서 그런 것 같아. 하아, 싫은데.”“접대? 요즘도 접대하면서 영업해?”민재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고급 저녁 식사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현주는 알고 있었다.“하지. 갑인 업체엔 아직도 그런 거 원하는 사람 많아. 웃긴 건 죄다 유부남이라는 거야. 더럽지 않냐?”“오빤? 오빠는 그런 데 가면… 어떻게 해?”“나야 뭐. 그 사람들 2차 챙겨 주고 오는 거지. 왜, 걱정돼?”현주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가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보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걱정 마.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선임이랑 같이 가. 근데 오랜만에 질투를 다 받네? 사랑받으려면 오빠가 2차 문턱까지 갔다 와야 되나?”“미쳤어! 그럼 진짜 끝이야.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현주가 눈을 흘기며 그의 어깨를 손등으로 툭 쳤다.“하하. 걱정 말라니까. 더러워서 안 가. 네가 있는데 내가 거길 왜 가.”민재의 말에 현주가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재는 욕실로 향했다. 그동안 현주는 과일을 준비했다.두 사람 사이에서 한 달 전의 아픔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있었다. 잔상이 불쑥 찾아오는 날에도 현주는 그 앞에서 우울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다만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현주가 민재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한 달 전만 해도 안달이 난 쪽은 민재이었다. 그런데 그 일 이후로 뒤바뀌었다.현주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고, 곧장 닿지 않으면 불안했고, 그가 없는 밤이 싫었다. 함께 있고 싶다는 충동이 점점 강해졌다.혹시 나를 떠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휩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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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화.퇴근 후나 야근 중에 느닷없이 걸려 오는 연락을 군말 없이 받아 주는 것도 슬슬 지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민재가 짧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현주야. 좋게 생각해. 그리고 빨리 잊어. 그게 너한테 좋아. 알았지?”“…오빤, 잊은 거야?”“하아… 현주야. 우리 과거 얘긴 그만하자. 내가 짊어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더는 생각하지 마!”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그의 팔 안에서 현주의 어깨가 움찔했다.이러지 않기로 했는데. 혹시 나한테 싫증이 난 건 아닐까.조바심이 난 현주가 불안한 마음에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 감촉에 민재의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그가 그녀의 옷을 벗겨 자리에 눕히고 몸을 쓸어내렸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시선을 두던 민재가 숨을 고르고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녀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조급함과 애달픔이 고스란히 민재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불안을 지우려는 듯 서두르는 손길, 그리고 어떻게든 매달리려는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민재는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지친 건 아니야. 다만….’복잡하게 엉킨 머릿속을 비워내듯, 민재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불안으로 떨리는 현주의 숨결을 진정시키듯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눈꺼풀과 뺨을 쓸고 내려갔다.“…현주야.”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의 짜증 대신 묘한 연민이 묻어났다. 거친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싶다는 듯, 민재는 그녀의 숨결을 탐닉하듯 깊게 입맞춤을 나누었다.서로의 체온이 얽히며 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살결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거친 호흡이 귓가를 채웠다. 진흙처럼 무거운 기억들이 사랑이 아닌 쾌락에 가려져 갔다.불안을 잊기 위한 절규의 몸짓들이 사랑으로 둔갑한 채 두 사람의 밤을 잔인하게 채워갔다.***한 달에 한 번 있는 카페 회식 날이었다.맨날 고기만 먹는 게 지겹다는 윤아의 볼멘소리에 준호는 배가 불렀다고 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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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화.하아… 어쩌다 여기까지.현주가 욕실 거울에 비친 제 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찐득한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준호의 오피스텔이었다.몇십 분 전.창고에서 바닐라 파우더를 한가득 안고 온 현주가 바 앞에 그것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뿌연 것이 일순 피어올랐다.‘불만 있으면 말로 하지?’‘아, 그렇게 느끼셨어요? 무거워서 그런 건데.’민망해진 현주가 배시시 웃고는 파우더를 정리하려 바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 선반을 열고 봉지를 밀어 넣는데 안쪽 나사에 걸렸는지 들어가지 않았다. 힘껏 밀어 넣은 순간, 봉지가 부욱! 터졌다.‘아앗!’하얗고 달콤한 가루가 한 톨도 남김없이 현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차라리 밀가루가 나을 뻔했다.준호와 윤아가 달려들어 털어냈지만 소용없었다. 가루는 머리와 옷에 떡하니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이현주, 말로 하랬잖아! 이런… 괜찮아?’‘캡틴은!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와요? 야아, 어쩔. 아! 나 좋은 생각 났어. 완전 굿 아이디어야.’현주의 옷을 털어 주던 윤아의 얼굴에 분위기와 맞지 않는 생기가 돌았다. 잔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준호의 귀까지 들렸지만, 그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쭈, 캡틴 집에서 씻고 쉬다 나와. 이러고는 회식은커녕 집에도 못 가.’‘윤아야, 됐어. 화장실에서 대충 씻어 볼게.’덩어리진 가루를 떼어내며 현주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준호가 입을 열었다.‘윤아도 지 놀이터인 줄 알고 드나드는 데야. 씻고 쉬다 나와.’‘아니에요, 정말 괜찮은데….’‘고속도로 타다가 휴게소 들렀다고 생각해. 그럼 되잖아.’준호가 워낙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현주도 어느새 괜찮은 건가 싶었다. 사실 학교 화장실에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입주민 카드를 받아 들어선 오피스텔은 생각보다 깔끔했다.정기적으로 룸 클리닝을 받는 모양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 넓었고, 먼지 한 톨 없었다. 가루 범벅인 채로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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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화.“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만지고 싶으면 살아 있는 사람을 만져야지.”그가 현주의 손에서 피규어를 조심스레 가져가 제자리에 넣고 유리문을 닫았다.“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궁금해서. 근데 이 시간에 왜 오셨어요?”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이 고작 부린 순발력이 왜 벌써 왔냐는 타박이었다.“내 집에 내가 오는데 이현주 허락을 받아야 하나?”“…아뇨.”지극히 맞는 말에 현주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긴장 풀어. 회식 내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전화 여러 번 했는데 안 받길래 온 거야. 마감은 원래 윤아 몫이고.”“저 때문에 미루신 거예요? 괜찮은데. 옷도 사서 입었는걸요.”준호의 시선이 그녀를 느리게 훑었다.늘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만 보다가 등까지 내려온 긴 머리를 보니 어딘지 색달랐다. 게다가 하얀 원피스였다. 그사이 내려앉은 석양이 천 위에 얹히며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냈다.하얀색이 붉게 물드는 순간, 준호의 동공이 흔들렸다.“캡틴? 저 괜찮다니까요. 오늘 회식해도 돼요.”“어…? 아냐. 윤아도 취소됐다고 좋아하던데. 애인 만나러 간다고. 그건 그렇고, 이현주. 배 안 고파?”“고프긴 하죠.”“그럼 나가서 저녁 먹을래?”“아… 뭐… 네.”이렇게 같이 먹을 거면서 회식은 왜 미뤘을까. 현주는 알 수 없었다.***준호가 데려간 곳은 허름한 순댓국집이었다.겉모습과 달리 안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현주가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순댓국 잘 안 먹어 봤나 봐. 여기가 그렇게 신기해?”“저 순댓국 처음이에요.”“처음?”“중학교 때 순대를 처음 먹어 봤는데, 너무 징그럽더라고요. 그 촘촘하게 박힌 거무튀튀한 당면이요.”말하면서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준호가 희귀 동물이라도 본 얼굴을 하더니 이내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 온다고 했을 때 말하지. 다른 데 갔을 텐데.”“어릴 때 얘기예요. 오랜만에 먹어 보고 싶기도 했고. 저 때문에 회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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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화.집 앞에 도착한 현주가 얼마 전 민재가 달아 준 도어 록을 해제하고 들어갔다. 민재는 먼저 와 방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현주는 술에 취하면 없던 애교도 생겼다. 다가가 그의 허리를 붙들듯 껴안았다.그 순간, 낯선 향수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오빠, 향수 바꿨네.”“어? 누가 안 쓴다고 주더라고. 근데 너 술 마셨어? 사장이랑 단둘이 먹은 거야?”“오늘 회식이었는데… 오빠, 나 오늘 일하다가 바닐라 파우더를….”“현주야. 너 행동 잘해. 밥만 먹은 줄 알았더니 술까지. 앞으로 그러지 마.”민재가 말을 끊었다.불쾌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현주는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 상기된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평일에 자고 간다는 건 안고 싶다는 뜻이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그의 질투가 내심 기분 좋았다. 질투는 자신이 그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두 사람의 몸이 뒤엉켰다. 현주도 술기운에 밀려오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연신 밭은 숨을 내쉬었다.“하읏.”“하아… 현주야… 너무 좋아.”잠시 뒤, 그녀의 등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르던 민재가 낯선 음성을 뱉었다.“현주야… 나, 하고 싶은 거 있는데. 해도 돼?”“하… 무, 무슨 말이야?”평범하지 않은 요구에 현주가 벗어나려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민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더 힘을 주어 밀착해 왔다.“…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풀지 못한 욕정이 아쉬운 듯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곤히 자는 민재를 멍하니 바라보는 현주의 얼굴이 위태로웠다. 작은 돌멩이 하나만 던져도 깨질 살얼음 강 같았다.그녀의 손에는 민재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낯선 번호로 2주 전에 온 메시지.[민재 씨, 로라예요. 그날, 우리 좋았잖아. 언제 올 거야?]같은 번호로 일주일 전에 온 메시지.[자기! 자주 보니깐 너무 좋아! 다음 주에도 또 올 거지? 기다릴게, 쪽!]오늘 온 메시지.[자기, 이렇게 연락 안 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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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화.내가 아는 민재가 아니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오빠가 이러면 더 이상한 거 몰라? 오빠야말로 변했어. 흐흐흑. 변했다고.”“하, 진짜 미치겠네. 그만해.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민재는 우는 그녀를 달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질투를 하고 그녀를 안던 사람이 맞나 싶게 차가웠다.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간다는 거지. 혹시 그 여자한테.“…오빠. 지, 지금 어디 가?”“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자냐. 잠을 자야 내일 출근할 거 아냐. 너도 딴생각 말고 자 둬. 연락할게.”주저앉아 있는 현주에게 시선을 한번 주고는 그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붙잡을 용기도 없었다. 차라리 자존심 같은 게 없으면 좋겠다고 현주는 생각했다.도어 록 잠기는 소리만 을씨년스럽게 울렸다. 민재가 빠져나간 이부자리를 바라보던 현주가 엎드려 큰 소리로 울어 버렸다.***다투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민재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날 밤 여러 번 전화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현주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던 민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민재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현주만 남았다.내가 너무 다그쳤나. 그의 말이 사실이었을까.“현주 씨, 스무디가 물 되겠다. 언제까지 갈 거야?”준호가 멈출 기미 없이 돌아가는 블렌더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아, 죄송해요. 딴생각 좀 하느라.”“무슨 일 있어?”“아니에요.”“바람 좀 쐬고 와. 조금 있으면 휴식 시간이니까 일찍 나갔다 와.”준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아무리 바빠도 실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요 며칠 자꾸 음료를 틀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남자 친구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애정 전선에 문제가 생긴 건 자신에게 좋은 일이다. 그래도 근심 어린 얼굴을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경력 하나 없는 현주를 뽑은 이유는 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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